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와 에스파냐 무적함대
1. 배경
에스파냐(현 스페인)가 잉글랜드를 정복할 계획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엘리자베스의 잉글랜드 함대가 에스파냐의 식민지들과 함선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으며 그로 인해 에스파냐 은행은 파산하고 베네치아 은행도 파산 직전에 놓인 상황에 이른다. 오래전부터 잉글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의 탄압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으며 이러한 약탈에 대한 응징을 하고자 하여 에스파냐는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뒤 이어 전쟁 소식을 들은 엘리자베스 바로 이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한다. 그녀는 드레이크에게 에스파냐 응징 원정을 허락하고 아직 무장을 하지 못했던 에스파냐는 드레이크의 공격에 제대로 방어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본래 계획 중이었던 무적함대의 결성이 지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에도 엘리자베스의 빠른 판단과 통솔력이 있었기 때문에 미리 무적함대가 들어오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2. 에스파냐 무적함대 격파(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전)
1588년 7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의 해역에 접어들자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엘리자베스는 무적함대를 격파시키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였고 그 준비는 전쟁의 결과에서 드러났다.
에스파냐는 3만 해군병력 중 약 2만 명을 잃게 되고 130척의 함선 중 60여척을 잃으면서 완패하게 된다. 이 무적함대의 패배로 에스파냐의 해상무역 권은 잉글랜드에게 넘어가고 이로써 네덜란드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는 계기로 이어지게 된다.
엘리자베스의 탁월한 외교정책
엘리자베스의 외교정책은 그녀의 왕권초기 때 종교개혁 때부터 발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가톨릭 국가의 외교관을 상대할 때는 서로의 종교관이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의도적으로 상대방에 맞춰주며 했던 반면에 신교도 국가를 상대할 때에는 가톨릭과 신교도의 차이점을 크게 강조하면서 신교도로서의 목소리를 내곤 하였다. 따라서 이 점을 보아 이는 훗날 그녀가 보여줄 더 큰 변화의 외교정책의 전조가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외교정책의 지혜가 돋보였던 것은 에스파냐와 프랑스 양자 간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서 그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는데 둘 중 어느 쪽으로도 기울게 하지 않고 사태 속에서 가만히 자기를 지키는 심리적인 전략을 사용했다. 엘리자베스는 에스파냐의 왕인 펠리페 2세와의 결혼이라는 개인적인 관계를 이용하여 철수의 설득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 반도들에게는 금이나 무기를 은밀하게 제공하였고 또 당시 스페인에게 잉글랜드에 대한 선전 포고의 구실을 주지 않으면서도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는 에스파냐군의 반란의 진압 또한 성공시키지 않는 간적적인 접근 전략을 취했다. 그녀가 보여준 외교적 지혜는 잉글랜드의 해군력을 증강시켰고 영국이 일류 해군국이 될 토대를 닦아놓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상공업과 무역을 번창하게 되고 그것이 경제 발전까지 이루어 학문과 예술을 꽃 피워 영국문학의 황금기를 이루어냈다고 말할 수 있다.
비운 했던 여자로서의 삶
엘리자베스의 여왕시절 화려했던 업적에 비해 여자로서의 엘리자베스의 삶도 알아보겠다. 그녀의 일생을 쭉 돌이켜보니 여자로서는 비운하게 살다가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을 보고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통치과정에서 주변국들의 청혼제의를 여러 차례 받긴 하였지만 모두 거절을 하며 결코 결혼은 하지 않았다.
연애까지는 허용하였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여자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단란한 가정을 꿈꾸었을 것이다. 자신이 불안정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과 화목한 가족생활을 원하고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여왕의 자리에 있고 왕권을 지켜야 하며 자신의 아버지와 레스터에 대한 배신과 결혼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에 남자가 아닌 자신의 조국인 영국과의 결혼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영국 역사상으로는 위대한 여왕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여자로서의 그녀의 삶은 같은 여자인 내가 보았을 때 많은 슬픔을 간직하며 살지 않았을까 싶다.
여자의 삶이 아닌 여왕의 삶을 택한 엘리자베스. 그 누구도 그녀의 선택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영국을 강대국 계열로 이끌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자신이 영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통해 그 시대에 영문학과 예술을 발전 시켰으며 르네상스 문예를 꽃피우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엘리자베스의 힘이었다고 생각된다.
맺음말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당시만 해도 군주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큰 장애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주위의 걱정스러운 시선과 편견을 다 불식시키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지금까지도 잉글랜드의 다른 어느 왕들보다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 라는 엘리자베스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사랑과 낭만을 쫒는 그저 한 소녀였던 그녀가 점차 강인한 군주로 자라나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고, 주위의 반대세력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 모으는 정치적인 능력들도 보여주었다.
자신을 향한 대중들의 걱정스러운 시선과 편견, 그리고 그것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사회적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녀의 말투나 결단력은 기존 왕들인 남자들과도 견주어 봐도 단연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며 판단을 내릴 땐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을 때 잉글랜드는 나라의 기강도 쇠퇴해졌고 국민들의 사기도 낮은 가난한 나라였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는 전쟁 중이었고 종교 탄압 중이었으며 국고도 바닥난 지경이었다. 그러던 나라가 엘리자베스의 치세에 자신감과 방향감각을 회복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왕실의 이익을 지키며 국교회를 안정시켰고 이로써 잉글랜드의 기반을 튼튼하고 안정적으로 다졌다. 그녀가 한 나라의 군주로서 보여준 신중함, 추진력, 지혜, 외교정책 그리고 리더십에 대해서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한때 온 세계에 식민지를 만들며 위상을 보여줬던 대영 제국의 신화의 기반이 어떻게 구축했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1601년 마지막 의회 연설 때 그 동안의 정책들을 요약해서 이야기 했다.
“ 나는 모든 명분에 대해 반드시 사전에 널리 홍보하고 나서 검토에 들어갔으며 정의와 진리를 바라보는 유일한 눈을 가지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기 위해 언제나 그 안건이 마치 아무 것도 없는 백지인 것처럼 여기고자 했습니다.” -1601년 12월 마지막 의회 연설 中 엘리자베스 1세 - |
의회 연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리더는 정당해야 하고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하며 후세의 평가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또한 편견과 불투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하며 궁극적인 결과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임을 이것이 훌륭한 지도자의 조건들임을 엘리자베스는 몸으로 보여줬다.
사람이 좋은 얘기만 듣고 살수만은 없듯이 엘리자베스 또한 여왕시절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나, 통치 말년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녀는 권력이 돈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손쉽고 빠른 수입을 올리는데 급급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점권을 설치하여 아첨하는 귀족들이나 상인들에게 팔았다. 이러한 정세에 국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증오심이 더욱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엘리자베스도 몸과 마음이 쇠퇴해졌을 때 신하들이 쉬어야 한다고 하자 엘리자베스는 ‘무엇을 해야 한다. 하는 것이 좋다. 라고 하는 말은 왕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라고 하며 죽는 순간까지 전제 군주로서의 품위를 흩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엘리자베스가 왜 권력을 위하여 잘못된 방법임을 알았음에도 귀족들과 상인들에게 팔았을 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여자였다. 전제 군주로서 서있는 자신의 자리가 항상 불안했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였어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그녀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왕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 군주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고 싶었을 것이고 훗날 후세의 국민들에게 부족함이 없었던 왕으로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를 업적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그녀의 삶과 가치관, 지키고자 했던 하나의 신념을 알고 나니 우리가 생각했던 엘리자베스는 실로 대단했고 쓸쓸했던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세계사이야기 | 영국이 사랑한 여왕! 엘리자베스 1세 1부
어린 소녀에서 여왕이 되기까지1. 어린 시절의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 1세(이하 엘리자베스로 칭함)는 안정되고 화목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축복이 아닌 실망과 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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