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글부글 끓는 솥(kessel) : 스탈린그라드(舊 차리친) 전투, 1942~1943년
소련은 극심한 소모전에서 많은 병사를 잃었다. 군사력과 경제력도 말라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스탈린의 오판으로 소련군은 큰 위기를 맞게 되고, 스탈린은 군을 더 가혹하게 몰아침으로써 흩어지는 규율을 잡았다.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를 인정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소련군은 계속 밀렸고, 동맹국의 지원도 어렵게 되었다.
결국 스탈린은 자력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되었다. 소련군은 천왕성 작전(껴안기 작전)이라는 큰 역습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 작전의 가장 핵심인 45일간의 스탈린그라드 방어는 츄이코프의 지휘아래 성공하게 되고 천왕성 작전 또한 성공하게 된다. 이는 독일군의 패배를 의미했고 소련군은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뜻대로 군을 움직이다 소련군의 반격 작전의 하나를 실패하게 된다. 이것의 심리적인 타격이 꽤 컸는지 스탈린은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고 군사 엘리트들에게 (대표적으로 쥬코프) 전투를 맡기게 된다.
성채 작전 : 쿠르스크 전투, 1943년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독일군은 막강했다. 소련에서는 전쟁을 치르는 방법에 대한 심원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스탈린은 군부는 군사엘리트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소련의 육군과 공군의 조직은 효율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고 이는 곧 독일에 뒤지지 않는 전력의 보유를 의미하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으로부터의 원조도 한 몫 하였다. 서구의 원조와 조직 변화로 소련군은 독일군과 대등하게 맞선다. 초기 첩보전에서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던 소련은 독일의 작전을 눈치 채고 이를 이용하여 독일을 패퇴시킨다. 그 후 소련은 계속 승리하였고 잃어버렸던 지역의 2/3를 수복한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패배는 히틀러의 전략이해가 부족했고 첩보가 부실하며 병참선이 지나치게 길어진 것, 소련의 압도적인 자원 등의 결과로 해석되어 왔다. 그리고 소련 승리의 주요인으로 초반 전투에서 소련을 아슬아슬하게 생존하게 했던 일반병사들의 자기희생적 저항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가진 숙명론적 사고는 그런 희생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 희생이 후에 소련이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거짓 새벽 : 1943~1944년
독일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소련은 “총력전”이란 단어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농민은 전쟁을 위해 식량을 재배했고, 공장 노동자는 무기를 생산했고 과학자와 기술자는 전쟁 수행방법을 고안했다. 뿐만 아니라 수용소 및 교도소 수감 인구들을 이용해 군수물자를 생산하기도 했다. 한편 소련군은 기만전술을 펼치며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행한다. 이로써 소련은 독일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한다. 그리고 동유럽의 커다란 주인이 된 소련과 영국과 미국의 얄타회담이 벌어진다.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삼국의 배타적 연맹, 세력균형, 평화의 이상주의를 말하고 스탈린은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 이를 해리 홉킨스는 얄타회담이 “새날의 새벽”을 알린다고 말했다.
독일은 전시에도 여성을 노동력으로 활용하기를 주저한데 비해서 소련은 여성 노동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후방의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메웠다는 것이다. 이는 소련은 총력전을 벌일 만큼 상황이 다급했지만 독일은 독․소전쟁 중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탈린은 자신의 국가 이기주의를 포기할 것이라고 한 번도 시사하지 않았는데, 루즈벨트와 처칠은 회담의 분위기만을 보고 이상주의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스바스티카의 추락 : 1945년
소련군은 여세를 몰아 베를린으로 향한다.
베를린 주변의 독일군이 부담스러웠던 소련은 베를린 주변의 정리부터 시작한다. 정리가 끝난 후, 게오르기 쥬코프와 이반 코네프는 경쟁심을 갖고 베를린을 공격한다.
결국 베를린은 함락되고 히틀러는 자살함으로써 독일과의 전쟁은 마무리된다.
5월 8일, 독일이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독․소 전쟁이 끝이 난다. 이후 포츠담회의가 열린다. 포츠담회의에서는 동맹국들 간의 불화가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전쟁이 끝났을 때 소련의 전사자 수는 2500만명으로 추정되었고 독일은 900만명으로 추정되었다.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하면서 보복학살은 수없이 자행되었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동방 전제정의 언어를 받아들였다. 사로잡힌 여자를 윤간하고 살해하는 것이 그저 “여자하고 재미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 숭배 : 스탈린과 독소 전쟁의 유산
소련의 정치 선전이 여러 해 동안 틀림없는 암흑의 세력이라고 주장한 적에게 거둔 완전한 승리와 스탈린이 동일시됨으로써 소련 국민 수백만 명에게 그를 신성에 접근하는 그 어떤 것으로 바꾸는 개인 숭배가 일어났다. 근대추구는 1945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스탈린이 우선시한 것은 전후복구였다. 또한 전쟁포로들을 재판하고 본국 송환 계획을 시행하였으며 소련의 승리를 가져온 전쟁영웅에 대한 토사구팽을 시행한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권력을 축적해서 손안에 가지고 있을수록, 그는 더 많은 권력을 원했다. 1940년대 말에 스탈린은 예전의 테러 분위기를 되살려 내어 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냈다. 정권 말기에는 유대인에 대한 테러를 강화하여 반유대주의가 모든 영역에 파급되었다. 또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을 의식한 핵 개발에 들어가고 결국 핵무기를 손에 넣게 된다. 이렇게 권력에 집착하고 공포로 나라를 이끈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스탈린의 죽음은 분명 “독재자”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 그에 대한 숭배가 사라지고 그의 유산은 대부분 폐기 되며 그의 유해 또한 크렘린 궁에서 빼내어 인근 묘지에 재매장됐을 정도로 그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소련인들의 슬픔은 진정이었다. 그들에게 스탈린이란 피할 수 없었던 적에 맞서서 그들을 러시아 역사상 비견할 예가 없는 승리로 이끈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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