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세계사이야기 | 청나라를 몰락으로 이끈 악녀! 서태후 2부

곰고로곰 2024.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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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첨(광서황제)은 도광제의 제
7서자 순원친왕 혁현의 아들인데 이 때까지 부계로 황위를 잇던 청 황조가 그녀로 인해 모계 혈통으로 황위를 잇게 되었는데 서태후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광서황제는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의 변법파들과 자주 어울려다녔는데 그녀는 항상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광서황제는 더이상 계속되는 서태후의 폭정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서태후를 폐후시킬 것을 캉유웨이들과 은밀히 시행하려다 궁중에 유폐되었다. 또한 광서황제의 후궁 중 진비(珍妃)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언술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광서황제가 총애하는 후궁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보수파와 수구파들이 있었는데 서태후는 보수파였고, 진비는 수구파였던 것에 서태후는 진비를 싫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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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서구 8개의 연합국이 자금성을 칩입하여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서태후는 황후와 광서황제, 궁녀와 내관 2000명만을 데리고 시안으로 피난을 가려고 헸다. 광서황제의 후궁들은 울면서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했지만 서태후는 남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때 진비는 서태후의 발목을 잡아 광서황제의 곁에서 죽기를 청하지만 서태후는 진비의 머리채를 잡고 우물로 끌고 갔다. 지금도 자금성 내부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이 우물의 이름은 '진비정(珍妃井)'이라 하며 '진비가 살해당한 우물'이라는 표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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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진비의 손발을 잘라 우물에 처넣고 그 후 진비의 몸뚱이 자체를 우물 속에 내던져 버렸다. 이 사건에서 서태후의 잔인한 손속을 엿볼 수 있다. 진비를 잃고 상심한 광서황제는 1901년 화친이 성립되고 북경으로 다시 오게 되었는데 상심하던 그는 서태후로부터 유폐생활을 당하다 1908년 병으로 사망하였고, 서태후도 그가 죽은 지 하루 뒤에 죽었다. 위의 내용들은 떠도는 소문이라던가 전해져 오는 내용이라서 신빙성이 그렇게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태후의 잔인한 면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라서 흥미로웠다.

 

서태후가 정권을 가지고 청 황조를 손에 쥐고 흔들며 세웠던 업적들에 대해 알아보면 대략 양무운동과 의화단 운동에 대한 것이 있다. 먼저 양무운동 19세기 후반, 청나라 말기에 관료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군사중심의 근대화운동을 말한다. 유럽 근대기술의 도입으로 봉건체제를 유지, 보강하려 했던 청조의 자강운동이다. 양무(洋務)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청나라는 열강의 침략적인 아편전쟁, 애로호 사건 등으로 여지없이 약체를 드러냈으며,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봉건적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漢人) 출신 관료들이 근대적인 군사공업을 일으키는 한편, 장지동, 성선회 등은 관상합판사업을 크게 일으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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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들은 서구의 군사적 위협을 인식하고 기존의 중화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체서용'을 내세웠다. 그러나 양무운동의 추진 주체는 봉건관료 또는 매판관료세력이지만 그들은 청조의 전통적 관료와는 달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지방관료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무너져가는 청조의 통치조직을 재건하여 봉건왕조의 체제를 유지하려는데 주된 개혁목표를 두었고 이것은 양무운동의 최대 한계점으로 작용된다.

 

그런데, 양무파 관리들은 정부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였고 정부 내에서도 극히 일부의 진보적 관료를 제외하면 여전히 보수적, 수구적 관료가 중심이 되었다. 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이 지방에 뿌리를 두고 지역적 차원에서 이 운동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지방관이 바뀔 때마다 중단되기도 하고 지방관이 임지를 옮길 때 시설을 새로운 임지로 이전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 특히 양무기업 자체가 중요한 자금원이기 때문에 기업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양무운동은 이렇게 정책적인 면에서 비효율적이며 중앙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추진되지도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한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크게 패함으로써 양무운동의 한계성과 관료들의 부패함이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양무운동은 청나라를 개혁하기 위해 추진하기 위한 운동인데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꾀하려고 한 것으로 사상과 체제는 그대로 두고 과학기술만을 도입한 운동이었다. 서태후의 주장으로 그렇게 된 것인데 근대적으로는 변화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근대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술만을 받아들이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한 운동이 되었다. 또한 서태후의 섭정 때문에 권력유지를 위한 쪽으로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에 양무운동 추진에 일관성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쇠퇴해가는 청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서태후가 노력했다는 점은 업적으로 기릴만한 일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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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 운동 또는 의화단의 난은 청나라 말기 1899 11 2일부터 1901 9 7일까지 산둥지방, 화베이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일으킨 외세배척 운동이다. 산둥 지역에서는 일찍이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민간결사가 생겨나 반외세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1897년에 독일이 산둥성 일대를 점령하자, 의화권의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이 격화됐다. 의화권은 다른 민간 자위조직에 침투해 통합을 이루고는 스스로 '의화단'이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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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청멸양'을 구호로 내건 본격적인 의화단 운동은 독일 가톨릭교회의 선교활동이 왕성했던 산둥성의 북부 지역에서 1898 4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해 여름부터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어 가뭄 피해가 극심해지자, 많은 유민이 발생했는데 이들이 대거 의화단에 가입했다. 1899 12월에 새로 부임한 산동 순무(巡撫) 위안스카이(원세개)는 열강의 요구에 따라 의화단을 강력히 탄압했는데, 이것이 의화단 세력이 직예성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면서 의화단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의화단은 철도,교회,전선 등 모든 외래적인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를 학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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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1월에 서태후가 황제인 광서제를 폐위시키려고 했으나, 열강이 서태후의 의도를 간파하고 공동으로 압력을 가해 그 의도를 좌절시켰다. 이 때문에 청 정부의 수구파는 의화단의 배외운동을 고무해서 열강에 압력을 가하고자 했다. 1900 6월에 의화단이 베이징에 있는 외국 공관을 포위 공격하자 서태후는 그들을 의민(義民)으로 규정하고 열강에 선전포고했다. 이에 러시아, 일본, 독일, 영국,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8개국이 파병해서 베이징을 비롯해 양자강 이북 지역을 대부분 점령했다. 열강은 중국을 분할하지않고 보존하기로 결정하고 청 왕조와의 협상을 거쳐 1901 9 7일에 강화조약인 신축 조약(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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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은 '청이 제국주의 열강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동시에 열강의 중국 내 군대 주둔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반식민지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이것으로 보았을 때 서태후는 확실히 망해가는 청황조를 일으키기 위해 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위해 상당히 노력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서태후가 지지하는 운동마다 실패를 하니 그 당시 중국인들의 원망이 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서태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들이 나돌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이렇다라고 밝혀진 것은 사실 거의 없다. 또 서태후의 업적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마다 관점을 달리하는데 교육열이나 실업,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려 했다는 점, 청황조를 일으키기 위한 운동들에서는 업적을 평가받지만 그 밖의 일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악행이라는 점에서 관점이 달라진다. 그 후 중국에서 송경령, 송미령 같은 여성 정치인들이 많이 나왔지만 서태후만큼 큰 무대, 중국 전체에 영향을 끼친 여성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서태후는 참 외모에도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손톱하나하나도 다 다듬어서 그때 할 수 있는 가장 긴 손톱하며, 최고의 네일아트를 해가면서 피부관리를 위해 손도 한번 씻을 때 스팀타월을 동원해가며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지, 역시 태후쯤 되면 스케일이 다르긴 다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이나 그림을 봐도 솔직히 신경질적으로 생긴 깐깐한 할머니 같은 느낌도 있었긴 하지만 연지 같은 것도 하나하나 골라가며 쓸 정도로 외모를 가꾸고 70세가 넘게 산 것 치고는 나름 그 시대에 동안인 얼굴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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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당시 관료들은 서태후를 참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태후는 조금 외로웠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도 원래 위대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외로움? 고독함? 그런 게 일반적으로 있는 것 같은데 서태후 주위에는 보통 남자관료들뿐이니 여자로써의 서태후를 잘 이해해줄 사람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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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를 악녀라고 칭하는 사람들과 그 업적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요즘에는 서태후의 명예를 회복해주자는 움직임이 많다고 한다. 그 업적을 다시 검증해서 중국에서 청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던 여인이라는 불명예를 없애려는 것 같다. 그 생각에는 동의하기는 한데, 뭔가 어떻게 보면 중국의 술수라는 느낌도 강하게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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