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세계사이야기 | 콜럼버스의 항해와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정 1부

곰고로곰 2024.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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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신대륙 발견의 배경

중세 시대의 유럽은 카톨릭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교황의 권위는 각 궁의 왕들의 권위를 뛰어 넘었고 성직자라는 직업은 특권층이었다. 이 시절 카톨릭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이슬람 국가인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점령 당하게 된다. 이에 성지를 되찾자는 구호 아래 유럽의 각 국은 병력을 차출하여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게 되는데 이 전쟁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한다. 십자군 전쟁은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카톨릭 연합군은 패배하고 이 패배로 인하여 서아시아 지역이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감으로써 육로로 아시아와 교역하던 유럽은 교역의 길이 막히게 된다. 아시아와의 교역을 위해서는 신항로의 개척이 필요하게 되었다. 때마침 지구가 둥글다는 학설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지구의 정확한 크기를 몰랐던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것보다는 서쪽으로 가는 것이 더 빨리 아시아로 도착할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서쪽으로 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콜럼버스가 시대적으로 신항로 개척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게 된것은 역사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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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항해와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정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Cristoforo Colombo)는 1451~1506에 살았으며, 에스퍄나 인은 아니며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난 평민이었다. 그는 1451년 8월과 10월 사이에 이탈리아 남서 해안의 항구 도시에서 도미니코 콜럼버스와 수산나 디 폰타나로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부에게는 두 아들 바르톨로메오와 지아코모가 있었는데, 이들은 형을 도와 같이 탐험을 했다. 

 

콜럼버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성장해 아버지의 직업인 양모 직공 일을 도왔다는 정도만 남아있다. 15세기 제노바는 조선업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주요 항구였기에, 이곳에서 자란 콜럼버스는 자연스럽게 바다를 보면서 소년의 꿈을 키웠고,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거래를 눈으로 보면서 무역 항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대 이탈리아 상인들과 동방 상인들의 거래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한 그는 어릴 때부터 상인 밑에서 배를 탔다. 1476년에 포르투갈로 건너가 지도제작에 관한 공부를 햇다. 1480년부터 1482년 사이에 대서양의 카나리아제도와 아조레스제도를 항해했으며, 서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포르투갈의 요새도 방문했다.

 

그리고 1492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 중국, 일본으로 가는 항로를 찾고자 했던 포르투갈인과 달리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면 더 쉽게 아시아로 갈수 있다고 확신하여 에스파냐의 이사벨 1세(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과 같이)를 설득하여 8월 3일에 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니냐호 등 탐험선 세 척을 이끌고 팔로스항을 출발하였다.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에 이사벨 1세가 죽었고, 그는 페르난도 5세에게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가난한 말년을 보내다가 1506년에 에스파냐에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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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기까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51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도미니코 콜럼버스와 어머니 수산나 데 폰타나로사는 양모 조직공이었다. 그는 제노바와 제노바 서쪽의 항구도시 사보나에서 20대 초반까지 보냈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아버지의 사업을 위해 노력했으나 1473년 부터는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노바에서 선원으로 첫발을 내딛었으나 1477년 리스본으로 옮겨 그곳에 정착했다. 그가 리스본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당시 리스본은 항해에 뜻을 둔 이들이 모여드는 항구도시였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동생 바르톨로메와 지도를 제작해 판매하는 일을 하며 때때로 항해에 참여하곤 했다.

 

1479년 명문가 출신 펠리파 페레스트렐로 에 모니즈와 결혼하고, 펠리파와 그 가족들은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의 권력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펠리파는 장남 디에고를 낳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즈음 콜럼버스는 파올로 토스카넬리의 저술에 큰 영향을 받고, 특히 왕실 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서신을 보게 된 콜럼버스는 더욱 강력한 자극을 받았다. 1484년경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를 만나 자신의 계획을 밝혔으나, 주앙 2세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곧 아들 디에고와 함께 비밀리에 에스파냐로 떠났다.

 

에스파냐의 팔로스 항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라 라비다 수도원에서 기거하게 되었는데 원장 후안 페레스 신부는 그의 계획을 듣고는 콜럼버스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 외에도 안토니오 마르체나 신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메디나 셀리 공작 등의 도움을 받아, 1486년 6월 드디어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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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를 나선 이유?

콜롬버스가 ‘동양’을 찾아 떠난 이유는 기존의 무역 항로에서 벗어나 동양의 진귀한 물품들을 들여올 새로운 무역 항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당대 유럽인들에게 가장 먼 땅은 지금의 중국인 카다이, 인도, 그리고 일본인 지팡구였다. 유럽인들에게 이곳은 비단과 향료와 같은 이국적인 상품들이 넘쳐나는 곳이며, 황금과 보물이 넘쳐나는 곳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인들의 육식 식탁에 반드시 필요한 향료는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 상인들과 거래가 되고 있었다. 

 

실크로드는 이동 경로가 멀고 험한 탓에 동양의 물품들은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낙타 대신에 배를 타고 쏜살같이 바다를 가로질러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콜럼버스도 이들 중 하나였다. 또한 1478년에 결혼한 아내의 장인이 선장이였고 항해 지도와 선장 일지, 지도 등을 장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유산은 대서양의 바람과 해류에 관한 소중한 기록들로 그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귀중한 것이었다. 지도에 대해서 연구하던 콜롬버스가 서쪽으로 가면 인도에 도착할수있을꺼라고 확신하게 되는 증거가 된다.

 

또한 이사벨 1세와의 약속에서 그는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인 ‘돈’과 제독의 계급을 요구했다. 더불어 새로 발견된 땅에서 얻은 수입의 10%를 원했고, 모든 무역 거래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것이었다.

 

 

항해 과정

1492년 8월 3일에 콜럼버스가 이끄는 3척의 탐험선이 팔로스항을 출발하였다. 그리곤 북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항해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배를 타고 가도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콜롬버스가 인도를 갈수있다고 믿게 만들었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토대로 계산했을때의 거리는 실제의 거리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9월 24일의 항해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육지가 나타날 조짐이 보이는 데도 현재 나와 선원들의 관계는 심각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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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달이 되자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가자는 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 콜럼버스는 말했다.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잘라도 좋소. 그럼 여러분 모두 편안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요.” 콜럼버스는 이 항해에 목숨을 걸었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에 드디어 육지가 보였다. 육지를 첫 발견한 사람은 핀타호에 타고 있던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였다. 그가 “육지가 보인다”라고 외친 순간은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그는 오랜 고생의 항해 끝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諸島)의 와틀링섬(추정)을 발견하였다. 이어,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콜롬버스는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생각을 하였고, 섬에 살던 사람들을 인도인(인디언)이라고 불렀다. 그리곤 히스파니올라에 39명의 선원을 남기고 작은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리곤 의기양양하게 몇 명의 인디언을 대리고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2번째 항해에는 17척의 배와 1200명으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콜롬버스가 거짓말로 말한 금은보화를 찾으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시 도착한 히스파니올라엔 남겨두웠던 식민자 39명은 이미 반란으로 몰살을 당해있었다. 3번째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와 오리노코 하구(河口)를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4회 항해(1502∼1504)의 허가는 바스쿠 다 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항해과정 요약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90명의 선원을 데리고 스페인 남해안의 팔로스항을 출항하여 카나리아에 기항한 뒤 대서양을 가로 질러 서쪽으로 항해하였다. 항해가 길어질 수록 선원들의 반란이 심해졌지만, 신대륙을 발견할수 있다는 희망을 주면서 10월 28일 드디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

 

2차 항해는 뚜렷한 성과는 없었고, 1차 항해에서 발견한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되돌아 오게 된다.

 

3차 항해에서는 이전의 항로보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1498년 7월에 서인도 제도의 트리니다드 섬에 도착하였다. 이후 마가리타 섬을 발견하고 되돌아 오게 된다.

 

4차 항해에서는 도미니가섬 남쪽의 마르티니크섬을 발견한후에 온두라스, 니카라구아, 코스타리카 연안을 탐사하지만 인도양으로 통하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결과 요약

콜롬버스의 항해의 결과로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식민지의 개척이다. 처음으로 발견한 섬에서 살던 인디언들은 작은 창하나만 가진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허나 39명의 식민자들과 2차 항해시에 금을 캐러왔던 1200명들의 사람들에 의해서 노예화가 되었고 본격적으로 노예사냥을 시작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콜럼버스는 1495년 초에 타이노 족 5백 명을 4척의 선박에 실어 유럽에 노예로 팔기도 하였다. 그는 노예제도도 만들어 14세 이상의 원주민 남자들은 모두 석 달에 한 번씩 금을 바치게 하였고, 원주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의 질병인 천연두와 같은 바이러스가 퍼져서 50년 동안 수십만 명에 달하는 카리브해 원주민들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담배나 감자등 유럽에서 찾을 수 없는 새로운 물건들을 유럽으로 가지고 오는 역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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