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일생
1. 유년기
아이작 뉴턴은 1642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링컨셔의 그랜섬에서 남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콜스터워드 마을 근처 울즈소프 영주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이 해에 갈릴레오(뉴턴의 과학적 경력의 대부분은 이 사람이 발견한 것들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게 된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1642년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 해이다.
그가 태어나기전에는, 뉴턴가는 알려진 집안도 아니었고 집안에 교육을 받은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뉴턴이 탄생하기 전까지 이 집안이 17세기 동안 계속해서 경제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뉴턴과 그의 사후, 뉴턴을 연구하던 사람들에의해 밝혀짐)로 볼 때, 이들이 근면했을 뿐 아니라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을 만큼의 지혜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뉴턴이 태어나기 3개월 전에 그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1세는 방대한 토지와 재산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 아이작 뉴턴 1세의 유일한 아이인 유복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미 아버지를 잃은 데다가, 미숙아 였던 이 아기는 너무 작아서 누구도 이 아기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목숨이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어찌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어서 1643년 1월 1일이 되어서야 세례를 받았다.
뉴턴이 세 살 되던해 막대한 재산가이며 이웃 마을의 교구 목사인 바나바스 스미스라는 사람과 뉴턴의 어머니가 재혼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많은 재산이 생겨나게 되었지만, 어린 뉴턴은 어머니와 떨어져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울즈소프에 스미스 목사가 지어준 집에 남겨졌다. 아버지 없는 세 살짜리 사내아이가 어머니마저 잃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어머니 역할을 대신할 외할머니는 있었지만, 그가 외할머니에 대해 조금도 애정 어린 추억을 간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외할머니의 죽음에 조차 무심했다. 더 중요한 것은 외할아버지이다. 뉴턴의 어느 기록에도 그에 대한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을뿐더러 외할아버지의 유언장에서 뉴턴을 완전히 빼놓았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뉴턴은 성격이 비틀린 사람으로, 최소한 중년이 될 때까지는 언제난 정신병이 경계를 넘나들던, 불안정하고 신경증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단순히 어머니가 세 살때 재혼하여 떠나버렸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없는 유복자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뉴턴의 성격의 원인을 찾아서는 안될 것이다. 뉴턴의 성격은 그러한 상황에 미운털이 박힌 아이로 대하는 주위의 반응에 비롯해 상당히 어긋났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가정환경의 중요성과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화에 얼마나 큰 비중을 주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1653년 8월 바나바스 스미스 목사가 사망하자, 뉴턴의 어머니는 울즈소프로 돌아왔다. 그러나 가문이 다른 남동생 한 명과 두 명의 여동생이 함께 있었고, 여동생 중 한 명은 채 돌도 지나지 않았으며, 다른 한명은 두 살이었다.
결국 어머니의 관심이 주로 이 두명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고, 뉴턴은 이들과 어머니의 관심을 나눠가져야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되어 아이작은 그랜섬에 있는 공립 중학교로 보내졌다. 그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 보통의 평범한 교육을 받았을 거라 생각되는 이시기는 뉴턴에게 매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후 몇 년동안 늘상 접해야 했던 수학서적, 자연철학의 출처가 되었던 대부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예외 없이 라틴어로 씌어진 것이엇는데, 그는 여기서 라틴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이섬에서 뉴턴은 처음엔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 또한 뉴턴은 조부모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다른아이들과 달랐으며 따라서 그가 이들과 사이 좋게 지내기힘들었다. 어느정도 자리가 잡혀가자 그는 그 학교에서 일등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 사람들을 놀래켰다.
1659년 말에 뉴턴의 어머니는 재산을 관리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를 울즈소프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뉴턴은 이시기를 매우견디기 힘들어 했다. 그랜섬에서 그는 배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를 밧보기 시작했기에 그의 머릿속은 항상 다른 생각 뿐이었다. 양을 지키라고 내보내면, 그는 상사식과 하사식(물을 바퀴앞쪽으로 가게하는 방식)의 물방아 모형을 만들어 댐과 수문과 함께 개천에 설치하여 그동안 양을 잃어버리는등 말썽만 피우게 된다. 전혀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 뉴턴을 나무라던 어머니와 달리 예전부터 뉴턴의 천재성을 알고있던 외삼촌과 교장선생이 어머니에게 천재를 썩히지 말라는 충고와 다시 학교로 보내라는 권유로 뉴턴은 1660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된다.
2. 청년기
1661년 6월초에 뉴턴은 케임브리지로 출발했다. 그의 인생에서 이 이상의 분수령은 없었다. 그 이후 18년 동안 전염병이 돌았던 시절에 있었던 두 번의 오랜 체류를 포함해 이따금씩 울즈소프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시골생활로부터 완전히 떠난 것이다. 뉴턴은 즉시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허가를 받았고, 요즘의 근로 장학생과 같은 신분의 학생이었는데, 장차 장원의 영주가 될 뉴턴이 왜 그렇게 공부를 했을까 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뉴턴 사후 그의 행적을 조사했던 이들에 의하면, 우선 뉴턴을 계속 교육시키지 않으려 했고,그의 어머니가 경제적으로 충분히 여유가 있었음에도 아들에게 들어갈 대학비용을 아까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뉴턴은 다른 자비 학생들의 심부름을 대신해주는 등,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일상 생활에서뿐 아니라 공부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1661년경에 와서는, 거의 한세기 전에 만들어진 케임브리지의 공식 교과 과정은 붕괴의 제 2단계를 맞고 있었다. 4세기 전에 만들어진 아리스토텔레스 중심의 주형으로부터 주조된 케임브리지의 학풍은, 이 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주형은 최첨단의 유럽 철학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1661년에 이르러 유럽 철학은 크게 변화했고 학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지적인 정체 상태의 표현으로 부분적으로는 하나의 규범으로서 법제화된 교과 과정의 법적 명령에 의해서, 또 부분적으로는 이 시스템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이 교과 과정을 지속시키려는 비상한 관심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지적인 활기는 이미 오래전에 떠나버렸다. 따라서 케임브리지 대학은 뉴턴을 새로운 철학으로 이끄는데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뉴턴은 데카르트 등이 쓴 무수히 많은 다른 서적들을 탐독했다.
그는 45개 소제목을 만들어 그 아래에 독서를 통해 얻은 것들을 정리 하였는데, 물질, 장소, 시간, 운동의 성질과 같은 일반적인 주제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질서로 이어지고, 다음으로 희박함, 유동성, 부드러움과 같은 수많은 촉각적 성질들이 등장하며, 격렬한 운동, 이어서 초자연적 성질들, 빛, 색깔, 시각, 감각 일반,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중 일부는 최초의 리스트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세부적인 주제들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훗날의 뉴턴이 남기게 될 과학사 업적의 중요한 소재들이 된 것이다.
뉴턴은 열심히 공부했다. 이러한 분야에서 안정된 결실을 맺기 위해서,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안정된 자리를 획득해야만 했다. 뉴턴이 관심있는 것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가르치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자연학이 아니었지만, 뉴턴은 공부해서 어려운 장학생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근로장학생 생활을 그만두고, 아무런 제약없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았다.
또 그가 연구원 자격을 얻는다면 이는 무제한으로 연장될수 있었고, 그는 그가 찾아낸 분야의 연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초창기의 망설임은 사라지고 이를 대신하여 열정적으로 연구하는 뭔가에 홀린 듯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1665년 여름 캠브리지를 위시한 영국의 많은 지방에 재난이 닥쳤다. 흑사병이 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뉴턴은 울즈소프에 돌아갔다.
울즈소프에 있던 약 2년의 시간동안 많은 연구를 하게 된다. 이 시간들은 뉴턴의 과학적 기초를 세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667년에 다시 대학에 돌아온 뉴턴은 연구원으로 선발됨으로서 앞길은 확실해 졌고, 대학 공동체에서 영구적으로 멤버 자격을 부여받았다. 아홉달 뒤엔 석사 학위를 받음으로 자동으로 상급 연구원지위로 승진하게 된다. 다시 1669년에 교수직을 받아 14년간 강의를 하였다.
3. 장년기. 노년기
1669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최초의 강의도 광학이었으며, 초기 연구는 광학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광학에 대해서는 이미 울즈소프 시절부터 스스로 수집․정비한 실험기구를 이용해 빛의 분산현상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굴절률과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조사하였다. 한편 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이 수차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16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 이 망원경은 천체관측 등에 크게 공헌하여 이 공적으로 1672년 왕립협회회원으로 추천되었다.
그 해에 《빛과 색의 신이론》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1675년 박막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광학》(1704)을 저술했다. 1687년 대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1691년 조폐국의 감사가 되었으며, 1696년 런던으로 이주, 16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주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
한편 신학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하였다. 이 성서 연구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뉴턴은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런던 교외의 켄징턴에서 죽었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고 그 곳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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