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와 아편전쟁
아편전쟁 전 청조는 외국과의 무역을 중국 남쪽 광동성의 광주 한 곳으로 제한하고, 공행이라는 상인에게 독점시켜 관세의 납부, 외국배와의 교섭 및 관리 등의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청은 전통적으로 ‘지대물박’이라는 경제적 자부심과 함께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오랑캐로 인식하는 ‘중화사상’으로 인해 외국과의 자유무역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체제를 ‘광동체제’라고 하는데 무역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의 태도는 외국상인들로 하여금 큰 불만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가장 큰 불만을 표시하였던 것은 영국의 상인들이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중국산 차, 생사를 좋아하였고 특히 중국산 차를 마시는 습관이 영국내에서 보편화됨에 따라 중국차의 수출은 날로 증가하였다.
반면 영국의 주요 수출품목인 면직물과 모직물은 중국에서 거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무역적자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무역적자의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하여 영국은 광주 이외의 다른 항구의 개항, 광동의 공행에 의한 무역독점 폐지 등 중국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는 등 노력하였지만 중국의 입장은 완고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중국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새로운 상품을 선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인도산 아편이었다.
영국은 18세기 말 인도 벵갈지역의 아편전매권을 획득하고 자국의 무역상인들에게 아편을 제조하여 중국내에 판매하도록 하였다. 본래 아편은 중국에서 의약품의 일종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편에 대한 중국인들의 거부감이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아편은 중국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관리, 상인, 군인, 지주와 여성들에게 까지도 아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청조는 몇 차례나 금지령을 내렸지만 관리들은 아편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아편 밀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 금지령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아편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늘어갈 수록 중국의 경제상황이 악화되었다. 영국은 아편판매에 은으로 결재하도록 하였는데 아편은 밀수품이었기 때문에 희소한 것이었고, 위험부담 또한 컸으므로 아편의 가격이 점차 상승하였고, 중국 내 은값도 함께 상승하였다. 은값의 상승은 세금이 걷히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중국의 재정에 심각한 위기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제 청정부는 국민들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 아편을 금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금이 걷히지 않아 재정이 바닥나고 있는 경제적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반드시 아편을 금지시켜야만 했다.
당시 청조 내부에서는 아편의 유행을 현실로 인정하되 중국 내의 은이 영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 국내에서 아편 제조를 허가하여 수입을 억제시킴으로서 점차적으로 아편을 금지하자는 이금파와 엄금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황제 도광제는 엄금파의 입장에서 아편을 엄격하게 금지할 것을 지지하면서 임칙서를 광동으로 파견하였다.
임칙서는 단호하게 외국상인에게 아편의 제출과 차후로 아편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의 제출을 명하고, 몰수한 아편을 폐기처분하였다. 이러한 임칙서의 행동은 중국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지만 영국측은 이를 영국재산에 대한 손실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중국과의 전쟁을 결정하였다. 임칙서는 마카오에서 발행되고 있던 외국신문과 서적을 번역하여 서양의 사정을 파악하는데 힘썼고, 이를 통해 서양 군사기술의 우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해안의 어민을 모집, 훈련시켜 해상의 게릴라전을 준비하였고 광주 주변에서 민간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임칙서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 청조 관리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1840년 6월 중국에 도착한 영국군은 광저우를 그냥 지나 북상하여 8월 북경 근처의 톈진(천진, 다구포구)에 나타났다. 영국 함대의 위용에 경악한 청조는 모든 전쟁의 책임을 임칙서에게 돌리고 그를 파면하였다. 결국 1842년 남경에서 중국은 근대 최초로 서양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에 따라 중국은 홍콩의 할양, 상해를 비롯한 5개 항국의 개항, 공행제도의 폐지, 배상금을 승인하였다. 이듬해에는 추가조약을 통해 관세자주권과 영사재판권, 조계 설정 등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더 이상 문화의 중심이 아닌 하나의 국가로서 세계시장에 편입되었다.
전쟁 후에도 중국의 사정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중국 근대의 유명한 사상가 양계초는 ‘중국이 진정으로 삼천년의 잠에서 깨어난 것이 청일전쟁 이후’라고 말했을 정도로 아편전쟁의 충격이 중국인들에게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임칙서와 같은 선각자들은 서양이 중국보다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우월함을 인정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師夷長技以制夷) 인식을 같이 하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아편전쟁의 실패로 중국의 문은 열렸지만 중국인들의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중화의식은 여전하였다.
아편전쟁의 원인
18세기 후반 이후, 산업혁명이 진행하고 있던 영국은 광저우항에만 국한되었던 중국무역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시장의 확대를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즉, 개항장의 증가와 공행이라 불리는 청나라 관허상인에 의한 외국무역 독점체제의 타파를 위해 1793년 사절 G. 매카트니를 파견하여 교섭한 것을 비롯하여 W.P. 애머스트(1816)·C.J. 네이피어(1834) 등을 보내어 그 실현을 도모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또한 그 사이에 모직물·면방직품·금속 등 공업제품의 수출확대를 꾀하였는데 매상은 신장되지 않았다.
한편 영국의 신흥공업도시에서 차(홍차)를 마시는 습관이 확산되어 중국차의 수입이 격증하였고, 재래의 생사(生絲) 및 도자기 수입 등으로 다량의 은을 중국에 수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34년까지 중국무역 독점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18세기 말 영국령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이를 영국 상인에게 팔아 넘겨 중국에 밀수출하였다.
1776년 이전에는 매년 200상자(1상자의 무게 약 60㎏) 정도의 인도산 아편이 의약품으로서 중국에 수출되고 있었으나 1800년에는 2000상자, 30년이 되자 약 2만 상자, 동인도회사의 중국무역 독점권이 폐지된 이후인 1837년에는 미국상인에 의한 밀수를 포함하여 3만 9000상자나 되는 아편이 중국으로 수출되어 200만 명이 넘는 아편흡음자가 생겨났다.
청나라는 1796년 이후 여러 번 아편수입금지령을 내렸으나 부패한 관료기구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였다. 아편무역은 영국령 인도정부에 막대한 세수입원으로 영국의 인도지배에 불가결한 것이었다. 또 인도에서의 아편수입이 영국의 인도에 대한 면제품수출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였다.
더욱이 동인도회사, 뒤에 민간상인은 아편으로 차의 매입자금을 조달하여 중국차의 수입이 증가하였고, 그것이 영국정부에 막대한 차세수입을 가져왔다. 이와 같이 중국에 대한 아편밀수는 그 무렵 영국자본주의의 사활이 걸린 중요성을 지니기에 이르렀다. 또한 군대 내에서는 아편중독이 확산되어 지배층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이에 따라 1838년 도광제는 위에 말했다시피 이 같은 위기적 상황을 지적하고 아편의 엄금을 주장한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서 광저우에 파견하여 아편밀수를 엄금하는 임무를 맡겼다. 1839년 봄,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무역정지, 무력에 의한 상관(商館) 포위 등 강경수단을 동원하여 영국상인으로부터 2만여 상자의 아편을 몰수, 소각하였다.
그 무렵 영국에서도 퀘이커교도와 영국국교회, 또 의회 내의 자유주의파 등은 도덕적 이유 내지 아편무역이 면제품의 시장을 축소시킨다는 경제적 이유에서 아편무역 및 아편을 계기로 한 중국과의 전쟁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아편상인 자딘매시슨상회를 비롯하여 인도와 중국의 무역에 관련된 무역자본은 몰수된 아편의 배상과 이 문제를 계기로 <대중국 무역을 안정된 기반 위에 두는 데 필요한 여러 조건의 획득>을 도모하도록 강력하게 V. 팔머스턴외무장관에게 촉구하였다. 40년 4월 영국의회는 9표차로 <영국의 영원한 치욕을 씻기 위해> 중국에 대한 원정군 파견을 승인하였다.
아편전쟁의 경과
1840년 여름 48척의 함선, 4000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영국함대가 북상하여 다구·톈진을 위협하자 청나라는 일단 휴전을 명하고, 철저한 항전파인 임칙서를 파면하고 타협파인 기선으로 하여금 광저우에서 강화교섭을 벌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화평초안을 영국·청나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아 전쟁이 재개되었다.
콜레라의 만연으로 고통을 당한 영국군은 41년 인도에서 약 1만여 병력을 파견하여 양쯔강으로 침입, 난징으로 육박하였다.
청군은 일부를 제외하고 부패·무능을 드러내었고, 더구나 임칙서가 광둥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유럽 여러 나라로부터 근대무기를 구입하는 일도, 지방 유력자의 지도하에 농민·어민 등을 무장시켜서 저항하는 일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난징의 실함으로 청나라의 권위가 더욱 흔들릴 것을 두려워하여 영국의 모든 요구를 수락하고 난징조약을 맺었다.
이 사이에 광저우 교외에서 영국군의 폭행에 분격한 수만의 마을사람이 자발적으로 반영무장저항을 일으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이는 근대 중국의 반침략투쟁의 선구로 평가되고 있다.
아편전쟁의 결과
난징조약과 이를 보완하는 5항(광저우·샤먼·푸저우·닝보·상하이), 통상장정(1843) 및 후먼자이 추가조약(1843)에 따라서 중국은 영토의 일부(홍콩과 개항장 한 구역에 마련된 조계)와 관세자주권 및 사법상의 주권 일부를 잃었고(영사재판권의 승인), 일방적인 최혜국 대우를 부여하였으며 몰수아편의 대가와 군사비를 내용으로 하는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개항장에서 그리스도교 포교를 인정하게 되었다.
44년 프랑스·미국도 영국을 뒤따라 제각기 황푸조약·왕샤조약과 같은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청나라 지배층은 이같은 불평등조약이 시대를 구분짓는 의의를 지녔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종래의 <외이>에 대한 일시적인 회유책 등으로만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불평등조약은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세계시장 속에 중국이 종속적인 지역으로서 편입된다는 것을 뜻하였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수공업이 여전히 랭커셔면직물의 시장확대에 완강하게 저항하여 영국의 공업제품 수출은 기대한 만큼 신장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합법화된 아편무역은 더욱 발전하여 재정·경제에 악영향을 끼쳤고, 배상금(약 1900만냥)과 전비를 마련하기 위한 무거운 세금의 압박과 패전으로 인한 청나라의 권위 실추 등이 요인이 되어 얼마 후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났다.
참고 문헌
1. 중국근대사 : 신승하, 대명출판사, 1990
2. 아편전쟁과 제국주의 침략 : 태윤기, 진명문화사, 1986
3. 재미있는 중국 근대 인물 이야기 : 서현봉, 박우사, 1995.
4. 인물로 보는 중국역사 : 정성환, 신원문화사, 1995.
5. 이야기 중국사 : 김희영, 청아출판사, 1986.
6. 중국 근대사 : 중국사연구회, 청년사, 1990
7. 인물 중국사 : 강용규, 학민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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