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이러한 미국은 18C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한 후 유럽인들이 앞 다투어 미국으로 이주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식민지 국가중에 하나였던 미국이 지금의 자주적인 국가가 될 수 있게 한 것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이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단순히 영국으로 부터의 미국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 뿐만 아니라 18세기 유럽역사에 있어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세계 정세 및 독립전쟁이 일어난 배경과 승리요인 뿐만아니라 독립전쟁이 가져온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독립 전쟁의 배경
미국 독립 전쟁은 내부의 문제로 보았을 때는 영국의 간섭에 대한 시민들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었으나, 이 전쟁과 근대의 속성의 발현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단순한 두 국가만의 문제로 치부하기보다는 17~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세력다툼 전쟁에 대해서 요약하였다.
1. 대동맹 전쟁
대동맹 전쟁(9년 전쟁)은 프랑스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독일황제․스페인․네델란드․스웨덴․영국․사보이․작센․바이에른) 사이에 이루어진 전쟁(1689~97년)으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또는 팔츠 전쟁이라고도 일컬어 진다. 1686년 프랑스에 대항해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이 결성되자 루이 14세는 열강들에게 포위된 정세를 만회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독일의 팔츠를 향해 대군을 출동시켜 라인․마인 강변을 석권했다. 이에 동맹군이 반격에 나서 네덜란드․영국․스페인으로 전선이 확대됐다. 프랑스의 해군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연합 함대에게 패하는 한편 나중에는 육군도 계속 패해 1697년 10월에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체결했다.
2.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병약해 자녀를 두지 못하자 그와 혈연 관계가 있는 프랑스와 독일의 왕은 모두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을 노렸다. 여기에 영국 왕 윌리엄 3세가 간섭하면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탁해 제멋대로 스페인 분할안을 제기하면서 유럽의 국제 정세가 혼란해지고 분규가 일어났다. 1700년 카를로스 2세는 죽기 직전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공작을 펠리페 5세로 하여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자로 지명했다. 그러자 장차 프랑스와 스페인을 한 사람의 왕이 다스리는 것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영국이 갑자기 프랑스의 반대 진영에 가담해 독일 황제와 네덜란드와 함께 헤이그 동맹을 결성하고 루이 14세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4년)은 바다와 육지에서 한꺼번에 벌어졌다. 영국의 말버러 공작 존 처칠과 독일의 사부아 공자 외젠 두 명장이 1704년 오스트리아로 진출했던 프랑스 군을 블렌하임에서 격파하고 전쟁의 주도권을 얻었다. 같은 해 8월에 영국군은 지브롤터를 점령했다. 프랑스 군도 지구전의 기술을 잘 발휘했으나 쉽게 헤이그 동맹의 포위망을 뚫지는 못했다.
3.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의 황제 카를 6세는 1713년에 국사 조칙을 발표해 남자 후계자가 없는 경우에 한해서 여자에게도 상속을 인정한다는 조항을 넣어 미리 각국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1740년 카를 6세가 죽은 뒤 맏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모든 영토가 상속되자 바이에른․작센․프랑스가 동맹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을 반대했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침략했다.(1740~48년) 헝가리로 피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여 대항했다. 전쟁은 초기에는 프로이센과 프랑스 쪽에 유리하게 전개됐으나, 바이에른의 선제 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오스트리아와 평화를 선택했고 엑스라샤펠 조약도 성립됐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인정받음으로써 자원과 인구가 풍부한 공업지대를 손에 넣었다.
4. 7년 전쟁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 때 프로이센에 빼앗긴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러시아와 동맹을 맺자,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작센 지방에 침입했다. (1756~63년) 프로이센은 한 때 우위를 점했으나 영국이 지원하던 군자금이 끊어지자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때마침 러시아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는 표트르 3세가 즉위해 러시아와 강화를 맺음으로써 다행히 완패는 면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과 동시에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패해 1763년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파리 조약이 성립됐다.
한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해 전쟁 이전의 상태로 복귀한 것을 승인함으로써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재확인 받았다. 전쟁 결과 영국은 세계의 해상 왕국으로서, 식민지 제국으로서 지위를 확립했다. 파리조약은 7년 전쟁의 종결을 위해 영국․프랑스․스페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캐나다․케이프 브레턴 섬․미시시피 강 동쪽 지역을 빼앗았으며 스페인으로부터는 플로리다를 할양받았다. 또 인도의 프랑스 식민지를 얻음으로써 약 1세기 동안 계속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식민지 쟁탈전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독립 전쟁의 원인(세금전쟁, 보스턴 차 사건)
1763년 7년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파리조약에 의하여 미국 대륙에서 프랑스 식민지가 소멸한 것을 계기로, 영국은 캐나다를 포함한 미국 식민지 전체를 본국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 첫번째 시도가 1763년에 발표된 국왕선언이었다. 이 선언에 따르면 식민지인은 인디언과 통상을 할 수 없으며 동부의 앨러게니 대지 서쪽으로 이주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나 이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치안유지와 법률 시행 감시를 위하여 영국군이 상주하고, 그것을 위한 경비분담이 강요되었다.
영국 본토의 다음 정책은 중상주의 강화 겸 세입증가를 위한 정책으로서 이것도 식민지인의 이해와 대립되고, 종래의 관행을 깨뜨리는 처사였다. 그렌빌 내각은 지금까지 묵과해온 밀무역의 단속을 강화하고 관세징수를 엄중히 시행하고자 1764년 설탕 조례를 시행하였다. 다시 1765년에는 인지 조례를 제정하였는데, 미국의 상인․저널리스트․변호사․목사 등 모든 계층이 "대표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1766년 인지조례는 철폐되었으나 타운센드 제법이 이에 대신하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본국의 모든 과세에 반대하였다.
1765년에 제정된 군대숙영법에 대한 식민지인의 반감은 70년의 보스턴 학살사건을 불러일으켰다. 1772년 청원에 의하여 어려움을 제거하려는 방법이 효과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각지에 통신위원회를 설치하고 연락을 취하면서 비합법의 반항운동에 들어갔다.
1774년의 보스턴 차사건에 대하여 본국이 보스턴항 봉쇄,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자치권 정지 등을 포함하는 징벌적인 여러 법을 부과하게 되자 식민지 쪽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법"으로 규정, 버지니아의 제창으로 제1회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서 "권리와 호소의 선언"이 채택되고, 국왕에게 1763년 이후 취하여진 탄압조치의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해 영국의회는 퀘벡조례를 제정하고, 캐나다 서쪽 지역을 확대, 이 지역의 프랑스인을 위하여 가톨릭교를 승인하였다.
식민지인들에게 이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국왕이나 의회는 식민지에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다. 식민지에는 자치가 행하여지고, 자유가 대폭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자기들의 자유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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