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상황과 배경
1. 아시아의 해양세계
근대부터 세계의 해양을 지배한 것은 활발한 식민지 개척에 앞장 선 유럽이었으나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해양을 지배한 것은 다름 아닌 많은 인구와 부를 자랑하던 중국과 인도가 속해있는 아시아였다. 이에 대한 것은 많은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마르코 폴로와 같은 서양의 상인들이 부와 미지의 세상을 찾아 아시아로 향했다는 것만 봐도 해양의 중심이 아시아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특히 인도양은 오랫동안 유라시아 해상 교역의 중심 무대였다.
인도와 중국,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 아프리카,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중동 지역의 낙타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유럽까지 모두 인도양을 통해 소통하였다. 근대 이전까지 아시아의 바다는 ‘만국보편의(ecumenical)'의 세계였다. 근대 이전 아시아에서는 바다를 ‘지배’한다는 의미로 인식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업 무대로 인식했고 아시아의 해양 상업의 주요 거점인 항구 도시에서는 대부분 이방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이러한 인식 덕분에 유럽 상인들은 비교적 쉽게 아시아와 교역을 할 수 있었다.
2. 해상무역의 발달
몽골 제국이 망하고 전쟁이 지속되면서 육상 교역로가 혼란스러워졌고 자연스럽게 원거리 교역은 기존 육상 교역로에서 해상 교역로로 옮겨졌다. 어떻게 보면 해상 교역로의 발달은 육상 교역이 어려워지면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5세기까지 아시아의 해양 교역은 서쪽의 홍해부터 동쪽의 일본까지 긴 활 모양으로 형성되었고 많은 상인들이 참여하였고 많은 상업 세력들이 성장하였다.
첫째, 소말리아로부터 소팔라에 이르는 아프리카 동해안 지역에는 아랍 인들과 페르시아 인들에 의해 40여 개의 상업 도시국가들이 생겨났다.
둘째, 아라비아 해에서는 인도의 구자라트 상인들이 대단한 기세로 성장했고 캄베이를 근거지로 하여 서쪽으로는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을 누르고 아덴까지, 동쪽으로는 말라카까지 상업로를 확보했다.
셋째, 인도 내부 상인들로는 클링(Kling)과 체티(Chetti) 두 종족이 흥기해서 남인도의 교역을 주관했다.
넷째, 동남아시아에서는 스리비자야와 마자파히트가 차례로 쇠퇴한 후 소규모의 무슬림 상업 국가들이 성장하였다.
다섯째, 중국은 송대로부터 원대를 거쳐 명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해상 교역을 수행했다. 전체적으로는 조공 무역 체제가 지속되었지만 일반인들의 교역 활동 역시 크게 성장했다.
명나라 3대 황제 - 영락제
1. 영락제의 즉위 과정
성조 영락제는 태조 홍무제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주체이다. 그런데 영락제를 둘러싸고 오래전부터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영락제가 홍무제와 마황후 사이의 소생이 아니라 공비의 소생이며 태어나자마자 양자로 들어가 마황후의 처소에서 양육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카인 건문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행위를 다소라도 정당화시키기 위해 황후의 넷째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주체는 후에 아버지인 주원장이 자신을 북경에 연왕으로 임명한다. 이것은 당시 홍무제가 자신의 아들들에게 북변과 내지의 요충지에 병마의 권한과 분봉의 권한을 주어 많은 수의 번왕이 나왔다. 연왕 주체는 그 번왕들 중에 한명이다. 주체가 연왕이 된 후 그의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 몽골족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몽골족은 함부로 명나라의 북방을 침략하지 못했고 이를 두고 태조는 “짐에게는 이제 북쪽(몽골)을 고려해야 할 근심이 없어졌노라.”라고 말했다.
후에 홍무제가 죽고 그의 손자인 주윤문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건문제이다. 건문제는 홍무제의 첫째 아들인 의문황태자 주표의 아들로서 주표가 죽자 황위계승자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건문제가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당시의 상황은 건문제에게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건문제는 자신의 숙부인 번왕의 세력들이 강성했기 때문이다. 각 번왕들은 그 지역의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앙의 통제가 약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교 교육을 받고 자란 건문제는 현실보다 이념과 명분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건문제는 황제권의 절대권을 확립하기 위해 측근인 황자징과 제태, 방효유의 건의로 제왕삭번이라고 하는 계책을 마련한다. 제왕삭번이라는 것은 번왕의 세력을 삭감한다는 것이다. 이 정책을 실시한 후 몇몇 번왕들은 제거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번왕들 중 가장 강성한 연왕 주체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건문제는 주체를 죽이기 위해 자객들을 북경으로 보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마삼보(정화)가 이끄는 환관들의 도움으로 주체는 자객들을 치기 위해 비밀리에 군사들을 모아 자객들을 죽인다. 그리하여 주체는 자객들을 죽인 뒤 북평에서 거병을 하게 된다.
새로운 황제에 대해 반역행동에 나선 연왕은 정삭(정월 초하루, 즉 역을 일컫는다.)을 받드는 것을 야비한 행동이라고 상각하여 따르지 않고, 건문의 연호를 배척하여 그 해를 홍무 32년으로 고쳤다. 그리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남경에 있는 정부와 결전에 나서고자 하였다. 거병에 앞서 연왕은 수하의 전 장병에게 다음과 같이 포고하였다.
나는 태조 고황제의 적자다. 지금 어린 천자가 간신을 신임하여 우리 골육의 형제를 음모로 해하려고 하고 있다. 태조의 유훈에 따르면, “조정에 올바른 신하가 없고 조정 내에 간신역도가 있으면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 군주의 측근에 있는 악을 없애라”고 하셨다. 이 유훈에 따라 너희 병사를 이끌고 간신을 주살코자 하는데, 만일 간신을 잡으면 옛날 주공이 성왕을 보필한 고사를 본받아 새로운 황제를 보필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너희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분투하기 바란다.
건문제는 주체가 거병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북경으로 대군을 출병시킨다. 이렇게 해서 연왕 주체와 그의 조카인 건문제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정난의 변’이라고 한다. 내전 초기에는 주체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만 건문제의 대군에 밀려 내전이 교착상태로 빠지게 된다. 연왕 주체는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면 자신에게 불리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때 그의 부하인 마삼보는 자신을 천거해준 도연에게 보답하기 위해 남경 궁 안의 태감과 내통하여 성 안 밖에서 서로 호응하자는 계략을 꾸몄다. 마삼보의 책략을 통해 궁 안의 내부 사정과 군대 배치의 허실을 파악한 주체는 양주와 의정으로 병마를 보내 기습을 행하고 남경으로 쳐들어갔다. 이 때 장강 남쪽 해안을 수비하던 진강 수비대장의 투항으로 주체는 한 명의 병사도 잃지 않고 순조롭게 장강을 건너 곧장 남경을 공격해 함락시킨다.
남경이 함락되자 궁중에 화재가 일어났고 건문제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연왕 주체는 건문제를 대신해 황제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성조 영락제이다. 성조 영락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정난의 변에서 큰 활약을 한 환관들에게 이름과 직위를 하사한다. 성조 영락제는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관료나 일족에게 의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난의 변에서 큰 활약을 한 환관들을 이용해 정치를 하였고, 이것은 영락제 사후에 환관이 발호하게 된다. 환관 정치를 발호하게 한 사람이 바로 영락제였다.
세계사이야기 |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와 정화의 대원정 2부
영락제의 황권 정책성조 영락제의 정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황제권의 강화이고, 둘째는 북경으로의 천도, 셋째는 적극적인 대외활동이다.1. 황제권 강화영락제는 황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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