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락제의 황권 정책
성조 영락제의 정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황제권의 강화이고, 둘째는 북경으로의 천도, 셋째는 적극적인 대외활동이다.
1. 황제권 강화
영락제는 황제권의 강화를 위해 정부의 조직과 군대 체제를 정비 했다. 그리고 영락제는 문관체제를 개편하는 동시에 수백만 명에 이르는 군대의 병권을 장악해 황제권 강화를 이루게 된다. 또한 환관을 주체로 하는 동창이라는 기구를 설치해 환관에게 높은 지위에 있는 관료를 적발하고 투옥할 권한을 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락제는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2. 북경천도
조카의 자리를 빼앗고 황제에 오른 영락제에 대한 강남지방의 여론은 좋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영락제는 남경에서 계속 거주한다는 것이 불편하였다. 게다가 북경은 영락제가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창업기반이었고, 대몽골 작전의 전략상 요지였기 때문에 그 곳을 방치해 둘 수도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락제는 결국 북경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천도를 할 당시 많은 가구들과 건설일꾼들을 북경으로 강제로 이주를 시켰다. 건설일꾼들을 보낸 이유는 북경에 새로운 궁전을 만들기 위해서 이다. 이 때 만들어진 궁전이 바로 자금성이다. 하지만 북경의 식량은 많은 이주민들과 일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영락제는 이주민과 일꾼들에게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대운하의 사용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대규모 개수가 행해졌다. 그리하여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공급받게 되었다.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공급받게 되자 자금성이 완공되었다. 이렇게 해서 북경으로의 천도는 실행되었다. 북경으로서의 천도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것은 과거 태조 홍무제가 남경을 수도로 정함으로써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 하나가 되는 새로운 국가형태를 만들어 냈지만, 영락제는 수도를 다시 북경으로 옮김으로써 정치의 중심을 북경, 경제의 중심을 남경으로 정함으로서, 정치와 경제가 다시 분리 된 것을 나타낸다.
3. 적극적인 대외 활동.
영락제는 황제권 강화와 북경천도를 기반으로 하여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벌이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대외활동으로 막북친정과, 정화의 원정을 들 수 있다. 막북친정은 영락제가 몽골의 고비사막 북쪽으로 5번 출정을 한 것을 말한다. 당시 몽골은 태조 홍무제에 의해 쫓겨났다. 하지만 몽골은 호시탐탐 중국을 노렸다. 그래서 영락제는 스스로 막북으로 출정을 감행한다. 하지만 막북친정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초기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원정을 5차례 했기 때문에 막대한 전쟁비용을 소모하고 수많은 군사를 잃었으며, 심지어 막북에서 퇴각을 하는 도중 영락제가 사망하는 등 피해를 많이 보았다. 영락제의 막북친정은 몽골에 대한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보여준다는 의의가 있으나 막대한 전비의 소모로 인한 한계점이 있었다.


막북친정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대회활동이 정화의 해외 원정이다. 당시 명나라는 통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 많은 위험요소들이 있었다. 또한 홍무제가 즉위하고 난 후 ‘호유용의 옥’이라는 사건을 통해 몇몇 국가들이 명나라를 얕잡아 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락제는 명나라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각국과 친교를 맺는 다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영락제가 정화로 하여금 원정을 보내는 또 다른 이유로는 조카 건문제의 행적을 찾기 위해서이다.
건문제는 남경이 함락할 당시 행방불명이 되었었다. 무력으로 황제의 자리를 탈취한 영락제는 조카인 건문제가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의혹감에서 벗어날 수가없었다.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의 시신을 찾아야지만 마음 놓고 황제의 옥좌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영락제는 환관인 정화를 사신으로 파견하는 임무를 맡기게 된다. 영락제가 환관인 정화에게 원정의 책임을 맡기게 된 이유는 ‘정난의 변’에서 정화가 뛰어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정화는 총 7차례의 원정을 떠나 영락제의 위상을 알리고 많은 국가와 친교를 맺게 된다.
정화의 대원정
1. 정화의 생애
정화는 홍무4년 (1371년) 윈난성 쿤양(昆阳지금의 진닝)에서 서역에서 이주해온 이슬람교도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성은 무하마드(이슬람교 창시자)에 음을 딴 ‘마’,자는 삼보(三寶)이다. 그의 조부는 윈난의 행정관이였고 부친도 고위관리였다. 또한 조부와 부친은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를 순례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메카에서 돌아온 부친과 조부에게 순례애기를 들으며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문화와 중국에서 상상하지 못할 신기한 동물대해 들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정화는 세상에 향한 눈을 떴을 겁니다.


홍무 15년(1382년) 명은 원의 잔당인 군벌들을 내몰고 윈난을 중국영토에 편입하기 위해 대군을 보냈다. 이때 정화는 포로로 잡혀 명나라에 수도인 난징에서 거세를 당하고 환관이 되었다. 홍무 23년(1390년) 10대 후반에 나이에 정화는 베이징으로 가서 연왕인 주체(영락제)에 환관이 되어 궁에 사는 동안 다양한 능력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첫째, 연왕이 수업을 들으러 갈 때마다 수행하며 지식을 축적했고, 둘째, 개인교사가 있었는데 ‘야오 군 샤오’라는 승려였다. 셋째, 연왕 주체를 모셨기 때문에 고위관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정치에 대해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1402년 7월17일 정화가 모시던 연왕 주체는 황제가 되었다 정화는 “정난의 변”에서 남경 궁 안의 태감(환관의 우두머리)과 내통하여 남경함락에 큰 공을 세운 것을 인정받아 영락2년(1404년)1월1일 정씨 성을 하사받고, 내관감의 태감이 되었다.
이후 영락제는 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는데 명나라의 황제가 중국의 신성한 통치자인 동시에 세계의 통치자라고 생각하고 전 세계 모든 나라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존경을 받아야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영락제는 서쪽 바다로 대규모 선단을 보내려고 했다. 대규모 선단에는 훌륭한 지휘자가 필요했고, 누구한테 맡길지 ‘야오 군 샤오’라는 승려에게 물었다. 그는 정치, 외교, 병법에 뛰어난 정화를 지목하였고 이에 동의한 영락제는 정화를 선단에 지휘자로 결정하였다.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의 항해를 통해 말라카 해협과 인도양을 거쳐 페르시아 만과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항해를 하였다.
2. 정화의 대원정
명대 문헌 기록의 의하면, 정화는 28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서양을 항해했다고 한다. 그는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을 거쳐 홍해와 아프리카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30여 개 나라와 지역을 순방하였으며, 그가 이끌었던 선대의 규모 역시 매번 출항 때 마다 200, 300여 척에 이르렀으며, 파견 인원도 27,800여 명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정화가 이용했던 선박도 뒤늦게 등장한 콜럼버스의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규모나 크기면 에서 실제로 몇 배는 더 컸으며, 설계 구조 역시 발전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정화의 선박은 규모나 기술면에서 그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며, 준비의 치밀함이나 항해의 숙련도에 있어서도 동시대의 그 어떤 선대보다도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정화는 서양 항해를 통해 서아시아와 동아프리카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중국의 대외 경제적, 문화적 교류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중국 태창 유가항을 출발하여 복건과 광동성을 지나 베트남, 자카르타 자바, 말라카,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수마트라, 스리랑카, 쿠이론, 캘커타를 거쳐 소말리아의 모가디슈까지 서진하면서 모두 30여 나라와 지역을 방문하며 중국의 비단, 자기, 사향 그리고 문화와 과학기술을 전파하는 동시에 기린과 낙타와 같은 해외의 신기한 동물과 안경, 후추, 진주, 향료, 보석, 산호 등의 물건을 중국에 들여오기도 하였다.



7차례의 원정 항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제 1차 항로 : 인도까지 도달. 제1회 원정에서는 참파(현재의 베트남 중부), 자바 섬 및 팔렘방 등의 수마트라 섬 각지(인도네시아), 말라카(말레이시아), 실론(스리랑카)을 거쳐 인도 서쪽 기슭 캘리컷 까지 도달하고, 이들 각지에 상륙을 기념하는 석비를 세우고 귀국. 귀국하는 배에는 이들 각지에서 명나라로 가는 조공 사절이 동행함.


제 2차 항로 : 제2회 항해에서는 자바ㆍ시암(타이)ㆍ캘커타ㆍ코친(인도)으로 가고, 돌아오는 길에는 실론(스리랑카)에 들름. 참파에서 서남쪽을 향해 7일 낮과 밤을 항해하여 시암 항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메남 강을 거슬러 올라가 도읍지 아유타야에 도착함.


제 3차 항로 : 제3회 항해에서는 제2회와 거의 같은 항로를 더듬어 자카르타ㆍ자바ㆍ말라카ㆍ수마트라ㆍ실론ㆍ쿠이론(인도)ㆍ코친 및 캘커타에 들름


제 4차 항로 : 제4회 항해에서는 캘커타에서 더 북서로 올라가 호르무즈까지 원정
제 5차 항로 : 제5회 항해의 항로는 제4회 때의 항로와 거의 같았음. 즉 정화가 이끄는 본대는 호르무즈까지, 별대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기슭 및 아라비아 반도까지 감.
제 6차 항로 : 제6회 항해에서 정화의 본대가 어디까지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호르무즈까지 갔다는 설과 수마트라ㆍ시암까지밖에 가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음. 그러나 별대 쪽은 지금까지 대로 아프리카 동쪽 기슭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갔음
제 7차 항로 : 정화의 본대는 호르무즈까지 가고, 별대는 아프리카 동쪽 기슭과 페르시아 만까지 감. 별대 중 일곱 사람이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함


3. 정화의 비범한 재능
정화는 항해, 외교 군사뿐만 아니라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먼저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예로는, 그가 서양을 항해하는 도중에 벌어진 석란산 전쟁을 들 수 있다. 영락 9년 정화는 제3차 서양 항해 도중에 석란산국(스리랑카)에 도착하게 되어 석란산 국왕 아열고나아에게 상을 내리고 충고하였으나, 그 국왕은 무시하고 정화에게서 금은보화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정화가 거부하자 그는 정화와 그의 일행을 해치고자 5만여 명의 병사를 몰래 파견 해 정화의 선대를 습격하고, 돌아가는 길목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정화가 선대를 구하지 못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정화가 그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서둘러 선대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도로가 폐쇄되어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정화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냉정하게 적의 상황을 분석하여, 석란산의 왕성을 공격하는 작전 계획을 세워 나갔다.
정화는 우선 힘센 부장 몇 명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다른 길을 찾아 선대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적과 싸울 준비를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준비를 마친 정화는 자신과 함께 남아있던 2,000, 3,000여 명의 병사를 직접 이끌고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의 오솔길을 뚫고 왕성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단숨에 아열고나아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대신들을 생포하였다. 왕성이 공격당하자 정화의 선대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했던 적의 병사들을 왕성을 탈환하기 위해 6일 동안이나 왕성을 공격했지만 끝내 정화가 지키고 있던 왕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의연히 왕성을 굳게 지키고 있던 정화는 7일째 되는 날 적의 방비가 소홀한 틈을 타 성문을 열고 아열고나아를 방패로 삼으면서 적진을 뚫고 샛길을 통해 무사히 자신의 선대에 도착하였다. 정화가 아무 탈 없이 선대로 돌아가자 적들은 어쩔 수 없이 정화에게 투항하였다.
곤경에 처한 상황을 침착하고 냉정하게 분석해, 적은 수의 병사로 몇 배나 더 많은 적과 싸워 이긴 사실은 정화가 병법에 능하고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화는 항해에 관해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정화는 대규모 선대를 이끌고 서양으로 항해를 떠나기 위해 사전 작업으로 동서양 몇 몇 나라를 오가며 항해의 경험을 쌓았다. 2년여 동안의 항해 과정 속에서 정화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기존의 여러 가지 항해도를 철저하게 연구 분석하면서, 서양에서 전래된 여러 가지 항해도, 항로를 측정하는 방법, 견성도를 이용한 항해기술, 항로상의 해역과 섬, 조류의 흐름을 그리는 기술을 습득하였으며, 이외에도 항해할 때 필요한 천문 지리, 해양 과학, 선박 조종과 수리 등에 관한 지식에 관해서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정화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외교가 중 한 사람이었다. 정화가 외교적 측면에서 이룬 뛰어난 업적은 대략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는 명 성조의 정확하게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고, 둘째는 종교적 측면에서 정화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 각국사람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그들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정화는 남양 지역에 이르러 강성한 군사력을 믿고 전쟁을 일으키는 섬나라 사람들을 설득하는 동시에 이들에게 약소국가를 기만하거나 능멸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이에 침략만을 일심던 나라들도 정화의 강력한 선대와 군사력에 두려움을 품고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특히 그는 이슬람교를 전파하여 다른 국가, 민족 간의 유대관계를 조화롭게 하고, 평화로운 상황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노력으로 인해 각 나라 간의 긴장상태가 완화되었고, 백성들 간의 협력과 단결을 촉진 시키는 면에도 도움이 되었다.
정화는 내관감 태감으로서 주로 궁실, 탑, 사찰, 능묘, 구리 그릇, 어름 창고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기 때문에 건축에 있어서도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책임 아래 세운 남경의 대보은사와 유리보탑은 그의 안목이 전문가 수준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남경 대보은사의 유리보탑은 명 성조 주체가 영락 10년에 북경으로 천도하고자 할 무렵 부친 주원장(명나라 초대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조형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정교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화는 남경의 대보은사와 유리보탑 이외에도 궁전과 전우에 대한 보수 공사를 책임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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