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정복
1) 잉카문명의 멸망
아메리카 정복으로 사라진 고대제국이 몇 나라가 있다. 그중에 유명한 것이 잉카문명이다. 잉카제국(Imperio Inca)은 안데스문명 계통의 최후 선부민 국가로서 남미의 페루, 볼리비아(티타카카호 주변), 에쿠아돌을 중심으로 게추아(Quechua)족이 만든 나라이다. 전신인 쿠스코왕국은 1200년 무렵에 성립하여 1438년 제9대 파차쿠티크(Pachakutiq) 황제의 즉위로 국가로서 재편성을 거쳐 1532년 스페인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이어졌다. 최성기에는 80개의 민족 1600만의 인구를 거느리고 현재의 페루, 칠레의 북부, 아르헨티나 북서부, 콜롬비아 남부까지의 국토를 가진 나라였따. 국토는 100만 평방킬로미터(한반도의 약 5배)이고 남북의 거리는 4천킬로미터나 되는 대제국이었다. 수도는 쿠스코이다.
이렇게 컷던 제국이 1532년 일획천금을 꿈군 스페인군인인 피자로(Francisco Pizarro, 1470-1541년) 에 의해 멸망을 당한다. 그당시 사병을 이끌고 잉카제국의 북단에 있는 고을을 정찰하여 잉카제국의 병력이나 장비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일시 귀국하여 스페인 왕실의 정식허가를 받아서 페루의 총독 겸 사령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고을에서 살인, 약탈, 강간을 되풀이하면서 잉카의 수도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당시 잉카 국내에서는 왕권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무렵 1532년 7월 피자로는 스페인의 주유에 관하여 회담하고자 사자로서 카톨릭 바루테루테 신부와 현지통역을 황제 아타활파에게 보냈다. 바루베루테 신부는 통역을 통하여 황제와 그 백성의 기독교로의 개종을 요구하고 거부한다면 기독교와 스페인의 적으로 삼는다고 전했다. 아타활파는 <누구의 속국도 되지 않는다.>고 하여 스페인인의 주유를 거부하였다. 사자들을 돌아와서 그 상황을 알렸다. 피자로는 1532년 11월 16일 카하마르카(Cajamarca)에 이TSms 황제 아타활파군에 대하여 기습을 준비하였다.
피자로는 스페인 법에 따라 스페인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므로 선전포고를 한다고 선언하였다. 아타활파는 바루베루테 신부에게 그대들이 무슨 권위로 그런 말을 하느냐 하고 냉정하게 묻자 신부는 성서를 황제에게 권하고 이 속에 있는 말씀에 유래하는 권위라고 답하였다. 황제는 성서를 조사하여 <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냐?> 하고 묻고 성서를 땅에 내던졌다. 이 행동은 잉카에는 문자가 없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스페인으로 하여금 싸울 핑계를 주게 된 것이다. 신부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다.” 하는 소리에 맞추어 사격이 시작되어 2시간에 걸쳐 7천명 이상의 비무장 잉카 병사가 살해되었다. 황제 아타활파는 가마에서 끌어 내려져서 태양의 신전에 투옥되었다.
아타활파 황제는 스페인인들이 잉카제국을 지배하려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아서 그들이 찾고 있는 금은을 방 가득히 모아줄 터이니 석방해 달라고 제의하여 피자로는 이에 동의하였다. 피자로는 잉카의 백성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황제로 하여금 피자로가 잉카제국 전토의 총독이라는 선언이 필요해서였으나 석방할 의도는 없었고, 결국 간이 재판을 열고 황제가 우상숭배를 상습으로 하고 제 12대 황제는 화스카르를 살해했다는 죄로 처형하였다. 이리하여 1533년 잉카제국은 멸망하였다.
2) 아즈텍문명의 멸망
다른 유명한 제국은 아즈텍문명이다. 아즈텍제국을 멸망시킨건 코르테스 라는 인물이다. 본명은 페르난도 코르테스 모노로이 피자로 알타미라노 (1484-1547년)이며 1519년 병사 508명과 말 16필을 11척의 배에 나누어타고 독자적으로 유카탄반도에 상륙했다. 그는 이곳에서 베라쿠르즈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유카탄반도의 마야족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부족들을 점령해나갔다. 말이나 대포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인디오들은 공포 속에서 고르테스에게 항복하였다. 코르테스는 원주민을 통해 황금으로 가득찬 아스텍왕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아즈텍의 왕은 고르테스 일행의 행색을 보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착각하였고 그들을 환대하였다. 코르테스는 아즈텍 왕국을 기습공격하여 왕인 몬테수마 2세를 인질로 잡고 에스파냐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케 하였다. 그리고 아즈텍의 우상을 파괴하고 왕국의 실력자들을 살해하였으며 그들의 왕국인 테노치티틀란에 교회를 세웠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임무를 넘어선 반란으로 간주되어 쿠바에서 원정군이 왔으나 코르테스는 이들을 격파하였다. 그 동안에 아즈텍에서는 인디오의 반란이 일어나 많은 에스파냐 정복자들과 전투를 벌였으며 이때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학살당하였다. 후일 에스파냐 인들은 이것을 슬픔의 밤 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9월 유럽의 정복자들에 의해 옮겨진 천연두가 창궐하자 아즈텍 원주민들이 죽어나갔고 코르테스는 철저한 파괴와 유혈 가운데 테노치틀란을 탈환하였따. 인구 500만명의 왕국이 에스파냐 600여명의 정복자에게 완전하게 점령되었다. 1522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테노치틀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식민지 정책
신대륙의 발견과 정복하는 과정은 콜럼버스가 독자적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국왕으로부터 모종의 위임을 받았고, 자신이 정복한 땅에 대해서는 많은 권리를 약속 받았다. 하지만 국왕은 신대륙의 통치권이 콜럼버스에게 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정복 사업이 끝나고 식민지 건설이 시작되면서 국왕은 콜럼버스를 대신하기 위해 국왕 직속의 행정관과 재판관, 그리고 재정권을 임명했다.
식민지 건설의 초기에는 농업분야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오로지 금을 발견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밀과 그 밖에 농작물은 본국에서 수입해 왔는데 신대륙에서는 점자 곡물의 부족은 경작을 필요로하게 되었다. 한편 유럽은 신대륙으로 부터 옥수수, 담배, 사탕 및 염료등을 수입하고, 곡물, 포도, 올리브, 가축류등을 수출했다. 이 당시 가장 발달된 산업은 면직 산업이었다. 그리고 원래의 주 목적이 금과 은의 발견이었기 때문에 후에는 약탈이 아니라 직접 광산을 개발하게 되었다.
상업은 스페인과 유럽의 번영이 달려있었기 때문에 중요하였다. 스페인은 17세기 초까지 신대륙에 주요한 물품을 공급하고, 신대륙에서 은의 유입으로 인한 수익은 약 2~4배에 달했다. 이들과의 교역은 스페인과 유럽의 재정에 큰 소득원이 되었다.
아메리카는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국왕이 죽고난 후 에스파냐 군주국에 통합되어 통일 왕국이 되었다. 따라서 아메리카는 에스파냐의 대외 정책 수행에 필요한 주요 자금원이 되었다. 그리고 아메리카의 모든 정치 및 행정 기구는 에스파냐식으로 통일되었다.
무역관-독점 교역 기구로서 아메리카와의 모든 교역을 통제했다. 그 밖에도 과학 연구 센터에서 선원의 교육과 지도 및 항해기구를 제작했다.
인디아스 자문 위원회 - 1524년 카를로스 5세 때 왕실에 설치한 것으로 무역관보다 우위에 있었고, 사법 기구로 아메리카 사태를 다루는 최고 재판소가 있었다. 인디아스 최고 자문 위원회는 입법 기능과 심의 등 중요 업무를 취급하였고, 의장과 대학의 자문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부왕청 - 에스파냐의 가톨릭 왕들 때부터 있던 제도를 아메리카에 이식한 것으로 부왕의 임기는 종신제에서 3년으로 바뀌고, 후에 5년으로 연장되었다. 부왕은 임지에서 교역 등의 사업 활돌이 급지되고, 이임 때 후임자에게 상황 설명과 직무 인계 및 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했다. 아메리카 부왕은 절대 군주 왕정의 직접적인 대표였다. 부왕의 통치권은 절대적이 아니고, 실권은 총독 법원장 등에 달려있었다.
2) 총독 - 왕에 의하여 3 ~ 8년 임기로 임명되었다. 직권은 행정권, 사법권 및 왕실의 사전 승인 하에 입법권까지 장악했다. 그들은 관할 지역에서 군사 작전권을 수행함으로써 총사령관 칭호까지 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후일 위험한 변방의 국경 방어 임무를 위임받았다.
3) 법원 - 사법 행정 기구로 부왕청보다 하위에 속하고, 인디아스 사법 행정의 기본단위로서 왕권의 절대 권력을 보장했다. 아메리카에는 14개의 법원이 있었는데 이들은 관할 지역의 사법권 외에도 정부, 재정, 전투, 왕실 후원회 등 부왕청의 업무를 분담했다.
4) 시 의회 - 시 의회는 일찍부터 구성되고, 도시 자문 위원회의 위원은 주민들이 선출했다. 주요 도시에는 12명의 의원이 있었고, 다른 곳에는 6명이 있었다.
5) 교회와 왕실 후원회 -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통치에서 왕실 후원회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6) 인디아스 법률 - 해외에서 스페인의 식민 조직 활동은 법령 제정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당시 왕실, 인디아스 자문 위원회, 부왕청, 법원 등은 칙령, 명령, 조령 등을 공포했었다. 그 중 일부는 완전히 식민지에서 제정되었는데, 대부분 일반적인 것이었다. 펠리페 2세* 집권 때 인디아스 자문 위원회는 인디아스 법령들을 발췌하기 시작하여 1635년 9권의 책에 10,000개의 법령을 수록했었다. 그 후 이 법령은 인디아스 자문관인 솔로르사노 페레이라 등 여러 인사가 수정하여 1680년에 6377개의 법령을 9권 218장으로 재정비했다. 모든 법령은 주로 카스티야의 법령을 모체로 하여 제정 연도별로 수록되고, 원주민법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식민사에서 어느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입법적 기념물이었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에스파냐의 필립 2세를 뜻한다. 필리핀이 이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것이다.
신대륙 발견의 영향
1. 유럽
1) 정치적
신대륙의 발견은 유럽의 해양 국가들,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중부 유럽의 국가들을 제압하고 세계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150여 년 간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에스파냐 펠리페 2세의 “나의 제국에는 해질 날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이후 펠리페 2세의 영토는 아메리카의 모든 영토와 태평양,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일부 지역 등 전세계에 분포 하였다.
2)경제적
1. 이 당시 유럽의 무역은 지중해무역이었지만 신대륙이 발견되고 난 이후 대서양으로 옮겨가게 된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메리카 간의 교역이 점차 활발해졌다. 신대륙에서의 수탈한 상품과 신대륙으로 보내지는 상품의 교역은 점차 커져갔다.
2. 세계무역의 급증과 농업의 발전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신대륙에서만 나는 농작물의 종자를 유럽으로 가지고와 농업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이후 유럽의 인구 증가를 가지고 오게 된다.
3. 신대륙의 많은 양의 금과 은이 유입되면서 초기 유럽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50여 년 간 신대륙으로 부터 유입된 은의 양이 1천6백80만 kg에 달했다. 유럽이 초기에 자본을 축적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3) 종교적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의 식민지 정책중의 하나가 바로 종교정책이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교는 가톨릭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의 국가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였기 때문에 현재에도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을 믿고 있다.
4)세계의 서구화
유럽의 세계지배가 확실해 지면서, 유럽 중심의 시각이 전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세계지도를 보면 유럽이 다른지역보다 실제 크기에 비해 훨씬 크게 그려져 있다.
유럽은 신대륙의 희생으로 발전을 위한 자본 축적이 가능했고, 이후 세계의 다른대륙들을 압도 할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서구 기독교 문명을 전세계에 전파하는 과정에서 타 대륙의문명을 비문명으로 치부하고 이를 파괴했다. 그 결과 19세기에 전 세계의 서구화가 진행되었다.
2. 아메리카
1). 인디오의 인구 감소
아메리카 대륙이 콜럼버스에게 발견되기 전 이 땅의 주인은 인디오들이었다. 아파치 족, 보로로 족, 보또꾸도 족등 여러종족의 원주민 인디오들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1500년경에는 대략 7~8천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발견 후 약 100년이 지난 무렵인 1600년 경에는 인디오의 숫자가 1/10로 줄어들었다. 그 당시 식민지 과정에서의 저항과 학살, 그리고 노동착취로 인해 인구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터무니 없는 많은 숫자의 인디오가 죽었다. 과연 이것이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물론 이러한 이유도 인디오가 죽은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그 당시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질병들 때문이었다. 유럽의 치명적인 질병들 뿐만 아니라 가벼운 질병까지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상당히 치명적인 질병이 되었다.
스페인 인들이 아메리카를 정복 후 한 인디언은 “그 시절에는 질병이란 없었다. 뼈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없었다. 고열로 신음하는 사람도 없었다. 천연두를 앓는 사람도 없었다. 가슴이 타는 듯 아프다는 사람도 없었다. 배가 아프다는 사람도 없었다. 결핵을 앓는 사람도 없었다.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 시절 인간의 삶은 정돈되어 있었다. 외지인들이 이곳에 오면서 이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라고 하였다. 물론 신대륙 발견 과정에서 유럽인들이 일부러 가져왔다고 보지는 않지만, 이 당시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각 대륙의 문명의 접촉이 없었다는 말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원인이 어찌 되었든지 간에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질병을 가지고 온 유럽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2) 인종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후 많은 유럽의 백인들과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이 곳으로 이주를 해왔다. 당연히 여러 인종이 섞여 살게 되면서 메르티소*들이 생겨 날 수 밖에 없었지만, 인디오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면서 현재 라틴아메리카에는 원래의 주인인 인디오들은 찾아 볼수 없고, 다른 인종들이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이 아닌 혼혈인이 더 많다고 생각해 보면 결코 가볍게 접근할 수만은 없는 문제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인디오의 문명, 문화, 심지어 동족들까지 죽으면서 바뀐 문제이다.
*메르티소 : 스페인어로 혼혈인이라는 뜻이다. 현재 중남미(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인종이다. 백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인을 메르티소, 백인과 흑인 사이의 혼혈인을 물라토, 인디오와 흑인사이의 혼혈인을 잠보라고 한다. 이들을 통칭하여 그냥 메르티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의 의의
사실 콜럼버스보다 먼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땅을 밟은 사람이 있었다. 콜럼버스보다 500여년 전 에릭이란 인물이 이끌던 바이킹족들이 법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흰 눈이 덮여 있는 땅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린랜드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이 바이킹족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식민지 건설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해서 식민지 건설을 이룩하였고, 이것을 통해 유럽은 자본주의 시대를 앞당길 수 있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항해의 목적은 인도를 찾아 많은 금을 발견 하는 것이었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죽을때 까지 신대륙을 인도라고 믿었으며, 그 땅을 에스파냐 두 국왕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 것 밖에는 역사적으로 기여한 것은 없다.
유럽의 입장에서는 콜럼버스라는 인물이 매우 역사적이고, 의미 있는 인물일지 모르지만 인디오들에게는 이들은 문명의 파괴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라틴아메리카라는 명칭도 ‘라틴족이 지배한 아메리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시절을 가지고 다른 국가에서 우리를 ‘일본아시아’라고 부르는것과 뭐가 다를게 있을까? 한 개의 대륙의 문화를 파괴시킨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의 입장으로는 자랑스러운 역사적일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문명이 사라진 고통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콜럼버스의 인도를 찾아 헤매던 도전정신과 아메리카 대륙을 찾은 그의 업적은 훌륭하나, 아메리카 대륙이 흘린 피와 눈물은 쉽게 잊혀져서는 안될 것이다. 위대한 인물이지만 한 대륙의 문명을 파괴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업적을 상황의 맞게 바라 볼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참고 문헌
1. 송기도 강준만 지음, 『콜롬버스에서 후지모리까지』,서울 마포구: 개마고원, 1996년, p48
2.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저, 이종훈 옮김, 『콜럼버스 항해록』, 서해문집, 2004, p6
3. 앨프리드 W. 크로스비 지음, 김기윤 옮김,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 서울시 마포구: 2006년, p81
세계사이야기 | 콜럼버스의 항해와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정 1부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의 배경중세 시대의 유럽은 카톨릭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교황의 권위는 각 궁의 왕들의 권위를 뛰어 넘었고 성직자라는 직업은 특권층이었다. 이 시절 카톨릭의 성지
greenchem.tistory.com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정복과정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정복과정
culstory.blogspot.com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해 주요 사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해 주요 사건
culstory.blogspot.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