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가우디의 생애와 작품
평생 독신으로 지낸 가우디는 1852년 지중해 연안 카탈루냐 지방의 레우스 시에서 가난한 구리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건축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가우디는 1863년 중등과정을 마치고 본격적인 건축 공부를 위해 1863년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4년간의 에비과정을 마친 뒤 1874년 시립 건축학교에 입학했다. 가우디의 학교관계 서류와 시험에 관한 것은 건축학교 문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자료를 살펴보면 가우디의 학습과정을 알 수 있다.
그는 많은 시험과 과제물 제출에서 한번에 합격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가 과제물로 제출한 도면들은 여러 교수들에게 논란의 대상이었다. 또한 가우디는 졸업 작품으로 대학강당 설계안을 제출했었다. 심사위원장은 학장인 엘리아스 로헨트였는데 8년 전에 이미 대학강당을 설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우디가 제출한 설계안은 로헨트와 전혀 달랐다. 독창성과 대담함은 심사위원회를 늘 불쾌하게 했고, 그래서 그의 설계안은 가장 낮은 점수로 통과했다. 그러나 1878년 3월, 학장 로헨트는 안토니 가우디에게 건축사 자격을 수여해야 했다.
그는 대단한 독서광으로 건축학교 수업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지만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많은 책들을 섭렵했다. 가우디는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그 당시 유명한 건축가들 밑에서 일하였다. 비록 생활비를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가우디의 활동은 졸업 전부터 그를 건축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했다.
1883년은 가우디가 건축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인정받은 해였다. 그 해에 가우디는 그의 작품 목록에서 지울 수 없는 세 건의 건축의뢰를 받았다. 길에 핀 꽃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저택 카사 바센스(1878~1888)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인테리어에는 가우디만의 독창성을 발휘했다. 돈 많은 독신자를 위한 저택 '엘 카프리쵸‘(1883~1885)와 세 번째 대작은 무데하르 양식을 대표하는 에우세비오의 구엘의 별장(1884~1887)이다.
가우디는 돌, 벽돌, 타피알벽과 회반죽을 현명하게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아치와 혁명적인 쌍곡선 혹은 포물선의 형태를 한 보베다 타비카다를 솜씨 좋게 사용하고 있다. 기하학적이며 다채로운 장식과 동시에 고대 신화의 상징은 특히 구엘의 주의를 끌었다. 카사 비센스, 엘 카프리쵸 그리고 구엘 별장에 의해 가우디는 자신의 개성을 완전히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
가우디에게 결정적인 평가를 안겨 준 구엘 궁전(1886~1889)은 바르셀로나에서 동시대의 건물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포물선 아치 입구, 1층의 아치천장, 지하 마굿간 등은 그것만으로도 특수한 구조이지만 장식으로 가득한 2층 방들도 독창적이다. 천장은 대들보가 없는 구조로 설계했다. 구엘 저택을 짓고 있을 때 가우디는 아스토르가 주교관(1887년) 설계 의뢰를 받았다. 가우디는 아스토로가의 작품에서 두 가지의 재료와 특수한 사용법을 남겨두었다. 비엘소에서 캐낸 화강암은 벽과 원기둥에 사용했다. 그리고 완전하게 다듬지 않은 조각품에도 사용했다. 이 화강암의 경도와 조직이 세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둥근 아치에는 암갈색의 유약을 바른 벽돌을 사용했다.
성녀 테레사 학원(1888~1889)은 가우디에게 증축을 위임했다. 기초부터 전면 수정해야 했다. 가우디는 건물을 설계하는데 성녀 테레사의 가르침과 이전의 소녀교육에서 금지되었던 과학과 인문학 분야와 진보적인 근대 교육의 모든 개념을 적용했다.
아스트로가 주교관 건설을 진행하고 있을 때 의뢰받은 보티네스 저택(1892~1893)은 가우디의 개성과 대담성이 돋보이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개인 건축물로는 전례가 없었다. 더군다나 고딕 양식의 극치로 ‘레온의 아름다움’이라고 불려졌던 레온 대성당 근처에 네오고딕 양식을 채용한 것은 가우디만이 할 수 있는 대담성이었다.
한 사람의 상인이 뛰어난 재능을 소유한 건축가의 힘을 빌려 중세의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카탈루냐 부흥운동과 건축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가우디의 소망이 담겨있는 벨레스구아르드 저택(1900~1909년)과 고급 건축물을 세워 부자들이 이용하는 장소였던 구엘공원(1900~1914년)은 원숙기에 접어든 가우디의 대작이었다.
1904년은 가우디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해였다. 이 때에 가장 중요한 작품은 돈 호세 바트료 카사노바스의 집이다. 카사 바트요(1904~1906년)는 쾌활한 낙천주의자 가우디의 시적 양식의 정점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그는 장대하고 드라마틱한 카사 밀라(1906~1910)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카사 밀라는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사 바트료와는 매우 대조적인 서사<카사밀라의 앞면> 시를 쓰고 있다. 카사 밀라는 가우디의 건축양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것 외에 마리아를 찬양하는 아름다운 노래이기도 하다.
1917년 건설이 중단된 콜로니아 구엘 성지 교회(1908~1917년)는 쌍곡포물선의 형태를 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유별난 구조는 총알을 담은 작은 주머니를 매단 줄에 기초한 계산법에서 착안되었다. 줄에 주머니의 중력을 실어 줄이 늘어진 형태를 거꾸로 보면 주머니의 무게에 해당하는 하중을 받는 아치의 압력선이 그려지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는 교회건축에 있어 최고의 형태를 얻었고 사진 상으로 빛나는 구조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빌랴르와 마르토렐의 의견차로 인해 가우디가 공사감독으로 취임하게된 이 사건은 젊은 건축가에게 있어 둘도 없는 기회였다. 가우디는 이 교회에 전 생애를 바쳤으며 청년시절 반교권주의자였던 그를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만들었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1883~1926년)속죄의 교회이다. 그가 살아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죽기 전에 당시 교회 전체의 모형을 만들었고 교회의 모든 요소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을 설명해 두었다. 하지만 구조적인 기술면에서는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건축분야는 변화라는 것이 있어서 자신 이루지 못한 것을 후임자들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6년 6월 7일 오후 5시 30분, 늘 산책하던 길을 나섰던 가우디는 6시쯤 바이렌 거리에 도착해서 코르테스 거리를 건너려고 했다. 당시 그랑비아(대로)라고 아렬진 코르테스 거리는 4차선이 었고 길 양쪽으로 가로수가 심어진 보도가 있었다. 차선 중앙에는 채색된 철제 원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이 거리는 바르셀로나 전차회사의 ‘붉은 십자가’라고 불리던 30번 노면전차가 달리고 있었다. 1926년 6월7일 월요일 오후 6시 5분, 안토니 가우디는 헤로나 거리와 바이렌 거리 사이에서 그랑 비아를 넘으려고 했다.
보도, 차도, 가로수길, 전차 하행선을 넘어 상행선을 지나려고 할 때 한 대의 전차가 헤로나 거리쪽에서 다가왔다. 가우디는 그것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그때 테투앙 광장에서 가탈루냐 광장으로 향하는 하행선 전차에 치여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묘지엔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 레우스 출신. 향년 74세,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대 예술가이며 경이로운 본 교회의 건축가. 1926년 6월 10일, 바르셀로나에서 생을 마감하다. 이 위대한 인간의 부활을 기다리며 편히 잠들길. 이라고 적혀 있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들
1. 구엘 궁전
구엘궁전은 가우디의 최초의 대작으로, 그가 1883년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에 성당에만 전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설계도의 기본 윤곽도 아직은 결정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의 진척이 매우 느렸고 빌라의 이전 스케치가 있었다.
구엘은 바르셀로나의 노우 데 라 람블라 거리에 자기가 사업에서 성공한 것에 합당한 저택을 세우고 싶었다. 젊은 건축가 가우디에게는 아주 독창적인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궁전에는 마굿간용 지하실, 현관과 주차장이 있는 1층 건물, 사무실용 골방, 거실과 응접실이 있는 층, 내실, 사과나무가 있는 파티오 테라스 위의 식당 등이 있었다. 1층에는 방과 화장실이 있고 2층에는 하인들이 기거하였다. 이 궁전은 방금 설명한 대로 배치되어 있으나 공간 할애는 매우 자유롭고 기능적이면서 장식적인 면을 고려하여 이루어졌다. 마굿간은 기둥이 있는 숲이 있으며 진흙으로 된 기둥과 버섯모양의 기둥머리가 있으며 막혀진 조그마한 둥근 천장이 있었다. 건물의 정면은 가라프에서 가져온 돌로 지어졌다. 일층에는 연단이 있고, 두 개의 큰 수곡선의 아치가 있어서 문을 형성하고 있다. 이 문들은 아주 능숙한 금속 벽포로 된 횡사처럼 보이는 특이한 창격자로 닫혀져 있다.
지하층에는 철과 돌을 벼리는 곳이 있으며 금속같은 물질과 장식이 되어있다. 이 장식은 비올레 르 뒤크의 이론을 적용, 구조철에 장식하는 가능성에 호응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지만, 물론 재료가 아니라 건축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게다가 비잔틴 양식의 진흙으로 된 매우 평평한 둥근 천정이 있는데 이것은 고체절단법의 모범이 되고 있다. 큰 홀은 2층 높이 정도로서 두 개의 원형 지붕으로 덮혀져 있다. 내부에 있는 포물선형의 원형 지붕과 원추형의 형태가 위쪽에 있으며, 테라스쪽으로 향해 있고, 방위반과 십자가로 마무리 되어 있다. 원추형의 몸체는 조그마한 채광창에 의해 뚫려진 돌로 덮혀있다. 따라서 건물의 둥근 천장에 별모양의 공간이 생겨 이곳으로 매일 응접실까지 빛이 들어 올 수 있었다.
응접실은 오르간과 문이 있는 조그만 예배당이 있어서 다용도로 쓰였다. 이곳은 시인들의 동호회나 음악 악보의 데뷔장소나 여러 사회 모임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노우 거리로 나있는 응접실은 삼나무와 유카리나무로 된 아름다운 격천장이 있었고, 여러 가지 장식 효과를 주기위해 치장한 나선체 모양의 철과 조화를 잘 이루었다. 게다가 구조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어 위층의 포석을 지탱하고 있다. 그 부분에는 주조한 도리가 없었다. 금속으로 만든 도리로 일종의 발코니 형태가 있다. 이 형태는 궁전이 1882년부터 1886년까지 지은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된 것으로 가우디는 건축 효과성과 뛰어난 역학적인 기능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발코니에는 원추형의 꼭대기 말고도 18개의 화로, 굴뚝의 갓이 있는 환풍기, 다양한 모양의 몸체 기둥이 있는데 타일을 박았거나 진흙이나 돌로 만들었다. 이것은 가우디의 상상력이 너무 지나친 건축형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는 계속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에 만족하였다.
구엘 궁전은 건물의 목적이나 기능을 감안할 때, 아마도 바르셀로나에 마지막으로 건설된 특이한 건물에 해당된다. 문예 부흥기의 팔라찌의 특징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건물의 방 배치나 여백 공간 등의 활용은 이태리 건물의 모델과는 다른 점이다. 가라프의 여러 색깔의 돌로 장식한 점과 철 또는 나무로 된 여러 가지 건축물로 구조 등이 구조적으로나 장식적인 측면에서 서로 보완이되고 있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단히 비현실적인 면을 보이는 이 저택은 현재 박물관으로 지정이 되었고, 1984년 유네스코 기관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2. 사그라다 파밀리에
신고딕 성가족 성당의 ‘속죄의 소성당’ 은 바르셀로나 역사의 전모를 볼 수 있는 표본이다. 이것은 가우디 예술 작품 활동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이 공사는 오늘날 중요한 도전임과 동시에 앞으로 준공될 때까지 큰 난제로 남아있다. 아마도 가우디 생각의 실험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감히 비교가 안되는 작품이다. 건축가 빌라가 한 첫 번째 설계도는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야심작이었고 아마도 교구 건축가에 의해 설계된 것 중에서는 가장 웅장한 규모의 작품이었다.
1883년 빌라 대신에 가우디가 성가족 성당 건설을 맡게 되었을 때, 이미 납골당의 기둥 공사는 거의 반 정도 진행되어 있었다. 전체적인 건축 계획의 기본 생각은 그대로 지속되었지만, 가우디로 교체된 것은 건축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계의 규모가 웅장하기도 했고 만성적인 자금 부족으로 공사는 많은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공사가 천천히 진행되는 바람에 가우디는 종교의 상징에 관한 한 완벽한 설계를 할 수 있었고 그는 신중하게 모든 것을 예측, 검토 할 수 있었다. 이로써 건물 전체 모형의 윤곽도 거의 비슷하게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구조 시스템이나 장식보충물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기도 하였고 그 중의 일부는 삭제되기도 하였다.
가우디는 그의 일생 대부분을 이 공사에 바쳤으며 1914년부터는 실제로 이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작업실에서는 다른 건물들의 모형도가 만들어졌고 그의 작업실조차 현장 사무실에 있었다. 이 집은 세르데냐와 프로벤자의 모퉁이에 해당하는 부지에 가우디 자신이 1887년 설계한 것이다. 1906년경 최종 건물 계획 설계가 마무리되자, ‘탄생의 정면’ 건물을 건축하는것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에 비로소 후안 루비오의 정면도 스케치가 처음으로 알려졌다. ‘탄생의 정면’의 구조적 특징은 포물선 형태로 측면에 4개의 첨탑이 보이며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안정적이라는 점이다.
나머지는 장식에 해당하는 것으로 3개의 문, 즉 ‘믿음의 문’, ‘의망의 문’, ‘동정의 문’ 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장식되어있다. 이 문들은 십자가의 입구가 있으며 예수의 일생 장면이나 로사리오의 신비에 관한 내용이 둥그런 소상이나 부조로 표현되어있다. 이외에도 황도대의 기호나 수많은 식물과 동물의 형상들이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예수의 탄생을 연상시키는 장면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풍부하고 생동적인 조각 표현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가우디가 성당 건물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산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우디가 성가족 성당에서 실현하려고 했던 것은 많은 방문객에게 그가 설명했듯이 건축학 이론상 중요한 자료이며 많은 관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연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우디가 보통 다른 건물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건물의 완성을 보려고 설계를 하였지만, 성가족 성당의 경우에는 자기도 알지 못할 먼 미래를 보고 설계하였기 때문이다.
가우디가 정면의 외부를 다양한 색으로 지으려는 생각과 적절한 조명과 바람직한 음향 조건을 위해서 기둥사이의 홀과 둥근 천정을 배열한 사실, 학교와 작업장, 수도원의 안마당에 면한 회랑, 인공적인 조명, 창문의 상징성, 종각, 문, 성당의 성기실들을 배치한 것은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 할 사항이다. 허나 이 세계는 문제의 해결을 찾아가는 과정에 그대로 내부에 묻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우디 작품의 세계성을 감안할 때 그의 작품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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