반응형 세계사이야기 | 명나라의 대외관계 2부 명과 서양의 관계1. 마카오인도 항로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포르투갈에서 파견한 바스코 다 가마였다. 이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서로 경쟁하게 되자 교황 알렉산더 6세는 태평양의 자오선을 경계로 두 나라의 범위를 확정시켜, 이른바 교황의 식민지 분계선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인도와 중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1517년에 광동 둔문을 점거하였다가 다음 해에 명군에게 쫓겨났다. 명은 처음에 광주에다 시박사를 두었는데, 후에 오문(마카오)으로 옮겨 마카오가 광동 대외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때문에 남양 각국의 상인들과 함께 포르투갈 상인들도 섞여 마카오로 왔다. 1553년에 포르투갈 인들은 태풍을 만났다는 이유로 화물을 마카오에 내리도록 요청하여 마카오에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2024. 9. 5. 세계사이야기 | 명나라의 대외관계 1부 주원장(제1대 황제, 홍무제)의 명(明) 건국주원장(제1대 황제, 홍무제)은 17세가 되던 해에 집안이 가난한데다 재황(災荒)을 만나 가족이 병들고 굶어 죽자 할 수 없이 황각사의 탁발승이 되었다. 1355년에 곽자흥이 원 말에 일어난 유복통의 백련교도 난에 호응하여 기병하였는데, 주원장은 그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번 전공을 세워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곽자흥이 바로 그 해에 병사하는 바람에 주원장은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백련교의 한림아(韓林兒)를 받들면서 민심을 얻었다. 이때부터 주원장은 이선장, 유기, 주승과 같은 인재들을 모으고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주원장은 1356년 집경을 점령한 다음 응천부로 고치고,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군기를 엄하게 하면서 세력을 주변 지역으로 확대해 나가가고.. 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2024. 9. 5.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