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측 사망자만 줄잡아 2천7백만명. 독일군 전사사상자의 80%를 앗아간 전쟁. 1941~1945년의 독일 소련 전쟁은 인류 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이지만, 그동안 비밀에 싸여 그 진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의 배신이 만든 최악의 전쟁에 대하여, 벌거벗은 세계사(E32, 220125) 방송을 토대로 분석 요약하였다.
어둠이 내려앉다 : 1917~1937년
1917년 10월, 피바람이 분다.
볼셰비키 혁명에 뒤이은 피비린내 나는 오랜 내전이 이어진다.
내전의 대가로 나라가 피폐해지고, 공업이 쇠퇴하고, 차르 제국(러시아 제국)에 속했던 변두리 영토를 잃었다. 약한 신생 국가인 그들은 자신들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전쟁의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그런 상황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내전을 끝낸 볼셰비키 당이 러시아를 중심으로 여러사회주의 공화국이 만든 연방, 즉 소련이 탄생한다.
1924.01.21. 볼셰비키당 최고 지도자이고, 사회주의 혁명의 상징이 였던 레닌이, 2번의 뇌출혈로 인해 죽음으로써 스탈린이 후계자가 되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이때, 라이벌 트로츠키 및 정적들을 무참히 제거하고 소련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권력을 잡은 후, 스탈린은 소련의 5개년 계획을 이끌어 경제력과 군사력을 향상시킨다.
하지만 테러 체제를 사용해 각종 정치범을 숙청하고, 군의 고위 장교들마저 숙청하고, 군에 정치 장교를 심어 군을 장악했다. 고위 장교 숙청은 다른 나라에게 약점처럼 보였고 정치 장교의 등장은 군의 경직을 불러와 결국 군의 약화를 가져왔다.
어둠이란 공포 정치에 대한 두려움일까? 테러의 성격이 사회 내 투쟁에 대한 야만적 대응에서 대중의 동원과 충성을 유지하는 도구로 바뀌면서 소련 사회는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이렇게 소련 사회가 변하게 되고 있다. 즉, 레닌 혁명의 성공과 이어진 내전, 소련의 형성과 스탈린의 집권 초기의 경제상황과 군대상황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밤이 도기 전 그 시간 : 1937~1941년
히틀러는 새로운 유럽 지도를 그리고 싶어 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소련은 그동안 유지해오던 고립정책을 벗어 던지고 국제 사회에 편향한다. 독일의 무리한 요구는 히틀러를 견제하기 위한 유렵 열강들의 반(反)히틀러 노선을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은 히틀러와 싸우기 위한 동맹을 원했고, 서구는 히틀러를 저지할 외교 저지선을 원하는 외교적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는 결국 소련과 서구의 결별을 가져오고 결국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된다.
이후 소련과 독일은 폴란드를 나눠 가지고 그 영토를 불린다. 독일은 곧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하게 되고 소련은 그런 제국주의의 경쟁 관계 속에서 이득을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독일은 프랑스를 손쉽게 물리쳐 그 생각은 무산되고 프랑스를 물리친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결심하게 된다. 소련은 이런 정보를 입수하지만 스탈린은 소극적인 대응만을 펼칠 뿐이었다.
과연 스탈린은 군사 분야에서는 무능했던 것일까? 기존에는 스탈린이 유화 정책*에 눈이 먼 나머지 전쟁 할 준비가 갖추어지지 못한 나라를 파멸의 벼랑 끝으로 이끌고 간 사람이라고 묘사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히틀러가 소련에 쳐들어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라는 판단이 스탈린과 수뇌부에게 내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모험을 감행했고 하지만 전쟁은 일어났다.
*유화 정책 : 힘의 관계에 의한 현상타파를 목적으로 하는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해, 현상유지의 정책 테두리 내에서 타협을 행하는 외교정책
동방을 유린하는 고트 족 :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전쟁 초기 독일은 별다른 준비가 없던 소련을 파죽지세로 공격한다.
스탈린은 독일의 공격이 시작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런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첫 4주 만에 소련군의 319개 단위 부대가 전투에 투입되어 거의 모두가 붕괴되거나 심한 손실을 입었다. 스탈린은 전쟁 최고 지휘권을 가졌고 6월 22일, 소련 서부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소련군은 필사의 저항을 했지만 독일군의 철저한 준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소련은 모스크바까지 몰리게 되었고, 그 곳에서 결사항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스탈린은 대중 앞에 나서서 혁명의 열정보다는 대중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애국심을 가진 소련의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독일에 맞서 싸우게 된다. 이렇게, 소련이 독일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히틀러의 군사적 무능력과 혹독한 겨울의 추위 때문이 아니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들이치기보다는 도시를 봉쇄 상태에 두려고 한다. 소련군은 레닌그라드를 요새화하고 방어하지만 보급품의 수성이 어렵게 되어 도시는 굶주림에 빠지게 된다. 3,300,000명이 넘는 인구가 먹을 식량은 얼마 남지 않게 되었고 굶주림과 추위에 죽어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배고픔은 새로운 도덕률을 만들어냈다. 죽느냐 사느냐라는. 고립된 그곳에서는 배급표를 두고 싸움이 벌어지고 심지어 식인까지 일어났다. 사람들의 곁에는 항상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예술은 꽃을 피워 그 명맥을 유지했다. 소련의 군대는 철저하게 저항했고, 날씨와 맞물려 독일군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만 갔다.
내부로부터의 사움 : 부역, 테러, 그리고 저항
독일의 통제 하에 들어간 사람들 중 일부는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공격했다. 또한 소련 내부에서도 배신자가 나왔는데 그들은 독일군을 위해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악명을 쌓았다. 그리고 스탈린의 러시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독일과 같이 싸워 다른 러시아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 정복지역의 민족 운동은 위협으로 여겨졌고 결국 이를 탄압하게 된다. 독일인의 손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죽음에 방치되었다. 소련의 착취에 해방되어 기뻐했던 지역주민은 더 심한 독일의 착취에 힘들어 했다.
한편 독일은 소련의 국경을 넘자마자 유대인을 죽이는 과정을 시작했다. 그 결과 1,152,000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독일군 진지선 뒤에서 파르티잔* 부대가 수행하는 게릴라전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이었다. 하지만 초기 파르티잔은 보급을 받지 못했기에 농민들에게 파르티잔들은 약탈자일 뿐이었다. 독일은 파르티잔과 엮어 많은 주민을 살해했고 이는 파르티잔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파르티잔(partisan) : 무장한 전사로서 정규부대의 정식부대원이 아닌 비정규군 요원을 가르킨다.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을 가리킨다.
소련이 물러나고 독일이 그 자리를 차지하자 사람들은 환영했다. 스탈린은 인기 있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독일 또한 좋은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소련보다 더 많이 착취해갔고 더 쉽게 사람을 죽였다. 또한 한 독일군인의 목숨에 100명의 파르티잔을 처형하자는 것을 보면 독일의 횡포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이후에 소련 또한 영토를 수복한 뒤 이와 유사한 잔학행위를 많이 저지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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