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는, 열악한 자연조건과 부족한 지하자원 그리고 스페인 영국 프랑스 위로는 스웨덴으로 둘러싸인 강대국들의 위협까지 겪어야 했다. 면적 역시 현재와는 조금 상이하겠지만 약 41,543㎢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절반 수준에 불가한 나라지만 17세기 전 세계 강대국들과 맞서서 당당히 무역로를 장악하고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과연 어떠한 원동력으로 인해, 네덜란드를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 하게 할 수 있었는지, 무역 강소국이 된 배경과 아시아로 향하는 배경(ex. 일본과 조선)에 대한 요약하였다.
경제 강국 네덜란드(Netherlands)
풍족하지 않은 자원 속에서 네덜란드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네덜란드인들의 자세를 처음으로 꼽을 수 있다.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 맞게 대책을 세우고,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고 활용하는데 뛰어났다. 치밀하고 철저한 계획하에 경제 이윤을 극대화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가장 크게 적용된 분야가 바로 어업, 수공업, 농업이었다. 네덜란드는 이 세가지 분야의 발전을 기반으로 재력을 갖춘 다음 해외 팽창을 시도하여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농업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면, 네덜란드는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물난리가 매우 잦았다. 그래서 마을마다 둑과 제방을 쌓아 바다와 호수, 습지 등을 육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땅은 '폴더(Polder)'라 하는데, 폴더를 경작한 농민은 5년에서 길게는 20년까지 면세 혜택을 받았다. 더불어 작물을 경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목축업을 발달시켰으며, 교통이 편리한 도시근교에서는 부식품과 원예작물을 집중 재배했다. 또한 같은 업종이라도 지역에 따라 중점분야가 달랐다. 목축업을 예로들면 어떤 곳에서는 버터 생산에 중점을 두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유제품, 양털, 소고기를 생산했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도시에 공급할 신선한 우유를 생산했다. 이를 통해 볼때 네덜란드 농민들은 자신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하여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애썼으며, 정부 또한 이들을 장려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도왔음을 알 수 있다.
네덜란드 농업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생산뿐만 아니라 모든 관점에 있어 경제적 개념을 주시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농민들은 항상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시장경제 관념을 키워 나갔는데, 당시 대학 교육을 받았고, 비교적 재산이 넉넉했던 한 농장주의 장부를 보면, 그는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한 밀과 보리를 시장에 내다 팔고 호밀을 사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밀은 부유한 사람들의 주식으로 가장 비싼 곡식이었고, 맥주 원료였던 보리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반면 호밀은 가치가 떨어지는 데다 발트 해 주변지역에서 생산된 호밀이 대량 수입되면서 가격이 더욱 폭락했다. 이런 시장의 흐름을 읽은 농장주는 자신이 생산한 밀과 보리는 외국에 내다 팔고 대신 싸게 사들인 호밀을 일꾼과 하인들의 식량으로 공급하여 가계지출을 최소화 했다. 이러한 경제 관념은 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생각이었다.
네덜란드 어업의 경우 청어 생산에 주력했음을 알 수 있는데, 청어 가공에 있어 고기 잡는 사람, 내장을 발라내는 사람, 생선을 소금에 절여 통에 넣는 사람 등의 분업 체계를 완성하여 효율성 있는 산업을 구축하였으며 때문에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도시 상인들의 자본이 투자되면서 청어 가공 산업은 대규모 생산 공정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효율적인 어업관련법규는 청어산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청어산업의 중심 도시인 5개 항구에는 어민들로 이루어진 '대어업 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 위원회는 의회로부터 일련의 법적 권리를 부여받아 엄격한 심사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어선은 출항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시스템은 청어의 국가 경쟁력을 높여 유럽 시장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도록 하였다.
또 다른, 경제관념을 발휘한 분야로는 선박 기술의 발달이다. 네덜란드 황금산업들은 모두 발트해 무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서유럽 국가의 선박은 발트해의 관문인 외레순(Oresund) 해협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당시 이 해협을 장악하고 있던 덴마크는 이곳을 지나는 선박에 통행료를 부과했다. 그런데 당시 통행료 산정방식이 선박의 중량이 아닌 갑판의 너비를 기준으로 삼아 그 방식이 매우 특이했다. 이에 네덜란드 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통행료의 부담을 줄이고 선적을 늘일 수 있는 플류트선 (Fluyt) 을 개발하였다.
이는 16세기부터 네덜란드에서 건조되었으며, 대양횡단 운송을 위해 선원 효율성이 최대로 발휘되고 배의 용적이 최대치가 되도록 제작되었다. 건조비는 비싸지 않아 다수의 플류트 선이 건조되었으며 12~15문의 대포로 무장했지만 해적들의 다소 쉬운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플류트 선은 흘수선(배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배와 수면이 접하는 선)에서 갑판으로 올라갈수록 선폭이 좁아지는 형태로, 통행료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갑판을 좁게 만드는 대신 대부분의 시설을 선체 아래에 집중시켰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설립
유럽 여러 나라의 동인도회사 출현의 역사적 배경은 독점의 특허라는 절대주의 왕정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원래 네덜란드 상인은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발트해의 생산물과 교환하기 위하여 동방의 생산물을 수입하였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통해 이루어지는 동방무역은 막대한 국부 유출을 감당해야 했고 점점 치솟는 가격으로 동방으로 직접 해상무역에 진출해야 한다는 압력이 증대하였다.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 : 절대주의 시대의 유럽 각국의 경제 정책으로서, 처음에는 수출을 증가시키고 수입을 억제하여 여기서 얻어지는 무역의 차액으로 국가의 재력을 증가시키려고 하였다. 수입품에 대한 높은 보호 관세의 부과 등은 그러한 목표 달성을 위한 정책의 하나였다.
때문에 직접 동양의 여러 지역과 거래를 트기 위하여, 1596년 암스테르담에 원국회사(遠國會社)가 설립됨과 동시에, 코르넬리스 하우트만이 지휘하는 첫 번째 상선대(商船隊)가 파견되었다. 4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은 자바 섬에서 많은 후추를 사들여 돌아왔으며 막대한 이익을 내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ompagnie, VOC)가 설립되기 이전에 유럽내에 영국, 스페인 등의 동인도 회사가 이미 설립되었는데 어떻게 이들을 물리치고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는지 배경에 대해 분석하였다.
첫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동방무역 회사들의 상업자본을 하나로 모아 거대 자본을 형성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과 국가의 이익이 결합하여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강력한 확장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기능을 종합적으로 갖추게 된다. VOC가 만들어질 당시 자본금이 약 650만 길더였다. 현재 한국 돈으로 약 1조7천억원 정도이다. 이를 위해서 여종들도 쌈지돈을 투자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자본이 뭉쳐진 형태이다. 이 금액은 영국 동인도회사 자본금의 1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의회도 투자자였는데, VOC에게 각종 경제, 정치적 특권을 부여해 주었다. 그 예로 희망봉(아프리카)에서 마젤란해협(필리핀)까지 무역독점권과 향료 비단 면직물에 대한 면세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동인도 회사는 동양의 상품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생산지의 식민지화가 필연적이기 때문에, 말루카 섬의 향료를 독점한 네덜란드는 희망봉에서 타이완[臺灣]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거점을 확보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원주민에 대한 지배를 촉진시키는 등 영역을 확장시키기에 힘썼다.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는 의회에 25000길더를 지불하고, 의회를 대표하여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해외 식민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으며 식민지 행정과 사법, 국방의 권리까지 부여받았다. 하지만 의회는 이 자금을 바로 회사에 투자하였다. 즉, 의회가 회사의 대주주가 된 것이다.
반면 동인도회사는 포루투갈과의 전쟁을 위해 25만 길더를 지원했고 1665~67년 영국-네덜란드 전쟁때는 무려 500만 길더를 지원했다. 즉, 국가와 회사는 둘이 아닌 하나였다. 이처럼 상인들의 부와 국가 권력이 완벽하게 결합하여 탄생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빠르고 힘차게 포르투갈이 차지하고 있던 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뻗쳐 17세기에는 유럽최대의 아시아 무역국이 될 수 있었다.
둘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이 존재했다. 17세기는 왕권신수설이 등장하고 절정에 이르던 시절으로써, 포르트갈과 스페인은 국왕의 의사결정을 토대로 이루어지다보니 항상 늦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상이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임원진을 토대로 이사회를 구성하여 최고 권력기구로서 회사의 중대한 사안들을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결정되었다.
셋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회사의 장기적인 투자를 위하여 근대의 주식화사와 비슷한 운영방식을 도입했다. 이를 위해서 회사는 증권거래소를 도입하였다. 처음 회사의 설립을 위해 많은 주주들에게 자금을 모았다. 하지만 동인도 회사의 설립이 지속되는 동안 단 한 번의 배당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주들을 이해시킬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투자금은 주식 형태로 보존되기 때문에 언제든지 원할 때 현금화가 가능했다. 증권거래소를 통하여 내가 보유한 주식을 매매하면 되기 때문이다.
넷째는 국가로부터의 막강한 공권력의 부여이다. 17세기 초에 동인도회사가 충원한 군인의 수는 3000명 정도였으나, 1750년경에는 17000명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서 경쟁 동인도회사들의 무력시위를 쉽게 막을 수 있었으며, 항해와 무역에 전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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