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테베레 강변의 도시국가로 출발하여 왕정을 실시하였다.
도시국가 성립 초부터 사회는 귀족과 평민의 두 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귀족은 대토지소유자이며 전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참정권을 가진 완전한 시민이었다. 평민은 정치적, 경제적 하층계급으로서 참정권이 없었다. 그 밑에 노예가 있었다. 로마의 생산적 기반은 평민과 노예에 있었다. 왕정 하에서 지배를 받아 온 라틴족 귀족은 그에 대항하여 기원전 6세기 말에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기구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공화적 기구는 매우 귀족적인 것이었다.
왕을 대신해서 2명의 집정관이 선출되었고, 입법기관으로는 귀족의 유력자인 의원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원로원, 희랍의 민회에 상당하는 씨족회 그리고 군대조직을 단위로 하는 병원회가 있었다. 2명의 집정관은 최고권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상호 견제하고, 독재를 방지하기 위해서 임기는 1년으로 한정되었다. 원로원 의원은 종신직으로서 집정관의 상위에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로마의 공화기구는 실질적으로는 귀족의 과두정치기구였다. 귀족계급은 전쟁에 의해서 취득한 국유지를 분할·소유하여 토지의 독점을 강화함으로써 평민에게 압박을 줬다. 자·소작농이 부당하게 토지에서 밀려나고 채무노예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에 평민계급은 귀족에 대하여 계급투쟁을 하였다.
기원전 5세기 이후 로마가 발전함에 따라 평민의 인구가 증가하고 그들의 일부는 상공업에서 부를 창출하여 귀족과 견줄 만 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소농민이 중심이 된 보병대가 전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그들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졌다. 평민계급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시민권·참정권을 요구 했고, 귀족계급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원로원의 협정에 의해 호민관이 선출되고 십이표법이 제정되었고, 평민은 민법상 귀족과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
기원전 3세기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거듭된 외정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기원전 246~146년 사이, 로마는 3차에 걸쳐서 포에니 전쟁을 치렀다. 1차는 로마의 승리였다. 2차는 한니발의 등장으로 카르타고가 이기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소모가 많아지고 본국의 원조도 없어 고립되어 버렸다. 결국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의해 격파당하고 로마에게 승리를 빼앗겨 버렸다. 3차 전쟁에서는 2차 승리의 주역인 스키피오의 손자에 의해 카프타고는 멸망하게 된다. 이로써 로마는 서지중해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외정이 거듭됨으로써 로마는 동서 지중해세계를 망라한 광대한 영역에 걸친 세계제국을 구축하였다. 로마는 적어도 제정시대 이전에 전이탈리아를 영토적으로 통일하면서도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한 것이 아니다. 로마는 다수의 자치도시의 상위에 서서 개별적 지배관계를 집적함으로써 이탈리아 전토를 지배한다는 독특한 통치형태를 취하였다.
정복전쟁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평화 시의 군대유지비가 컸는데 초기의 로마군은 귀족만으로 구성되었다. 그 후 보병의 중요성이 커짐으로써 국민군이 형성되었다. 전쟁지역이 반도 외부로 확대되자 징집제보다도 지원제로의 의존도가 커졌다. 기원전 104년부터는 중산적 자유농민의 몰락에 따라 용병제가 도입되고 용병의 유지비가 국가재정상 큰 부담이 되었다. 실전에서 인적·물적 손실도 상당했고 정복지의 수비와 관리에도 큰 비용이 소요되었다. 막대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전쟁이었지만 이득도 많았다. 각종 전리품이 들어왔고 정복지로부터 각종 공조가 들어왔다. 또한 정복지의 토지수탈도 있었다. 로마는 정복지의 토지에 빈민을 이주·식민시켜 사회문제의 완화하고 정복지의 방비와 공조수입원천의 확대를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외정은 로마경제의 번영을 촉진한 반면, 귀족과 부유층의 대지주화로 중산계급과 자유농민의 몰락을 야기했다.
계급분화는 제2차 포에니전쟁을 계기로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오랜 전쟁에 의해서 토지가 황폐하고 채무가 쌓이면서 농민은 토지를 상실하였다. 또 공조로 대량의 곡물이 로마로 들어와서 곡물가격을 하락시키자 그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소농민은 몰락하였다. 경쟁관계에 있지 않는 소생산자도 국내의 대농장의 경쟁에 직면하였다. 대농장 경영자는 축적한 부를 경제적·사회적 위신을 높이기 위해 토지에 투입하였고, 농민의 토지와 공유지를 수탈하였다. 이렇게 토지에 집중되는 과정 가운데 대토지경영체인 라티푼디움은 성장하였고, 로마의 유력자들은 카르타고 식민지의 많은 노예들을 데려다가 자신의 대농장을 경영하였다. 라티푼디움의 행정권은 토지소유자가 행사하였다. 라티푼디움에서 노예는 소유자 내지 감독자의 감독 하에 집단적으로 노동하였다.
라티푼디움이 성행하면서 자영농민들은 자연스럽게 몰락하게 된다. 자영농민들의 몰락은 군사력 약화로 이어진다. 정복전쟁은 수공업자들에게도 별로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였고, 다만 하급수공업생산(빵제조. 방직, 건축 등)이 성장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전쟁은 상업 및 고리대 업자에게는 큰 기회를 주었다. 특히 속주로의 공조징수는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공조횡령도 했다. 호민관이었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이러한 귀족의 횡령에 대한 정치적 도전이었으며 자유농민을 재건하려는 노력이었다. 농지 개혁과 곡물의 배급을 추진하자는 개혁은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게 된다. 로마에서는 계급분화가 진전되어 공화정 말기의 사회계급은 귀족계급, 기사계급, 평민계급으로 구분되었고 그 밑에는 생산부분을 담당하는 해방노예와 노예가 있었다. 공화정시대의 계속 된 외정은 로마의 경제적 번영의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계급분화를 촉진하고 국민대중의 몰락과 노예제의 확대를 결과하였다.
기원전 31년에 최종적으로 통일을 이룩한 로마는 그 후 2세기 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발전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광대한 세계국가로 등장한 로마는 종래의 도시국가적 공화체제에 대신해서 권력자에 의해서 통치되는 제국적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카이사르 이후 권력을 장악하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국적 통치형태로 전환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200년간 로마는 최대 영토 확장을 하고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이러한 배경에서 로마의 경제는 상업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통일적인 화폐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통일적인 도량형이 도입되고 로마법이 보급되었다. 지중해는 대자유무역지역이 되고 광범한 영역에 걸친 상품유통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광역에 걸친 다양한 상품교역의 중심은 로마였다. 아우구스투스시대의 로마는 거대한 구매력을 가진 대소비시장이었다. 그러나 활발한 교역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생산력 확대는 활발하지 못했다. 상업의 발전에 따라 공업생산도 확대되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대량의 곡물 수입의 결과로 중·소농은 몰락하게 되었고 도시 중심의 상업발전은 도시의 경제적 배후지와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했다. 교역품의 대부분은 사치품이었고 일부 귀족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귀족의 사치적 지출은 로마경제를 크게 소모하게 되었다. 활발한 상품교역은 로마의 경제적 번영은 가져왔지만 생산적 기반이 약한 불건전한 것이었다. 표면상 상품·화폐경제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로마의 상업도 생산적 기반이 없는 고대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공업에서는 200명의 노예를 사용한 대경영이 출현하였으며, 노예공금이 감소되어 노예제생산이 불가능해지게 되자 공업생산은 콜레기움의 강제에 의해서 세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농업의 라티푼디움 또한 정복 전쟁에 따른 노예공급이 중단되어 유지가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라티푼디움은 소작인에게 분할 대여되어 콜로나투스제로 변질 되었다.
로마 제국은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과 외부세력의 침입, 그리고 전염병과 내란 등으로 인해 사회·경제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3세기 말엽 이후 로마의 사회와 경제는 변질되었다. 전제적 군주체제하에서 지방자치제제는 억압되고 국가 강제적 정책이 시행되었다. 특히 재정수입의 확보를 위한 조세정책은 중요한 사회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 조세징수에서 지방자치체인 도시는 중요한 황제, 군대, 관료와 함께 제국의 4대지주였다. 그러나 3세기 이후 조세징수는 곤란해졌다. 제국의 재건과 유지에 많은 재정이 요구되는 가운데 정부는 도시의 상공업자에게 과중한 과세를 하게 되었다. 시민을 직업에 속박하고 강제적으로 콜레기움 조직에 가입시킴으로써 구성원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조세와 무상노동을 부담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상공업활동을 억압하고 상공업자들로 하여금 도시를 탈출하여 농촌으로 도망하게 함으로써 도시와 상공업의 쇠퇴를 가져왔다. 농촌 사회의 곤란도 여전했다. 4세기에 들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제국의 통일적 지배체제가 강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재통일 시켰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인한 황제이다. 그는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리스도교 박해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비잔티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하였다. 천도가 이루어짐으로써 정치의 중심은 동쪽으로 이동했다. 또한 게르만민족의 변경지방에의 이주를 허용하였다.
결국 이것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의 계기를 만들고 제국의 분열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뒤이어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었고, 결국 서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에 의해서 476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한편 동로마제국은 로마의 고대제국과 상업적 전통을 계승하여 그 후 번영하였으나, 1453년에 회교도의 침입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영원한 제국’으로서 로마가 붕괴한 것은 내적 붕괴를 원인으로 볼 수 있다. 4세기경 로마제국은 두 가지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것은 밀라노 칙령과 ‘서·동 로마 제국’ 로의 분할 사건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비잔티움을 기독교적 도시로 개축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이라는 새 이름을 붙이고 수도를 옮긴 것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문화 중심이 동방, 즉 그리스적 요소가 강한 비잔티움 지역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동서 분할로 통일된 제국의 유지가 더 이상 불가능해졌으며 로마 문명의 발생지인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 대륙은 다양한 게르만 민족이 들어와 사는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지나친 영토 팽창은 국방비 과다 지출로 다른 분야의 균형 있는 발전을 방해했다. 노예에 강요 된 노동 또한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졌고, 노예라는 로마의 하부 구조 붕괴도 로마제국의 경제성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로마를 강하게 만든 공화주의 정신의 쇠퇴와 개인주의, 물질주의, 퇴폐주의의 헬레니즘 문화 도입으로 도덕적 타락도 일어났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그 외의 종교를 탄압했다. 모든 민족은 정체성이 가장 중요한데, 로마 제국은 로마 신앙이 기독교에 의해서 신화로 격화되었다. 국교로 그리스도교가 지정된 이후 로마 신앙을 지키려던 사람들의 대학살을 피할 수 없었고, 그들 간의 갈등도 많았다. 귀족의 면세특권과 부정부패와 중간착취의 강화는 국가조세부담의 근간인 중상계급과 자유농민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중앙권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그것을 극복할 내적 계기를 마련할 수 없었던 고대제국 로마는 게르만민족의 침입이라는 외적 계기에 의해서 멸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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