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세계사이야기 | 영국 동인도회사의 변모와 해산

곰고로곰 2022. 1. 27.

 

 

 

서론

동인도회사는 잘 알다시피 17세기 제국시대 때 영국, 네덜란드 등이 세운 동방과의 무역을 위한 회사이다. 동인도회사는 유럽 국가들의 막대한 산업 자본이었으며, 상업혁명과 산업혁명 등 유럽의 상업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757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플라시전투를 계기로 하여 인도무역을 거의 독점함과 동시에 인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후 사적 독점상업회사인 동인도회사에 대해 영국 국내에서 비판이 일어나고, 또 경영난에 빠진 회사가 영국정부의 원조를 요청하게 되면서 1773년 노스규제법1)에 따라 본국 정부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되었다. 1833년에는 무역독점권이 폐지되고, 1858년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난 뒤에는 인도가 영국 국왕의 직접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어, 동인도회사는 기능이 정지되었다.

 

앞서 말한 동인도회사의 플라시전투 이후 목적 변모와 회사의 몰락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1) 레귤레이팅법이라고도 한다. 인도에 대한 식민지통치의 대강(大綱)을 정하기 위하여 총리 F.노스 내각 때 제정되었다. 그 동안 동인도회사가 영국 국왕이 수여하는 특허장에 의하여 특권을 인정받던 것을, 본국의회의 소관 사항으로 종속하게 하였다. 총독 ·참사회(參事會) 및 최고 사법기관인 최고법원을 설치하고, 그 권한을 규정한 법으로 적극적인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서 제정되었다.

 

 

1. 플라시 전투와 북사르 전투 

1757년에 치러진 플라시 전투는 영국 동인도회사에서만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인도에 대한 영국의 영토지배가 사실상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국령 식민지 제 1보라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실 이 시기에 영국은 영토 확보에 관심을 보이지않았다. 경제적으로 벵갈과의 무역을위해 상업적인 협약만을 생각하였다. 물론 영국이 인도의 주요도시에 요새와 상관을 건설하였지만 그것은 단순히 무역 거점을 확보하기 위함이였지, 현지를 정복하려는 의도는 아니였다. 당시 사람들은 현지 정복전쟁을 하게되면 동인도회사에 정부의 개입이 심해져 회사의 독립성을 잃을수도 있기 때문에 상인이외 정부가 개입하는것을 막으려고 하고있었다.

 

물론 그전에 전쟁을 치루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전에 동인도회사는 카르나티크 전쟁 등에서 프랑스 세력과 싸워 왔는데, 과거의 모두 상업적 목적을 위해 치안혼란에 대응한 자위적 성격의 전쟁이였다. 이 벵골전쟁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 전에 치뤘던 전쟁들과 같다. 다른점이있다면 무역권을 차지하기 위한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아니라 당시 벵갈의 태수와 한 장군간의, 즉 토착민들간의 전쟁에 프랑스와 영국이 원군을 해준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과는 영국이 승리하여서 벵골 지방에 대한 자유통상권 등을 얻게되었다.

 

그 후 1760년에 밀 카슘이 계속 세력이 팽창하고있는 동인도회사에게서 벵골을 되찾으려고 기도한 것을 계기로, 1764년 영국 동인도회사에 병력을 파견하게된다. 그리고 발생한 사건이 북사르 전투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영국은 이 지방에 대한 디와니를 얻게 된다.

 

디와니란 징세와 재정담당 장관(디완)의 권한을 말하는 것으로, 1765년 무굴제국의 황제가 벵골, 비할, 오리사 등 세 지방의 징세권을 영국 동인도회사에 내준 것이다. 징세권을 내준것이지 벵골, 비할, 오리사 이 세 지방이 영국의 소유로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재정권을 잃었고, 재정에 대한 모든 것이 영국인의 관리 아래 놓이게 되었다.

 

 

2. 동인도회사를 통한 식민지지배

벵골지방 일대에 넓은 식민지를 차지하여 이를 병사와 현지에서 채용한 인도인 용병으로 다스려 나가게 된 동인도회사는 인도 무역이란 상업활동을 목적으로 한 초기의 성격에 모순되는 식민지 통치를 겸한 정치기관으로 변해 갔다. 이는 자연 본국정부와 의회의 부목을 끌었으며, 회사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규정할 필요성이 인정되어 1773년, 동인도회사에 관한 규제법이 제정되었다. 이 결과, 회사의 주주가 갖는 무제한한 권한에 한계가 그어짐과 함께 본국의 지시와 조언을 받아서 인도의 행정상 최고책임을 맡은 총독부가 설치되고 아울러 최고법원이 현지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 법률에 따라서 이미 도인하고 있던 워렌 헤이스팅즈가 초대 벵골 총독으로 취임했으며, 캘커타는 이로부터 영국령 인도의 수도가 되었다. 또한 본국의 감독기관도 1784년의 인도법에 의하여 정부 직속의 감독국을 두고 그를 통해 종래의 동인도회사 이사회에 정치적 지도를 베풀게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은 인도 식민통치체제를 갖추고 보다 광대한 식민지영토의 획득과 이윤의 확대를 꾀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영국 세력의 진로를 가로막고 완강하게 저항한 것이 남인도의 마이소르2) 왕국 주민들이었다. 18세기 후반을 통하여 영국을 가장 괴롭힌 것이 이 마이소르의 격렬한 반영운동으로 이 당시는 하이다르 알리. 티프 술탄 부자가 왕국의 주권자 자리에 있었다.

2) 인도 남부 카르나타카(옛 이름은 마이소르) 주 중남부 마이소르 행정구의 행정중심도시.

 

마이소르는 비자야나가르 왕국의 붕괴 후, 무굴제국이 쇠미한 틈의 타서 힌두교도의 수장이 재건한 왕국인데, 마라타군과 이슬람군이 파니파트3)에서 대결하고 있던 무렵, 왕국의 실권이 이슬람교도의 장군 하이다르 알리의 손으로 옮겨졌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국민을 잘 통치하여 국력을 부강하게 함과 동시에 남인도에 대한 세력확장을 꾀하는 영국에 끝까지 저항하여 1769년에는 마드래스 바로 앞까지 육박했다. 그리하여 그는 1780년 8만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군과 대전, 이를 압도해서 대타격을 주었지만 2년 후에 병사하여 그 반영구국 사업은 아들 티프 술탄이 떠맡게 되었다. 

3) 인도 북서부 하리아나 주 카르날 행정구에 있는 도시.

 

후계자가 된 티프 술탄은 그대로 전쟁을 계속하여 이듬해는 봄베이에서 파견된 영국군을 장교까지도 아울러 사로잡는 등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결과로 맺어진 만갈로르조약(1784년)에서 포로 및 점령지역의 교환이 협정되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측에서도 수수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당시의 총독 코온월리스는 마이소르를 쳐부수는 것이 가장 위급한 과제라고 밝히고 그 전략의 하나로 왕국 북부에 있는 니잠정권 및 마라타족을 영국의 반마이소르 동맹군에 끌어들이도록 지령을 내렸다. 영국은 이들과 동맹을 맺어 제3차(1790~92).제4차(1799년 3~5월)의 마이소르전쟁을 일으켜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던 마이소르왕국을 완전히 몰락시킬 수가 있었다.

 

제 3차, 제 4차 마이소르전쟁의 결과, 왕국의 영토는 4분의 1 이하로 줄어들고 남은 영토에는 힌두교도의 왕이 영국측에 옹립되어 복권하였다. 그러나 이 정권은 정치고문으로 파견된 영국인 주재관4)의 통제를 받는 친영적 괴뢰정권5)에 불과했다. 옛 마이소르 영토의 약 4분의 3이 동인도회사의 직할식민지로서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801년, 영국은 마드래스 후방의 광대한 카르나티크 지대를 피흘리지않고 병합 되, 이로써 남인도에는 동쪽의 코로만델해안에서 서쪽의 말라바르해안에 이르기까지 영국령이 육지를 따라 잇닿게 되고 그 안에 친영적인 마이소르왕국이 사방을 둘러싸인 채 남는 꼴이 되고 말았다. 

4) 공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어떤 곳에 머물러 있는 관리.

5) 자주성·주체성이 없이 다른 나라의 지령을 받아, 그 나라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정권.

 

다시 눈을 동방으로 옮기면, 영국은 벵골지방에서 반도 최남쪽의 코모린반도에 이르기까지 그 식민지만을 통하여 동해안을 남북으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위험한 존재였던 남인도를 평정함으로써 벵골지방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다 확고한 세력을 쌓아올린 영국은 계속해서 중인도, 북인도로 점차 뻗쳐 나가게 되었다. 그들의 식민지와 친영 세력의 확대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값싼 비용으로 부릴 수 있는 인도인 용병(세포이)을 현지에서 다수 채용하고 이에다 소수의 영국 병사를 적당히 배치하여 대규모의 상비군을 조직한다. 이들 주력으로 삼아 인도 각지에 독립.할거하는 정권을 각개격파적으로 공격하여 그곳을 식민지로 편입하든가 친영정권으로 바꾸든가 했다. 이때 상대와 적대관계에 있는 이웃의 대항세력을 일정한 양보를 조건으로 해서 힘써 동맹에 이끌어 넣도록 하여 인도인들이 저희끼리 서로 싸우게 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선 실권의 원리란 것을 강요하여 아들이 없는 번왕의 토후국6)을 강제적으로 식민지화한다는 식이다. 보호조약이란 조약을 맺은 토후국에 대하여, 영국측이 파견한 주재관을 통해서 그 일체의 대외정책을 규제하고 영국인 이외의 유럽인들을 관리나 기술자로 채용하는 것을 금지하며, 동인도회사 군대의 주둔을 받아들여 그 주둔비 전부를 토후국측이 제출하는 현금 또는 거기 상당하는 영토의 할양으로 처리한다는 등의 의무를 지운 것이다. 영국측으로서는 참으로 유리한 내용을 가진 조약으로, 니잠정권이나 재건된 마이소르 왕국은 이 조약하에 두어진 전형적인 영국 보호국이었다. 

6) 부족의 수장(首長)이나 실력자에게 지배되는 국가.

 

 

위세를 몰아 영국은 중앙인도에서 데칸고원 서반부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무굴제국 해체 후의 최대 세력으로 잔존하고 있던 마라타족 세력에 대하여 18세기 말 이래 3차의 전쟁을 벌여 그 연합군을 철저히 부수고 식민지로 편이하거나 또는 영국에 종속하는 보호국으로 만드는 방책을 취하였다(1819년). 바로 이 때에, 인도에 있어서의 영국의 지상권이 확립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영국은 다시금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회사군의 출병이 실패로 끝나자 그때 군대가 통과하는 데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1843년에 신드를 병합하고, 이보다 6년 후에는 신드의 북쪽 판잡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시크교도의 세력을 격파하여 이를 또한 병합했다. 한편 벵골이 인접한 동북방면에서는 아샘지방 및 버어마의 해안지대(1826년)와 랭구운을 중심으로 하는 하버마 일대를 두 차례의 원정으로써 범령해 버리고 영령 인도 식민지에 직접 포함시켰다.

 

이리하여 19세기 중엽에는 동인도회사와 종속동맹을 맺은 번왕국을 제외하고는 전인도가 연령식민지에 속하게 되었다. 아득히 멀리 떨어진 영국본토에서 진출해온 식민자들에게는 자기네 본국보다 훨씬 광대한 식민지의 지배를 유지하고 그 경영으로 얻는 이윤을 지속적으로 늘이기 위하여 치안을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요망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확장된 식민지령은 벵골.마드래스.봄베이 3개의 관구 밑에 두고 반란 진압을 위해 영.인 혼성의 회사군이 각 관구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무굴시대부터의 행정구역을 답습하여 현.군제도를 마련하고 각 현.군제도를 마련하고 각 현.군에 판무관과 부판무관을 배치하여 치안.징세의 임무를 맡기었다. 회사군과 아울러 치안 유지기관으로서의 경찰제도가 실시된 것도 물론인데 병사의 경우와 같이 경관에도 다수의 인도인이 채용되어 식민지 통치기구의 멤버 속에 끼인 그들에게 자기들의 동포인 인도민중에 대한 억압이 강제되었다.

 

치안 유지체제의 강화와 함께 장기적인 식민지기구를 확대 재생산해가기 위해서는 영국 지배를 보다 적은 저항으로 받아들이는 인도사회풍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과 현실적 요청에 입각하여 19세기에 들어서자 사회 개조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시된 것이 영어교육의 실시였다. 또한 영국의 인도 지배를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재원으로써 토지세의 징수이다. 이렇게 벌어들인 막대한 재원을 영국은 식민지 확장과 그 유지에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부로 인도의 생산품을 사들여 이를 본국에 가져가든가 혹은 유럽 제국에 재수출하여 몇 배나 비싸게 팔아서 폭리를 보았다. 즉, 영국은 아무 물품도 수출하지않고 인도에서 다량의 상풀을 가져다 팔기만 해도 이득을 본다고 하는 기묘한 무역 현상이 계속됐던 것이다. 이 무역에 의한 이윤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거기 따른 자본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자본으로 투하되었다.

 

그런데 인도에서 모은 재화를 중요한 요인으로 하여 성립한 산업혁명이 인도 재래의 공업을 파괴하고 그곳에 기계제품을 범람시킴으로써 식민지적 수탈을 보다 조직적으로 강화하는 결정적인 힘으로서 작용하기 시작했다. 맨체스터의 기계제 면제품을 대량으로 인도에 수출함에 있어서 동인도회사의 무역독점권은 오히려 장해가 되었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자유무역주의가 경제사상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대개 이 무렵부터 영국 면제품의 인도 수출은 급격한 증가를 보여 수출액은 이후 20년 간에 실로 50배 이상으로 상승하였다. 그리고 인도에서의 면직물의 수출은 이와 반비례로 격감하여, 수 세기간 세계를 향해 면제품을 수출해 온 인도는 1850년에 되자 영국이 외국에 수출하는 전면제품, 모직물, 도기, 유리, 종이에 있어서도 같은 과정을 밟았다. 

 

1833년의 특허장법으로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이 전부 폐지되자, 회사는 본국정부의 의도에 따라서 인도의 식민지적 통치를 시행하는 정치기구로서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냈다. 상업활동보다도 오히려 이점이 회사의 주요한 역할이 되었다. 자유무역 체제하에서 영국의 공업제품은 무서운 세력으로 인도에 유입되었으며 1835년에 국내통과세가 철폐하게 되자 한층 용이하게 내륙 깊숙이 침투해 갔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정치적 지배권이 전인도로 확장되었을 무렵에는, 인도는 경제적으로도 영국의 기계제품을 구립하고 대신 공업원료와 식량을 수출하는 식민지적 사회로 완전히 전락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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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착 세력의 항쟁

이 시기 토착민들의 크고 작은 항쟁들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되는 항쟁은 바로 세포이의 반란이다. 세포이란 벵골전투 전부터 동인도회사에서 고용한 인도 용병들이다. 당시 인도에 파병되있던 영국군의 90%가 이들 세포이였다.

 

세포이들은 인도 사회에서도 높은 카스트 출신들이였다. 반란의 계기는 배경적으론 동인도회사의 고압적인 정책이 그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직접적인 계기는 인도 사회 특유의 카스트에 얽힌 불만이었다. 그 하나는 세포이의 해외파병 문제였다. 인더스 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원정이나 해로를 따라 미얀마 쪽으로 나간다는 것은, 세포이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나가는 것으로, 음식이나 물 등 모두가 악조건인 그런 세계에는 갈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식미지 침략정책상 미얀마와 아프가니스탄으로의 진출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세포이들이 불만을 갖자 영국은 1856년 7월에 ‘해외에 출정한다고 약속하지 않는자’는 세포이로 고용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해서 세포이의 불만은 소위 생사에 관한 해외파병 문제와 함께 점점 높아져만 갔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엔필드 총에 약포를 사용하는 문제였다. 1857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1853년식 엔필드 소총을 새로이 세포이들에게 지급했다. 그런데 이 소총에 사용하는 기름이 소기름과 돼지 기름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도와 돼지를 피해야 하는 이슬람 교도에게 이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영국인들은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다고해 수습하려고햇으나 이미 영국인에 대한 믿음이 떨어질때도 떨어질때라 믿지않았고, 끝내 반란이 일어났다.

 

세포이의 대반란은 갠지스강 상류에있는 메루트 라는 도시에서 시작되게된다. 세포이들을 따라 농민들도 봉기를 일으키게되었다. 그 지역에서 영국군을 물리친 세포이와 농민으로 구성된 반란군들은 명목뿐이긴 하지만 살아있는 무굴제국의 황제 바 하두르 샤 2세가 있는 델리로 향했다. 델리에서 승리함에따라 점점 반란이 전국으로 펴지게 되엇고 갠트강 상·중류를 비롯해 중부인도까지의 지역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되었다.

 

 

4. 영국 동인도회사의 해산  

영국의 지배가 끝낫듯 보였으나, 불행히도 반란군은 하나가 될수없었다. 흰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대립이나, 지방끼리의 반목 등 때문에 반란군 내에서도 분란이 일어났는데, 황제와 왕자는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그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뭉쳐야되는 사령관이 존재하지 못했다. 전국적 규모로 확대된 이 반란은 결국 1857년 재정비를 하고온 영국군에 의해 1859년 진압되었다. 이 반란의 책임이 동인도회사의 운영방식에 있다고 하여, 1858년에 인도통치법을 가결하여, 인도 각지 동인도회사의 통치권을 박탈하였다. 이것으로 1600년 발족한 동인도회사는 명맥이 끝어지게 되 엇다. 인도는 1858년 11월 1일부터 영국 정부의 직접 지배를 받게되었다.

 

 

결론

인도에 진출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초기에는 상업적인 목적만을 가지고잇엇으나, 플라시전투와 북사르전투의 승리 이후 인도의 징세권을 간섭하기 시작하더니, 후엔 인도의 정치.경제 등 모든 것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동인도회사는 무력을 앞세운 상업 세력으로 큰 맹락에서는 서구 제국주의의 일환으로도 볼수잇으나, 국가 기관이 아닌 민간 회사가 이런일을 했다는것은 이상하다. 

 

보통일경우에는 식민지 사업은 국가가 주도하였을텐데, 동인도회사는 회사가 사병을 고용하여 식민지사업을 했으며 그 나라의 징세권,정치를 간섭하였다. 보통은 식민지의 땅은 국가에게 주는것이 맞으나, 어렵게 전쟁을 치루고 이 지역의 징세권을 확보한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징세권을 국가에게 주지 않았다.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않았더라도 앞의 내용들을 보면 동인도회사가 해산되는것은 당연한 일인것같다.

 

 

참고 문헌

1. 아사다 미노루,『동인도회사』,파피에,2004

 

2. 이옥순,『인도현대사』,창비,2007

 

3. 신윤길,『영국 동인도회사 연구』,서원,1996

 

4. 하마우즈 데쓰오,『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영국 동인도회사』,심산문화,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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