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과 서양의 관계
1. 마카오
인도 항로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포르투갈에서 파견한 바스코 다 가마였다. 이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서로 경쟁하게 되자 교황 알렉산더 6세는 태평양의 자오선을 경계로 두 나라의 범위를 확정시켜, 이른바 교황의 식민지 분계선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인도와 중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1517년에 광동 둔문을 점거하였다가 다음 해에 명군에게 쫓겨났다. 명은 처음에 광주에다 시박사를 두었는데, 후에 오문(마카오)으로 옮겨 마카오가 광동 대외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때문에 남양 각국의 상인들과 함께 포르투갈 상인들도 섞여 마카오로 왔다.
1553년에 포르투갈 인들은 태풍을 만났다는 이유로 화물을 마카오에 내리도록 요청하여 마카오에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건물을 짓고 성당도 세우면서 거주인들이 점차 늘어났다. 또, 네덜란드 인의 무역이 확대되면서 이들의 공격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마카오에 성을 쌓게 되었으며, 이 곳을 근거지로 삼고 공개적으로 또는 밀수를 통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다.
처음 명은 마카오를 정식으로 포르투갈에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명의 지방관과 조정의 부패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은 매년 5백 냥을 명의 지방 정부에 지조로 바치고, 명은 지방 정부에 지조로 바치고, 명은 매년은 2만여 냥을 세금으로 징수하였다. 그 후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함으로써, 마침내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마카오는 포르투갈 상인들뿐만 아니라 동양으로 오는 모든 서양인들의 경유지가 되었다. 선교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르투갈에 이어 에스파냐가 1571년에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고 중국으로 진출하였다. 즉, 여송(필리핀)의 이름으로 중국에 통상을 요구하여 복건에서 무역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뒤어이 네덜란드가 1619년에 하문과 장주로 들어오려다 명군에게 쫓겨났다. 이에 네덜란드는 다시 대만의 남부를 점령하여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2. 기독교 선교사
신항로가 발견되고 유럽인들이 중국으로 오기 시작하였다. 유럽인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상인들이고 또 다른 부류는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기독교는 유럽에서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교가 쇠퇴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예수회를 조직하고 새로운 포교 대상 지역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택하였다. 따라서 상인들과 함께 선교사들이 아시아로 왔다.
처음 중국으로 오려다 일본으로 가게 된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끝내 중국으로 왔으나 상륙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온 선교사 가운데 마테오 리치가 있었다. 그는 마카오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의 전통과 습관에 순응하면서 유럽의 과학과 기술을 소개하여 당시 중국 사대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제2의 정치 도시인 남경에서 명의 고관들과 접촉하였다. 특히, 서광계, 이지도 등과 만나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을 소개하면서 관계를 두텁게 하였다.
그리고 북경으로 가 신종을 알현하고 서양의 진기한 물건을 헌상하여 신종으로부터 천주당을 세우고 합법적인 포교를 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따라서, 기독교는 원대의 수도이었던 대도(북경)에서 포교되었다가 소멸된 이래 두 번째 공식적인 포교가 있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에 이어 아담 샬 등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왔는데, 그들은 중국인들의 조상 숭배와 제천 의식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3. 문화 교류
선교사들은 포교의 수단으로 중국어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서양의 천문, 지리, 과학 지식에 뛰어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중국인들에게 소개하였다. 마테오 리치만 하더라도 로마 대학에서 천문학과 수학을 연구하였다. 따라서 그는 중국에 오자 마자 서광계와 이지조에게 구술하여 유크리드의 기하학 원본을 번역하게 하였고, 또한 건곤체의를 지어 서양인의 천문학을 중국에 소개하였다.
이 밖에도 곤여만국전도를 그려 중국인들에게 외국에 관한 지리 지식을 소개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 지도에 중국을 중앙에 놓아 중국인들의 마음에 들도록 하였다.
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온 선교사들도 단순한 포교만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을 중국에 소개하였다. 천문 역법에 뛰어난 아담 샬은 숭정역서를 만들고, 청대에 들어와서도 흠천감에서 계속 일하여 부감에까지 올랐다.
명 말에 잠시 금교를 시켜 선교사들이 마카오로 추방당하였는데, 여진족이 만주에서 일어나 국방의 위협을 크게 느끼자 1622년에 마카오로 사람을 보내 선교사를 초청하여 이들에게 서양의 무기를 만들게 하여 변방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 학문이 중국에 들어옴으로써 중국의 자연 과학 지식이 더욱 풍부해지고, 또한 서양책의 번역 바람도 일어나 중국의 학술 연구 범위가 확대되었다. 중국은 중국 본래의 전통 문화가 있었는데, 서학의 수입으로 많은 분야, 예를 들면 회화와 음악, 건축 분야에서 서양적 색채가 첨가되어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서양의 논리학 등이 들어와 중국 학자들도 과학적 방법으로 학술을 연구하게 되었다.
한편, 서양 선교사들은 서양의 지식을 전달하고 포교하는 것 외에 선교 활동에 관한 보고를 그들을 파견한 본국의 선교 본부에 하여야 했다. 이들 보고서에는 그들이 중국에서 보고 듣고 이해하게 된 것을 썼기 때문에, 이들의 보고선ㄴ 중국 소식을 유럽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유럽에 한때 중국을 연구하는 바람이 불어 ‘중국열’이 일어났다. 즉, 선교사는 동서 문화 교류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북로남왜 (北虜南倭) 의 화를 통해 본 몽골ㆍ왜와의 관계
15세기 후반에 몽골지방에는 다얀칸이 나타나 내몽골 지방을 평정하여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의 사후 손자인 군비리크, 알탄이 다시 몽골부족을 규합하여 오르도스지방을 거점으로 세력을 편 후 세종의 가정(嘉靖) 초(1521)로부터 북변에 대한 침공을 격화시켰다. 당시 북변에 주둔하고 있던 명의 군졸이 몽골군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알탄의 침공은 하북지방과 산서 지방 깊숙이 그 피해가 미치게 되었다.
몽골족의 유목생활은 중국의 물자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명과의 국경무역개설을 요구하며 침입을 계속하였다. 조정에는 양계성(楊繼盛)을 비롯한 강경론자가 적극책을 폈으나 몽골의 국경무역 요구에 응하여 일시 화의를 성립시켰다. 즉, 대동을 비롯한 국경요지에 馬市를 개설하고 알탄을 순의왕으로 봉하였으며 그 자손에게도 관작을 부여하였다.
明ㆍ夢간의 무역품은 명에서는 견포, 쌀, 철, 보리, 소금 등 생활필수품을 가져갔고, 몽골로부터는 금, 은, 말, 소, 양 등을 수입하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명이 입은 사회경제적 타격은 막대하였다. 특히 북변을 방비하기 위한 군사비로 호부(戶部)에서 지출하는 은은 해마다 증가되어 결국 이는 농민의 조세부담으로 넘어갔고 이러한 북로의 피해는 변방의 농민만이 아니라 전 국민에게 큰 피해를 가져와 농민 반란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북로의 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동남 해안지방에는 倭에 의한 노략질이 계속되었다. 왜구의 원인은 일본 국내의 사정, 즉 무로마찌 막부의 약화로 지방세력을 통제하지 목한 점과 대명무역권을 둘러싸고 상인간에 일어난 패권다툼이 도화선이 되었다.
세종이 즉위하자 왜의 조공사절이 명에 왔으나 정통성 문제를 둘러싸고 조공사신 간에 대립이 있었고 여기에서 패배한 大內派(오오우치파)의 사자가 영파부근 연해의 주현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조공무역의 통제를 강화하고 사무역의 취체를 엄중하게 하자 정상적인 무역이 막히게 된 왜의 상인들은 약탈무역을 자행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명말 왜구의 발단이었다. 왜구는 수십인이 떼를 지어 소부대로 해안을 약탈한 후 민첩하게 달아나고 경우에 따라 내륙 깊숙이 침입하기도 하였다.
남왜의 피해는 북로에 비하면 큰 것은 아니었으나 사회 경제적 불안과 민심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정부는 장군 주환을 파견하여 밀무역의 거점인 장주권을 소탕하였다. 그러나 밀무역으로 이익을 챙긴 명의 상인들은 부패한 지방관과 결탁하여 주환을 실각시켰다. 왜구의 잔당은 주직을 중심으로 다시 격렬한 약탈무역을 자행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호종헌을 총독으로 대토벌을 단행하여 汪直을 체포하였다. 또 척계광 등의 활약으로 왜구의 주력을 복건의 平海衛에서 격파하여 40여 년간 계속되던 왜구의 화를 꺾게 되었다.
조선과의 관계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왕조가 교체하는 시기에 반도 에서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명태조는 공민왕 17년에 홍무 연호를 표방하였다. 그리고 상도로 쫓겨간 원나라가 최종 멸망한 해는 조선이 문을 열기 1년전인 1391년이었다.
위화도회군 이후 개창된 조선에서는 대명 중심의 대외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했기에 조선에서는 새로운 국호를 정하기 위해 명나라에 의견을 물었다. 왕조 개창의 급격한 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된 뒤 ‘조선’과 ‘화녕’두 칭호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지를 명나라에 물어보고, 그 뜻을 따라서 ‘조선’이라고 국호를 정하였다. 이렇게 조선은 대명 중심의 외교에서 ‘사대’를 표방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개창 초기에 명나라가 계속 트집을 잡자 ‘공요정책’으로 대응하려 하기도 했다. 그것은 명나라와의 충돌을 피해가면서 4군 6진을 개척하여 최대한 압록강과 두만강 방면의 강역을 넓혀갔던 점 등에서 볼 수 있다.
선조 25년(1592)부터 31년(1598)까지 두 차례에 걸쳐서 일본이 조선에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이것을 임진왜란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은 큰 위험에 처하였다. 조선은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였고 명나라에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조ㆍ명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연합군은 먼저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으로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자 명나라 군사는 다시 평양으로 되돌아가 움직이지 않으면서 일본군과 화의를 맺었다. 이 화의는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화의는 양측의 무리한 요구로 인하여 결렬되었고 일본군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전후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명나라 3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은 많은 인명을 잃고 농민들의 생활 터전이 황폐해졌으며, 경복궁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문화재가 불타버리거나 약탈당하였다. 일본 역시 수십만의 인명과 막대한 물자를 소모하였다. 명나라도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하였으며, 만주의 여진족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ㆍ청 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사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출동한 명나라 군대가 임진왜란과, 종전 이후 철수할 때까지 10년 동안 조선에서 행한 횡포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가 지원군을 파견함으로써 생겨난 조선 지배층의 명나라에 대한 숭배 의식은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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