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세계사이야기 | 명나라의 대외관계 1부

곰고로곰 202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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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제1대 황제, 홍무제)의 명(明) 건국

주원장(제1대 황제, 홍무제) 17세가 되던 해에 집안이 가난한데다 재황(災荒)을 만나 가족이 병들고 굶어 죽자 할 수 없이 황각사의 탁발승이 되었다. 1355년에 곽자흥이 원 말에 일어난 유복통의 백련교도 난에 호응하여 기병하였는데, 주원장은 그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번 전공을 세워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곽자흥이 바로 그 해에 병사하는 바람에 주원장은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백련교의 한림아(韓林兒)를 받들면서 민심을 얻었다. 이때부터 주원장은 이선장, 유기, 주승과 같은 인재들을 모으고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벌거벗은 세계사 E163

 

주원장은 1356년 집경을 점령한 다음 응천부로 고치고,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군기를 엄하게 하면서 세력을 주변 지역으로 확대해 나가가고, 당시 유복통이 한림아를 소명왕으로 추대하여 세운 대송 정권을 받들어 신하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오공이라고 칭하면서 장사성과 진우량을 물리쳐 강소, 정강, 강서, 복건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지정 23년(1363)에 주원장은 진우량을 크게 물리치고, 다음 해에 오왕이라고 칭하였다. 이때에도 주원장은 대송의 연호인 용봉을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이미 자립할 뜻을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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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년에 주원장은 평강을 점거하여 장사성을 사로잡고 다시 방국진의 항복을 받아 냈다. 또, 남쪽으로 진우량을 정벌하고 남방의 할거세력을 대부분 숙청하였다. 그리고 원에 대응하기 위하여 오랑캐를 쫓아내고 중화의 대민족을 회복하자는 구호를 내세워 산동 등지를 점령하였다. 1368년에 주원장은 응천부에서 제위에 올라 국호를 명, 연호를 홍부라고 하여 명 태조가 되었다. 태조는 재위 기간 홍무라는 연호 하나만을 사용하여 홍무제라고도 부른다.

 

명군은 계속 원의 잔여 세력을 정벌하여 요동ㆍ섬서ㆍ사천ㆍ운남 등지를 평정하고, 홍무 15년(1382년)에 전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명은 강남에서 일어나 중국 전역을 통일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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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제3대 황제) 하의 대외관계

1. 막북 원정과 안남 정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영락제*는 문무 양면에 걸쳐 그의 재능을 발휘하여 민심의 안정과 국력의 신장에 힘을 기울였다. 영락제는 즉위 후 얼마 동안은 남경을 수도로 정하고 이었으나 그 곳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이유는 일단 막북으로 도망친 몽고의 잔존 세력이 대원 제국의 부흥을 노려 자주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국력이 원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데 대하여 영락제는 내심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최소한 원나라의 판도만큼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기도 하였다.

*영락제 : 명 태조의 넷째 아들. 아버지가 죽은 뒤 적장자 계승의 원칙에 의해 어린 손자가 그의 제위를 계승하자 이제 불만을 품고 제위를 찬탈하여 영락제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소망은 단순히 일시적인 욕망이나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락제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5차에 걸쳐 막북지방에 원정하여 몽고 민족과 싸웠고 또한 안남, 수마트라에도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환관 정화로 하여금 대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중동을 거쳐 멀리 동부 아프리카까지의 항로를 개척하게 하여 명나라의 국위를 해외에 과시하였다.

 

영락제의 이같은 대외 정책은 태조 홍무제의 소극적인 쇄국주의의 범위를 훨씬 넘는 것으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꿈꾸던 이른바 세계 제국형의 정책과 흡사한 것이었다. 의욕적인 군주 영락제는 내심 세계 제국을 건설해 보겠다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영락제의 제1차 몽고 원정은 영락 8년(1410)에 있었다. 영락제의 친정에 앞서 1409년 동몽고의 잔존 세력인 달단부의 벤야시리가 그들의 세력을 통합하여 강력해지자 콧대가 높아져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영락제는 크게 노하여 구복을 대장군으로 삼아 10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를 토벌토록 하였다. 그러나 구복은 켈루렌 강의 싸움에서 도리어 전멸당하는 대패배를 맛보았다.

 

다음해인 영락 8년(1410) 영락제는 친히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서 벤야시리를 오논 강의 전투에서 대파하였다. 패전한 벤야시리는 서몽고에서 새로 일어난 오이라트부로 도망쳤다가 그 곳에서 살해되었다. 한편 벤야시리의 부장 아루타이는 흥안령으로 도망쳐 저항했으나 결국은 패하여 명나라에 항복하였다.

 

동몽고의 달단이 명나라에 의해 타격을 받자 이번에는 서몽고의 오이라트가 강력해져 국경을 침범해 왔다. 영락제는 제2차 친정에 나서 오이라트를 트라 강에서 격파하였다. 이 싸움은 명나라와 오이라트와의 최초의 대회전이었는데 명나라는 대포의 위력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2차 원정이 끝난 후 영락제는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북방 민족과의 싸움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장기화할 경우에 천자가 남경에 있으면 신속히 대처할 수 없는 불리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전에도 남경을 떠나 북경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다. 영락제는 마침내 북경을 수도로 정하고 남경을 제2의 수도로 정하였다.

 

영락제의 제2차 원정에서 오이라트가 패하여 그 세력이 약화되자 이번에는 동몽고의 아루타이가 세력을 만회하여 재차 명나라에 대항하였다. 영락제는 아루타이 토벌에 나섰으나 아루타이가 깊이 숨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별다른 전과 없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4차, 5차에 걸친 원정이 강행되었으나 아루타이는 멀리 도망쳐 추적할 수가 없었다. 누차에 걸친 친정에도 불구하고 아루타이를 체포하지 못함으로써 이렇다 할 전과는 없었으나 그들 북방 민족들에게 국경을 침범하면 명나라가 반드시 대군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선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함부로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한 효과는 매우 큰것이었다. 영락제는 제5차 원정에서 귀환하던 도중 병이 들어 타계하였다. 영락제가 죽은 후에도 북방의 국경은 잠시 동안 안정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영락제의 여러 번에 걸친 친정이 거둔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락제는 북방에 친정하기 4년 전인 영락 4년에 현재의 베트남인 안남에 출병하여 안남을 병합하였다. 당시 안남에서는 진씨 왕조가 호씨의 세력에게 밀려나 진씨 대신 호씨가 정권을 세우고 있었다. 호씨에게 밀려난 진씨 왕조의 진천평이 명나라에 망명해 있었다. 영락제는 진천평을 안남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그를 안남으로 보냈으나 호씨가 진천평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영락제는 주능을 대장군으로 삼아 안남 원정을 명하였다. 7월에 출진한 주능이 10월에 이르러 진중에서 병사하자 장보가 대신 지휘관이 되어 가림강에서 안남군을 대파하고 호씨 왕을 포로로 하고 돌아왔다. 영락제는 포정사를 파견하여 안남을 다스리게 하고 진씨의 후손을 찾아 안남왕에 세우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안남을 명나라에 복속시켰다. 이에 대하여 안남 사람들은 크게 반발하여 여리를 중심으로 반항 운동을 일으켰다. 명나라에서는 마침내 영락제가 죽은 후 안남왕 여씨의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2. 아프리카까지 명을 알리다

7차에 걸친 남해 원정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명의 건국과 권위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한족 고유의 중화주의 발현으로 세계의 중심을 중국이며 다른 나라는 중국에게 신하의 나라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또 다른 목적은 대외 교역권을 정부가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송대 이후 농업 중심의 국가에서 교역 중심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특히 원대에 들어 동서 교역의 육상 통로를 통합하고 바닷길 또한 개발하여 동서 교역이 중국 경제의 중심으로 부각되어 있었다.

 

명 제국은 원의 정책을 모두 버리고 한족의 지배 질서를 다시 확립하려 했다. 한족의 지배 질서는 농업 사회를 기반으로 한 성리학 사회의 건설이었다. 때문에 명은 농업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중요했고, 이 과정에서 동서를 통합하는 제국 체계를 버리고 명 중심의 고립적인 제국을 건설해야 했다. 결국 민간의 대외 교역은 철저히 금지되고 정부가 교역을 장악하여 운영하는 방법인 감합 무역 형태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명 정부가 동서 교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이익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교역 상대국을 더욱 확대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이 명분으로나 현실적으로 절실히 필요하여 시도한 것이 정화의 남해 원정이었다. 그래서 정화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돌아 인도 밒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아프리카 동안까지 이르는 장거리 원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원정은 교역을 의식하여 평화로운 형태로 진행되었다.

 

또한 명 정부의 조공 무역 정책과 정화*의 남해 원정은 동남아시아 사회의 화교라는 새로운 존재가 등장하게 했다. 정부가 대외 교역을 장악하자 푸젠, 광둥 등지에서 민간 무역을 통해 살던 지역민들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결국 명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동남아시아로 이주해 와 중국과 밀무역을 계속했다. 이로 인해 화교들이 중국의 대외 교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고, 동남아시아 경제에서 중용한 존재로 등장하게 되었다.

*정화 : 운남성 출신으로 색목인 이었고 원래 성은 마씨였다. 명나라의 운남 정벌 때 명군의 포로가 된 후 주원장의 넷째 아들 연왕에게 환관으로 보내져 연왕부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세계사이야기 | 명나라의 대외관계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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