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 비교 : 수니파와 시아파
수니파와 시아파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분리된 두 가지 큰 종파이다. 일단 역사적으로 보면 수니파는 정통파 이슬람교도라고 할 수 있고, 알리를 지지하는 파는 시아파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종파가 분리된 것은 이슬람제국의 내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마르가 죽은 후 우스만이 제 3대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의 통치기간 중에 내분이 일어나 칼리파가 살해당하고 무함마드의 사위이며 사촌인 알리가 암살자들의 지지로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암살당한 우스만의 육촌이며 당시 시리아주 총독인 무와이야는 우스만의 살해자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그들을 처벌하지 않는 한 알리를 칼리파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알리는 그들을 처벌할 수 없었으므로 알리군과 무와이야군이 대결하여 이슬람제국은 양분되었다. 이것이 곧 제 1차 내란이다. 이 후 무와이야가 실력으로써 칼리파의 자리에 올라 종래의 아랍관습과는 다르게 후계자 선출을 세습제로 바꾸니 곧 우마이야 칼리파 왕조의 시작이 되었다. 이 내란 중에 알리를 지지하는 파는 후에 시아파로 발전 한 것이다. 이 시아파는 정통칼리파 가운데 알리의 선임자인 아부 바크르, 우마르 및 우스만을 찬탈자로 간주한다.
후에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죽음과 더불어 시아파는 보다 조직화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朝)의 창시자 무와이야가 아들 야지드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자 세습제에 생소한 아랍부족들의 반발은 극도에 이르렀다. 이에 후세인은 살해당하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슬람교도 공동체는 제 2차 내란을 겪게 된다. 여기서, 시쉬아파는 정권탈취에 실패하고 이 내란의 결과 종파로 확립되게 된다. 이 파는 알리와 후세인의 후손을 이맘(Imam)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최후의 이맘인 무함마드가 어린나이로 죽고, 쉬아파는 그를 죽지 않고 단순히 숨어 있는 이맘, 혹은 말세에 돌아오는 구세주(mahdi)로 추앙하였다. 이 제 2차 내란 중에 많은 일반교도들은 중립을 지켰고, 이 중립적인 세력이 ‘수니(Sunni, 관습을 따르는 사람)’ 이슬람이 되었다.
수니와 쉬아의 근본 차이점은 후계자 문제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수니파는 예언자 무함마드만을 절대 과오를 범하지 않는 인간으로 보지만 시아파는 무함마드를 포함하여 모든 이맘들을 과오를 범하지 않는 사람들로 본다. 따라서 시아파는 최후의 12대 이맘이 죽지 않고 숨어 있는 이상 그의 권한을 대행하는 실권자가 신학자들의 보좌를 받는다면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즉 쉬아파는 꾸란과 예언자의 언행록을 보다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으나, 수니파는 옛날의 대신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된 것은 이미 관습으로 굳어졌으므로 다시는 다른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슬람교 종파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교단에서는 종교 지도자인 칼리파를 선출하였다. 그런데 3대 칼리파인 우스만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칼리파가 되었다. 그런데 알리 또한 우스만의 복수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당하게 된다.
① 시아파
시아파는 알리의 가문에게 칼리파 자리를 돌려줘야 한다는 운동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시아라는 말은 '시아 알리(Shia Ali)'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나온 명칭이다. 이들은 칼리파가 무함마드의 혈통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종파이다. 현재 이슬람교도의 10%정도가 시아파이며, 대표적인 시아파 국가는 이란이다.
② 카와리즈파
카와리즈파는 알리를 살해한 자들이 주장한 것으로, 이들은 칼리파가 독실한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전투적, 행동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성전(지하드)를 6번째 기둥으로 삼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들은 후에 내분이 일어나 매우 약화되어서, 현재는 알제리, 튀니지, 오만 등에 소수가 발견될 뿐이다.
③ 수니파
수니파는 신의 말씀인 꾸란과 함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과 관행을 의미하는 수나(Sunnah: سنة, 관례, 법적 관행)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랍어로는 '아흘 알-순나(Ahl al-Sunnah, أهل السنة: 순나의 사람들)'라고 하며, 이를 줄여 수니파라 칭한다. 수니파는 대체로 아부 바크르를 비롯해 선출과 충성서약에 따라 즉위한 4대 정통 칼리파를 인정하고, 4대 이슬람 법학파(法學派) 중 어느 하나에 속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시아파 형성이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파 알리(재위 656∼661) 및 그 후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에 바탕을 두었듯이, 수니파의 형성에도 칼리파 제도의 확립과 보유, 아랍 민족의 우월권 확보와 같은 정치적 이유가 작용하였다.현재 이슬람교도의 90%정도가 수니파이다.
이슬람교 신비주의, 수피즘
우마이야(650~750년)), 압바스(750~1258) 시대를 정점으로 중세 이슬람 제국은 군사적 팽창과 문화적 융성에 힘입어 주변의 여러 지역을 통합하고 복속시켰다.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의 세력은 사산조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 지중해를 넘어 서유럽과 스페인 남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 속에서도 통치자나 귀족층으로 편중되는 부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무슬림의 삶은 점차 세속화되었고 초기 무함마드가 제창하였던 종교적인 가치가 왜곡되어 오히려 순수한 신앙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7세기부터 이슬람 문화권 내부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이슬람교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수피들이 이슬람의 종교학자들인 울라마들이 확립한 종교 규범(샤리아)와 형식에 얽매어 경직화된 이슬람 사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수피들은 영적인 삶을 갈망했고 유목민이 입는 옷처럼 거친 양모로 만든 옷을 걸치고 금욕생활을 실천했다. 양털을 아랍어로 수프(suf)라고 하며 이런 운동을 주도하던 사람들이 양모로 만든 옷을 입었기 때문에 수피(sufi)라는 말이 생겨났다.
수피들은 외형적 숭배의식을 행하기보다 마음의 정화와 승화를 통해 내면의 영적 만족과 희열을 추구함으로써 진정한 신앙의 길을 찾고자 했다. 수피들은 창조주이며 우주의 유일한 통치자인 알라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으므로 꾸란에서 명령하는 엄격한 신보다 세속 삶의 무게에 짓눌린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신과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 수피들은 수행과정이며 길을 의미하는 타리카(tariqah)를 통해서 신께 이르는 신비체험을 하였다. 이 타리카는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shariah)와는 매우 다른 개념이고 타리카가 내면적 길이라면 샤리아는 외형적 길이다.
그러나 수피즘은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이긴 하지만 이슬람교의 정통적인 교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슬람교에서 알라는 위대한 창조주이며 피조물의 일부가 아니다. 또한 피조물은 창조주의 일부가 아니며 창조주의 본질, 속성, 행위 면에서 창조주를 닮지 않으며, 다만 피조물은 창조주의 지식과 의지, 능력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의 노력을 신과의 합일 가능성을 주장하는 수피즘은 궁극적으로 신과 인간 간의 경계를 약화시키거나 허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또한 수피즘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는 경우에 영적인 세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세계를 지나치게 무시함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나을 수 있다.
이처럼 수피즘 자체는 이슬람교의 정통적인 교리와 상충되는 부분이 많지만 수피즘은 이슬람교와 이슬람 문화권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글을 잘 모르거나 복잡하고 난해한 꾸란과 그 주석서인 하디스, 꾸란과 하디스로부터 파생된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해박하지 않은 일반 신자들에게는 고행과 수행을 통해서 하나뿐인 창조자 알라와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수피즘의 생각은 더욱 효과적으로 먹혀들었고 무엇이 정통적이고 수피즘에 신학이나 철학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 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일반 신자들에게 있어서 수피즘은 다가가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대중적인 이슬람교였다. 이러한 점에서 수피즘은 이슬람교에서 이슬람 문화권을 통합하는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슬람교 신자의 수와 분포
현재 전세계 이슬람 신자는 13억8900만 명으로 추정되며 21억3300만 명인 기독교도 다음으로 많다. 국내 이슬람 신자는 한국인 3만5000명, 외국인 10만 명이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와 이란에 이르는 이른바 중동지역과, 동부 러시아, 투르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한국 ·일본 등 세계 곳곳으로 선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에 이슬람성원인 모스크를 건립함으로써 한국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교의 발전
이슬람교에서는 신의 계시를 받은 자들을 사도 또는 예언자로서 존중하였는데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무함마드 모두 여기에 속한다. 무함마드는 최후의 예언자이면서 완전한 인간상으로 무슬림들의 경외를 받는다. 무함마드는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은 후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포교를 시작한지 13년이 되는 해인 622년, 무함마드를 따르는 신도수가 증가하자 씨족들은 위협을 느껴 그를 추방하려는 결정을 내리게 되고, 이에따라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던 터에 무함마드는 야스립(Yathrib)에서 온 대표와 만나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을 보호해주는 대신 도시내의 분쟁을 조정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추종자들과 무함마드는 이주하게되는데 야스립은 새로운 신앙과 도시의 중심이 되어 메디나로 불리게되었다. 이 이주를 히즈라(Hijrah, 서기 622년)라고 하는데 이 해가 이슬람력의 기원이 된다.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는 포교를 통하여 많은 세력을 이끌기 시작했다. 메디나의 무슬림들은 메카의 대상들을 공격하여 메디나와 메카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3대 성전(Jihad)으로 묘사되는 이 전투는 바드르(Badr) 전투(624년), 우후드(Uhud) 전투(625년), 한다끄(Khandaq) 전투(627년)였다. 이 3대 성전에서 우후드 전투에서만 패하였을 뿐, 양 전투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무함마드와 메카 사이에 후다이비야 조약을 맺어 메키를 자유롭게 순례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는 마침내 630년에 메카에 무혈입성하여 카바의 우상을 파괴하여 이슬람공동체를 세웠다. 무함마드는 다시 메디나로 돌아갔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세력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631년 무함마드는 메카순례를 한 후, 632년 6월 8일 사망하였다. 이후, 정통 칼리파 시대를 거치면서 이슬람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