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로 향하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1. 일본과의 무역
아시아 무역지대로 들어온 유럽의 동인도회사들은 후추를 독점무역하려고 애썼다. 그 이유는 당시 유럽에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소금과 향신료로 저장을 해야 했다. 그렇게 아시아를 돌아 동쪽 끝에 도달한 여러 유럽 국가들은 일본을 발견하게 되고 일본에 많은 앞선 문물들을 전파하고 향신료와 은을 통해 부를 축척해갔다.
일본에서도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서로의 이익극대화를 위해 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세계항로 경쟁의 전반적인 양상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서양 문물이 조선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16세기 중엽 서양문물에 호의적이었던 일본은 유럽 여러 나라와 거래를 하고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대표적인 나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서, 포르투갈 상인은 동남아시아의 향료, 인도-유럽제품을 포르투갈 배로 나르고 중국의 생사와 견직물을 싣고와 일본의 은과 바꾸는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이윤을 미끼로 일본 지방의 영주에게 개종을 권유했다.
이러한 활동들과 더불어 선교사들의 활동에 의해 기독교 인구가 늘어나고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이후 새로운 지도자로 군림하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기독교를 승인한 것 같았으나, 선교사들의 광적인 개종 시도와 불교와 신도 사원을 불태우려 한 것, 일본인들을 잡아서 노예로 파는 행위 등을 문제 삼아, 1587년 7월 24일 기독교 금지령을 발령하고 오오무라 스미타다가 예수회에 기증한 나가사키를 직할령으로 바꾸었다. 히데요시는 기독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선교사는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포르투갈선의 일본 내항과 무역은 계속 허가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금교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겨우 전국시대 통일을 이룬 히데요시에게 어쩌면 기독교의 수용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처럼 식민지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160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배 리프데호가 일본에 표착한다. 원래 진출 중이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은 경쟁자이자 적국이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통상을 반대한다. 하지만 일본의 외교권을 가지고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양국의 이해관계를 이용, 대립-경쟁시킴으로써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다. 결국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이 일본으로 오는 것을 전면 금지하고 포르투갈 인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과 무력을 앞세운 무역을 지양했다. 네덜란드는 어디를 가든지 자신의 종교를 강압하거나 선교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점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 하멜이 경험한 조선
1653년(효종 4)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로 호크(Sparrow Hawk)호가 심한 풍랑으로 난파되어 선원 64명 중 36명이 중상을 입은 채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 바다에 상륙했다.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억류되었다가 8명이 탈출해 귀국했는데, 귀국선의 서기인 하멜이 한국에서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사실을 기록한 책이 하멜 표류기이다.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는 6월 1일 자바섬의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그 곳에서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총독 명령에 따라 스페로 호크호로 대만(臺灣)의 안핑(安平)으로 향발, 6월 14일 도착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대만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네덜란드인 레세르(Lesser, C.)를 임지로 데려다 주는 일이었다. 임무가 끝나자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 30일 나가사키를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풍랑이 심해 8월 11일까지도 스페로 호크 호는 대만 해협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8월 15일 풍랑은 더욱 심해 선미(船尾)의 관망대가 떨어져 나갔고, 탈출용 작은 배도 잃어버렸다. 배 안에 물이 스며들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선원들은 짐과 돛대마저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한 선원이 육지가 보인다고 외쳤는데 그 곳이 바로 제주도 남해안이었다. 정박을 시도했으나 극심한 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 거대한 파도가 거듭 선창으로 밀려들어 결국 스페로 호크 호는 난파되고 말았다. 64명의 선원 가운데 28명은 익사하고, 육지에 오른 생존자 36명은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에게 체포되어 감금된 후 서울로 호송되었다. 제주 목사 이원진이 난파당한 서양인에 대하여 치계한 글이 조선왕조실록에 쓰여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동인도회사 선원들은 서울에서 2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1656년 3월 전라도로 옮겨졌다. 제주에서 체포될 당시, 네덜란드 출신의 박연(朴燕: Jan Janse Weltevree)이 서울에서 내려와 통역을 하였고 비로소 이들의 소속과 정체가 파악되었다.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서 탈출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고 10개월 동안 감금되었다가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 하멜은 북벌정책을 추진하였던 효종을 알현하였는데 이때 일본으로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이후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자 이들을 찾아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다가 이런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결국 1656년 3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에 소속되었다. 이곳에서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잡역에 종사하였으며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 동안 14명이 죽고, 다시 1663년 생존자 22명은 여수, 남원, 순천으로 분산되거나 수용되어 길고 긴 고난의 억류 생활을 계속하였다. 1663년(현종 4) 하멜은 여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었고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쳐 탈출을 결심하였다.
마침내 1666년(현종 7) 7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일본 히라도로 건너가서 나가사키로 갔다.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 동인도외사의 상관(商館)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 바쿠후에도 전해져 조선에 남아있는 네덜란드 선원들이 석방교섭이 진행되었다. 1667년 석방 교섭이 완료되어 조선에 남아있던 동료도 모두 석방되었고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하멜 표류보고서는 자신과 동료가 조선에 억류되어 14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가 출간되자 네덜란드와 유럽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이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조선과 직접 교역을 위해 1000톤 급의 선박인 코레아 호를 건조 하였으나 일본 바쿠후(막부)의 반대로 코레아 호는 조선으로 항해하지 못했다.
17세기 당시 최신의 신기술을 가진 네덜란드인의 조선으로의 표류는 조선이 서양에 비해 뒤떨어진 격차를 따라 잡을 수 있는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기술과 지식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조선 국왕과 신료들의 중화사상 및 국제현실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친 격이며 국가적인 기회 상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이 17세기 네덜란드인과의 조우를 계기로 넓은 세상에 눈을 뜨고 미래를 준비했더라면 그 후 조선의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특히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상관을 허락하고 왕성한 무역 과정 속에 발 빠르게 세계정세를 판독한 일본과 조선을 비교하면 한국과 일본의 운명이 17세기 나가사키에서 갈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맺음말
풍차와 튤립의 나라, 네덜란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진 선진국의 유럽국가 중의 하나였던 네덜란드는 우연에 의한 선진국이 아니었다. 열악한 자연조건과 부족한 지하자원 그리고 작은 나라는 강인한 민족성으로 끊임없이 분투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이윤 극대화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예로 플류트 (Fluyt) 선박의 건조하여 해상운송의 혁명을 이루었으며, 전통적인 농·어촌의 개혁을 통하여 효율적인 대량생산이 가능해 져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막대한 자본들은 동인도회사의 설립에 이바지 하였으며, 의회는 이러한 동인도회사의 활동에 적극 지원하여 원활히 무역활동을 재개 할 수 있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이러한 국외 무역을 통한 막대한 자금 유입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플레이션을 대비하여 은행 시스템을 설계했다. 시장에 유통되는 자금을 은행의 지급준비율을 통해 잡았으며 그 자금을 대출을 통해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적국에도 자금을 유통시켰다. 이는 신용이라는 제도가 등장했음을 의미하며, 현대 금융업의 핵심이다. 그러나, 대항해시대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탐욕이 불러온 식민지점령 및 노예무역은 아픈 잔혹사로 남아 있다.
현재, 네덜란드 국왕이 지난 250년간 노예제를 공식 사과하였고 과거사를 반성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다. 자유와 관용을 중요시하며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네덜란드라는 나라와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이해 할 수 있는 시간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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