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西太后, 1835.11.29~1908.11.15]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며, 동치제의 생모인 자희황태후. 동치제와 광서제의 섭정을 지냈고 광서제가 입헌파 캉유웨이와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무술정변을 일으켰다. 말년에는 신정을 실시했으나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성은 예흐나라, 혹은 옥란, 난아, 왕소겸으로 불리우는 여자인 서태후. 그녀의 출생설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최근에 밝혀진 사실으로는 1999년 중국 문화예술원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유기라는 교수의 논문에 서태후의 출생에 관한 정보가 있다. 논문에서는 "서태후의 유년시절의 이름은 왕소겸, 산시성 가난한 한인 농가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팔려가다 시피 북경으로 왔었고,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하다가 만주족 귀족 가문인 예흐나라 가문의 입양되어졌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일부 다른 학자들의 주장은 “서태후는 만인출생이고 혜흐나라 혜징은 북경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감독관이었다.” 라고 하고 있으며, “그의 부친이 산서성 감독관으로 부임을 받았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출생설으로 “아버지 혜징이 반란의 도당들과 어울려 지냈다는 누명을 써 삭탈관직을 당해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자 자신을 뒤쫒고 있는 무리들 때문에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는 것이 있다. 어린 서태후와 아버지가 정착하면서 살았던 곳이 산시성이라 하는데, 그 때문에 서태후는 산시성 지방의 민요를 잘 불렀다는 것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서태후의 진짜 출생에 대해서는 실제로 많이 알려진 바가 없고 아직도 중국 사학계에서는 서태후의 출생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떠도는 출생설들 중 실제 서태후가 만주어보다 한어를 더 잘했다고 하는 것, 서태후의 피에 한인의 피가 섞였다는 것은 실제 사실인 것 같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만주족의 청황조에서, 궁녀에서 황비까지 되었던 서태후의 어린 시절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가 그 사실의 근거라고 생각된다.
851년 자희는(서태후) 예히나라씨 중에서 궁녀로 선발되었고 1852년 17세에 입궁하여 귀인에 책봉되었다가 1855년 2월 의빈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황제의 승은을 입어 아들(동치황제)을 출산한 1856년 3월 의비가 되었다가 다음해에 의귀비에 책봉되었다. 그녀가 정권에 대한 욕심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이때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860년 영프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함풍황제를 따라서 열하(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몽진하였고, 다음 해 함풍황제가 병사함에 따라 6세의 어린 아들이 황위를 계승하게 되고 황후였던 니오후루(뉴호록)씨와 함께 황태후로 추대되어 휘호를 자희와 자안이라 하게 되었다. 황제의 황후인 자안태후가 동쪽채에 살았기에 동태후, 황비로 있던 자희태후가 서쪽채에 살았기에 서태후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실 서태후는 그녀의 업적보다 청 황조의 악녀로써 잘 알려져 있었다. 서태후는 탐욕이 많고 사치스러우며 무능했던 청나라 멸망의 주범으로 꼽히기도 할 정도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베일에 싸여진 서태후의 삶도 그 악명의 원인으로 볼 수 있겠지만 서태후 학살(25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짐)이나 성격이 괴팍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관이든 시중을 들던 시녀이든 망설임없이 죽였다고 전해지는 것, 심지어 아들까지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독하고 강단 있는 여자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 사실은 자안황후, 동태후가 죽을 때의 상황을 보더라도 잘 알 수있다.
6세의 어린 황제를 대신해 두 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사실상 모든 정치적 업무는 서태후 혼자서 하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함풍황제의 정식황후인 자안 태후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에따라 그녀는 모든 정무를 황제와 자희태후에게 맡기고 자신은 제일 마지막에 검열하는 일만 했다. 서태후는 아들이 황제로 즉위를 하자 자신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기던 파들을 소탕해 '신유정난'을 일으켰으며 자신의 뒷 후원자인 공친왕 혁흔을 정계로 불러들였다. 온화하고 인자한 자안태후 측에 더 많은 인재들이 따랐기 때문에 자희태후는 늘 자안태후를 좋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어린 황제를 데리고 두 태후와 문무백관들이 함풍황제의 위패가 놓은 사당으로 제를 올리러 갔는데 자희태후는 자안태후보다 한 발 앞서서 위패에 절을 했다. 그러자 심기가 불편해진 자안태후는 평소의 인자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내었고 궁녀들과 내관, 문무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크게 당한 자희태후는 자안태후를 바라보며 훗날 이 빚은 꼭 갚아주겠다고 이를 갈았다. 자안태후와 자희태후의 대립은 그 것만이 아니었다.
동치황제 18세의 나이로 혼인을 해야 할 상황이 오자 두 태후가 신부감을 선별했는데 동치황제는 동태후쪽이 주선한 신부를 황후로 맞아들이고, 생모인 서태후가 주선한 신부에게 '혜비'라는 후궁의 직급을 주었다. 동태후가 선별한 신부는 자색이 곱고 무엇보다 착했다고 하는데 서태후는 아들이 고른 황후가 마음에 들어 사소한 것 하나 트집을 잡아 황후를 꾸지람하기 일쑤였다. 흔히말하는 시집살이를 시켰던 것이다.
하루는 동태후의 건강이 좋지 않아 몸져눕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이 되었는데 서태후는 이 것이 기회다 싶어 자신이 부리는 궁녀와 짜고 동태후를 위하는 척 약사발을 들고 동태후의 침실로 향했다. 인자한 동태후는 자신을 찾아준 서태후를 반갑게 맞이했는데 서태후는 자신이 직접 다린 약이라 하며 약사발을 건냈다. 그 때 서태후는 졸도를 하며 쓰러졌고, 놀란 동태후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서태후의 궁녀가 의원이 사람의 피를 넣어 약을 지으면 효험이 더 크기 때문에 그 방법을 시행하다 그리 되었다고 하자 동태후는 그 말에 감동하여 건강을 회복했다.
그 후 동태후는 서태후를 불러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준 공으로 소원이 있으면 말해달라 했는데 서태후는 동태후가 가지고 있는 선황의 유언을 자신에게 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동태후는 크게 고민을 하더니 서태후가 자신을 생각해서 이렇게 까지 해 주는데 자신은 서태후를 의심한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황의 옥쇄가 찍힌 유언장을 주었고, 그것을 받은 서태후는 받은 즉시 불로 태워버리고 말았다. 선황의 유언이 없으니 자신을 폐하고 싶어도 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서태후는 그 때부터 180도로 사람이 변하여 동태후를 오만하게 대했는데, 동태후는 이미 선황의 유언이 담긴 서찰을 태워버려서 그녀를 폐할 수 없었기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었다. 그 후 동태후는 서태후가 보낸 선물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 후에도 아들(동치황제)의 아내들에게까지 관여하며 엄청난 시집살이를 행하는 서태후와 그로인한 스트레스로 황제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변복을 하고 기방을 들락거리다 마침내 병들어 죽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이것은 서태후의 악명을 높이는 계기 중 하나이다. 그 후 동치황제의 황후도 죄목을 달아 죽이고 3살밖에 안되는 조카인 광서황제를 자리에 올려놓고 수렴청정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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