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세계사이야기 |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제, 그는 누구인가?

곰고로곰 2024.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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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생애 및 업적

진시황(秦始皇·BC 259 ~BC 210)은 성 영(嬴). 이름 정(政). 조(趙)나라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의 계략으로 즉위한 장양왕(자초)의 아들이며 장양왕이 즉위 3년만에 죽자 정의 나이 13세에 왕위에 올랐다.(사마천 <사기> '진시황본기') 처음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奴毐)가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BC 238년 친정(국가원수가 직접 출정하여 정벌)을 시작하였다. 

 

벌거벗은 세계사 E06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尉繚)와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韓)·위(魏)·초(楚) ·연(燕) ·조(趙) ·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였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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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황제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중국의 전설에서 나오는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에서 명칭을 가져왔다.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을 정비하고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하였다. 문자·도량형·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하였다. 또 천상을 본떠 대대적으로 확대 건설한 수도 셴양[咸陽]으로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하여 반란의 소지를 제거하였으며,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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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정책에도 적극성을 보여 북으로는 흉노족(匈奴族)을 격파,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하고 전국시대 각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요동에서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였으며,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와 해남도까지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 그는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렸으며, 남을 신용하지 않았으나 대단히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어 만기(萬機)를 직접 처리하였다. 또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巡行)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 

 

그러나 아방궁(阿房宮)과 리산[驪山] 기슭의 수릉(壽陵)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력을 낭비하였고, 특히 만년에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마지막 순행 도중 사망하자 수행한 이사와 조고(趙高) 유언을 위조하여 황자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BC 209년 이후 시작된 반란으로 진(秦)제국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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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가 폭군인 이유

진시황제에 대한 평가는 폭군의 대명사처럼 부정적 시각이 있는가 하면 분열시대를 끝맺고 통일을 완성한 절대군주로의 긍정적 평가도 있다. 여기서 진시황제가 폭군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진시황제가 펼친 정책 중에서 엄형주의정책, 대토목사업, 외국정벌은 농민들의 많은 불만을 샀다. 특히 대토목사업의 강제노동은 농민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춘추․전국시대에도 부역이나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나라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멀리까지 부역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진에서는 머나먼 북방의 만리장성을 쌓으러 동원되었고, 수도 함양의 아방궁(阿房宮)공사 그리고 흉노와 남월을 원정하러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동원은 농민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아울러 농업생산력의 저화와 함께 막대한 토목․군사비를 짊어지게 하였다.

 

더욱이 강제노동의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국가는 고의로 많은 죄인을 만들기 위해 혹심한 연좌제(連坐制)를 적용하고, 일반민을 법에 저촉시키기 위해서는 가혹한 형벌을 조작했다. 진의 강제동원령에는 농민이 국가가 정한 날짜에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는 혹법이 있었는데,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으로 일컬어지는 진승․오광의 반란이 시작된 것도 바로 이러한 강제동원령 때문이었다. 또한 천하통일이 이룩된 후 진시황의 통치 기간 중 이사는 승상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 막강한 권세는 누렸다. 

 

이사는 황제가 천하를 몸소 다스리는, 서른여섯 개의 군으로 나라를 구분하고 그 밑에 현을 두어 조직적으로 일사분한하게 통치하는 제도를 추천했다. 그러나 이사는 학자들이 사사로이 학문을 전수하며 법을 비난하고 자기가 배운 것만을 기준으로 시비를 따진다고 모함하여, 또한 황제를 비방하는 말을 퍼뜨린다고 하여 학자들을 난관에 빠뜨렸다. 

 

결국 사관이 갖고 있는 자료 중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우고 개인이 『시경』과 『서경』 그리고 제자백가의 책은 모조리 몰수되어 불태워 졌고 옛것을 언급해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처형당했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진시황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서시(徐市)에게 어린 소년 소녀 3천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배들을 거느리게 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와 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시는 몇 년이 지나도록 약을 구하지 못하자 돌아와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러나 서시일행은 끝내 영약을 구하지 못하고 일본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후 진시황은 스스로 신선이라 자칭하는 노생과 후생이라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거처를 모르게 하였다. 그러나 필사적인 진시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생과 후생은 불로장생의 약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있다가는 틀림없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진시황을 비방하고 도망쳐 버렸다. 

 

진시황은 자신을 비방했을 것으로 자신을 비방한 사람들은 주로 유생들이었다. 결국 460여명이나 되는 유생들을 붙잡아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사건이다. 진시황은 죽음을 그렇게 피하려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13살 즉위 할 때부터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묘자리를 파고 있었다. 시황릉(일명 여산릉)은 높이가 116m, 주위의 길이가 2.5m, 사방이 각각 600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무려 70여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어 공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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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은 동으로 주조하였으며 무덤 내부는 궁전과 누각 등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리고 수은으로 황하, 양자강 및 바다를 본 떠 만들고 수은을 계속 흐르게 하였으며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 새긴 해와 달과 별들이 반짝이게 하여 지상의 세계를 그대로 펼쳐보이도록 했다. 아울러 고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조명시설도 해놓았다. 또한 내부에는 활을 설치하여 도굴자가 침입할 때는 즉시 자동 발사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진시황이 죽어 시황릉에 매장되게 되자 후궁들도 모조리 생매장되었으며 매장 직후에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능 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어 매장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서 생죽음을 당하도록 하였으며 무덤 위에는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도록 위장하였다. 또한 무덤 안에는 진시황을 모시는 시중과 신하 그리고 호위병과 군마 등 수 만개의 도용을 배치하였으며 심지어 산채로 끊는 구리물을 뒤집어 씌워 만든 것도 있었다. 아방궁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약700m, 남북의 길이가 115m로서 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는 약 11.5m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만큼이나 높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곧바로 남산으로 통하는 고가도로를 만들었으며 수위를 건너 함양으로 연결되는 복도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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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이없게도 아방궁이 완성되기도 전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한편 통일 천하를 이룬 진시황에게도 계속 부담을 주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그래서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 국경에 거대한 장성을 쌓도록 하고 몽염 장군에게 30만 병사를 주어 그 임무를 맡도록 했다. 몽염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했으며, 그리하여 10여년만에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는 총 길이 1만여 리의 대장성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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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사를 위하여 30만 명의 군사 아닌 잡역부들이 동원되어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했으며 몽염 자신도 10여 년 동안 밖을 나오지 못했다. 이 대공사는 백성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렇게 무리한 사업이 원인이 되어 진나라에서는 각 지방에 반란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후에 진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진승·오광의 난도 사실은 만리장성을 쌓은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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