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세계사이야기 | 진시황제와 한무제의(진황한무) 같음과 다름

곰고로곰 2024.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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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의 침입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까지 활약한 흉노족은 긴 겨울을 날 양식 마련을 위해 매년 가을이면 중국 북방 변경의 농경지대를 약탈했다. 유목민족인 흉노 처지에서는 말이 살쪄 전투력이 최상에 오르는 가을은 약탈의 최적기였다.

중국 통일 후 진시황은 이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몽염장군에게 30만 병사를 주어 그 임무를 맡도록 했다. 몽염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했으며, 그리하여 10여년만에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는 총 길이 1만여 리의 대장성을 완성하였다. 이 공사를 위하여 30만 명의 군사 아닌 잡역부들이 동원되어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했으며 몽염 자신도 10여 년 동안 밖을 나오지 못했다. 이 대공사는 백성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렇게 무리한 사업이 원인이 되어 진나라에서는 각 지방에 반란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후에 진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진승·오광의 난도 사실은 만리장성을 쌓은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한무제 역시 흉노로부터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지키기 위해 장성을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했다. 이후 남북조시대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축성은 계속돼 무려 6400㎞에 달하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로 남게 됐다. 한무제 이전의 한고조 유방은 평성에서의 참패로 흉노와 화친정책을 맺게 되었고 그 중심내용은 한나라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내 친분을 유지하고, 매년 흉노에게 일정한 수량의 솜, 비단, , 쌀과 다른 식량을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한나라 조정은 관시를 개방해 내지 국민과 흉노 국민의 무역을 허락했다.  당시 사회경제는 여전히 매우 힘들었고 부진한 국세 아래에 근본적으로 몇 만 내지 몇 십만 대군을 이끌고 국경 밖으로 원정을 나갈 역량조차 없었으며 흉노에 대한 다방면의 이해도 매우 얕았으므로 단지 타협적인 화친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적지 않은 인력과 물력이 소모되더라도 결국 전면적인 싸움이 터져 가져올 모든 소실보다는 훨씬 나았고, 국민의 부담을 줄이고 생활을 안정시켜 원기를 회복할 귀중한 시간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무제는 내정을 강화한 후 한고조와 다르게 흉노에 대한 정책을 소극적에서 적극적으로 전환하였다.  서쪽에 흉노와 원수지간인월지국과 군사동맹 맺기 위해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였다. 가는 도중 흉노에 잡혀 10년간 억류당했으나 탈출했지만 동맹은 실패하였지만 그 대신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 서쪽땅을 알게 되어 후에 실크로드가 열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서역경영으로 서역 오아시스 주변 국가와 흉노와의 관계 단절을 통해 흉노에 큰 타격을 입히려 하고 대신 한나라과 수교케 하였다. 이에 흉노족은 자급자족이 어려워 졌고 고립되는 효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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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정치

진시황과 한무제는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유지의 목적은 같았지만 그 수단은 달리하였다.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책략을 가진 진시황은 서로 각축전을 벌이던 전국시대를 마무리 짓고 역사상 처음으로 다민족을 통일한 봉건 왕조를 열었다. 진시황은 관리들과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있어 엄격하고 가혹한 법을 바탕으로 하는 법가의 정치이념을 국시로 삼았다. 그러나 진 왕조는 너무도 급작스럽게 멸망하였고, 진나라가 이렇게 빨리 망한 것은 법가의 정치방법이 봉건왕조의 유구한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한나라 초기의 유학은 비로소 부흥의 계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한무제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유가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유가의 사상을 받아들여 국가의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법가는 농사를 지으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장려하였고 능력과 관계없이 친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을 반대하여 종법 사회의 수요에 적합하지 않았다. 유가는 줄곧 부친을 존경하고 온 천하가 서로 맞물리어 하나의 집안처럼 화목하게 지낼 것을 제창하였다. 법가는 예에 의한 정치를 반대하였으나 유가는 오히려 예를 법으로 삼았으며 예를 온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교화할 것을 요구하였고 풍속을 교화하여 군주와 관료, 백성 이 셋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평형을 이루거나 서로 어울리는 사회의식 체제를 건설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통치자의 윤리규범을 전 사회의 일반 규범으로 대체하였고 사상의식 방면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통치자에게 순응하여 결국엔 사회의 모든 방면이 군주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더욱이 한초의 유학은 음양오행의 학설과 결합했으니, 봉건적인 예악교화와 신비한 종교 세계관을 결합하여 유학으로 하여금 더욱더 탄력있게 만들었고 비록 짧은 기간 사이에 이루어져서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질긴 면이 있었다. 그러기에 유학은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부흥을 시작하였고 또한 안정적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치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는 백가의 장점을 흡수하고 뒤섞어 전제주의 제도를 제정하고 완비하였다. 각 학파 가운데 한무제가 가장 관심을 쏟고 크게 받아들인 것은 역시 유가, 법가의 두 학파였다. 유가와 법가의 학설은 비록 많은 차이가 있으나, 모두 군주 대통일의 정치구조를 옹호하며, 중원민족으로 이민족을 교화시킬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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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황제는 가장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가장 죽음을 두려워한다.

진황한무. 그들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 싶어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얻으려고 미신과 영약에 집착했다. 진시황은 불로초에 목을 메 전 세계에 술사 등 탐험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진시황은 서시(徐市)에게 어린 소년 소녀 3천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배들을 거느리게 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와 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시는 몇 년이 지나도록 약을 구하지 못하자 돌아와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러나 서시일행은 끝내 영약을 구하지 못하고 일본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후 진시황은 스스로 신선이라 자칭하는 노생과 후생이라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거처를 모르게 하였다. 그러나 필사적인 진시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생과 후생은 불로장생의 약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있다가는 틀림없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진시황을 비방하고 도망쳐 버렸다.

 

한무제도 진시황 못지않게 불로장생의 꿈에 매달렸다. 진시황에게 서시가 있었다면 한무제에겐 동방삭이 있었다. 삼천갑자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으로 더 유명한 동방삭(東方朔)은 객난(客難) 비유선생지론(非有先生之論) 등의 작품을 남긴 실제 인물이었다. 동방삭의 이름 앞에 삼천갑자가 붙은 이유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 유명한 게 불사의 영약을 가진 신인(神人)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갑자는 60년이니 삼천갑자는 18만년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불로장생했다는 것이다. 동방삭이 이렇게 설화와 역사의 혼합된 인물로 변하는 과정엔 한무제의 불로초에 대한 절실한 구애와 이를 구하려는 동방삭의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동방삭은 세계 각지를 항해, 탐험하고 신이경(神異經) 북황경(北荒經)과 같은 탐험기를 남겼다. 동방삭의 이름에 불로의 삼천갑자가 덧붙여진 후 중국에선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동방삭의 이름으로 가탁(假託)하는 일이 많아졌다. 최근 동방삭이 세계 최초로 북극을 탐험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가 남긴 탐험기의 묘사가 북극지역을 설명한다는 주장이다. 삼천갑자의 그의 이름을 빗댄 또 하나의 가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21세기에도 그의 이름이 불로장생하는 것 같아 관심을 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무덤에까지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들은 그들의 권력이 식기도 전부터 그리도 급하게 자신의 사후를 위해 능을 만들어 놓으려 하는 것일까?

진시황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세 살 즉위 할 때부터 자신의 무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도 유명한 진시황릉이다. 시황릉(일명 여산릉)은 높이가 116m, 주위의 길이가 2.5m, 사방이 각각 600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무려 70여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어 공사를 했다. 관은 동으로 주조하였으며 무덤 내부는 궁전과 누각 등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리고 수은으로 황하, 양자강 및 바다를 본 떠 만들고 수은을 계속 흐르게 하였으며 천장에는 진주로 새긴 해와 달과 별들이 반짝이게 하여 지상의 세계를 그대로 펼쳐보이도록 했다. 또한 고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조명시설도 해놓았다. 또한 내부에는 활을 설치하여 도굴자가 침입할 때는 즉시 자동 발사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진시황이 죽어 시황릉에 매장되게 되자 후궁들도 모조리 생매장되었으며 매장 직후에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능 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가 매장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서 생죽음을 당하도록 하였으며 무덤 위에는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도록 위장하였다. 또한 무덤 안에는 진시황을 모시는 시중과 신하 그리고 호위병과 군마 등 수만 개의 도용을 배치하였으며 심지어 산채로 끊는 구리물을 뒤집어 씌워 만든 것도 있었다.

 

한무제는 기원전 141년 황제 즉위 2년부터 무능을 건축하도록 명하여 능원 건설을 시작하여 기원전 87년 사후에야 간신히 완공한 웅장한 규모의 무덤이다. 그 당시 그는 그저 십대의 아이에 불과 했었는데, 그의 수능은 역대의 그 어떤 조상보다도 더 크고 더 높게 지으려 했던 것이다. 능은 복두형이며, 밑 부분의 각 변의 길이는 240M이고, 높이는 46.5M이다. 능 윗부분은 동서의 길이가 39.5m ,남북은 35.5M이다. 담장 동서 430M,남북 414M이다. 현재는 동, , 3개문이 있으며, 문의 폭은 각각 14M,12M,16M이다. 그의 대신 곽광은 명령을 내려무수한 금은보화와 조수, 물고기, 거북이, , , 표범 등의 동물을 모두 함께 그 무릉에 묻었다. 곽광은 또한 후궁의 여인들로 하여금 능의 구역 내에서 살게 했으며 경사의 궁궐을 청소하고, 산궁에 제사를 지냈으며, 이 거대한 능묘를 완전히 봉쇄시켜 영원한 어둠 속에 묻히게 하였다.

 

 

폭군의 이미지

진시황은 도량형이나 문자, 화폐 등의 통일과 전국통일, 유목민의 침입 방어 등의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폭군이라 불리게 된 계기는 바로 분서갱유이다. 강력한 무력과 엄격한 법으로 통일은 일단 성취되었으나, 이미 춘추 이래 발달한 각 지역의 독자적 문물과 창의적인 생각, 비판적 언론이 문제가 된 것이다. 진시황은 제국의 장기적인 지배를 위해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통일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민간인들에게는 당시의 지배이념인 법가 사상서와 실용서적들을 제외한 어떠한 책의 소지도 금지하였으며, 관리가 아닌 사람의 자유로운 학술토론도 금지하였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서적들이 금서로 취급되어 관에 수거되고 잿더미가 되었으며, 옛 서적에 대해 논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옛것을 찬미하고 진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면한다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에 비판적인 유생 460여명이 생매장 당하는 갱유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독재적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최초의 선례로, 세계적 언론탄압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무제는 유가사상을 통해 국가를 통치하였음에도 폭군으로 불리게 된 계기는 여기에 있다. 흉노를 물리친 공적을 세웠지만 끝내 흉노의 포로가 된 한나라 무관인 이릉을 한의 조정은 그를 매국노로 몰고 공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이릉의 가족을 참수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후대에 이릉을 부각시키기 위해, 한족의 우월성을 지켜나간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한무제를 폭군으로 몰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한무제의 대단한 업적은 숨긴 채 말이다. 그들을 폭군이라 부르기 이전에 그들의 뛰어난 업적을 인정하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역사는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져야지 다른 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그 전의 업적을 가리거나 바꿔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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