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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이야기 | 독일 나치스정권의 선전장관 파울 괴벨스 - 매체를 통한 대중 선동에 대하여

곰고로곰 2024.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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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이야기  |  독일 나치스정권의 선전장관 파울 괴벨스 - 매체를 통한 대중 선동에 대하여

 

 

 
 

괴벨스의 성장배경과 전반적인 그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 난 후, 그의 선전활동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전단과 잡지, 라디오 다큐멘터리 영화에 이르는 프로파간다*,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화술을 비롯한 선동능력에 대하여 알아볼 것이다.


* 프로파간다 (propaganda, 명사
) : <사회> 어떤 것의 존재나 효능 또는 주장 따위를 남에게 설명하여 동의를 구하는 일이나 활동. 주로 사상이나 교의 따위의 선전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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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E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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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의 성장배경과 삶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단순 노동자에 불과했던 할아버지와 가난했지만 부지런한 성품으로 공장 지배인까지 자수성가한 평범하다면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대대로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집안에서 1897년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괴벨스 가족은 작은 연립 주택에서 지극히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괴벨스의 삶은 아주 힘겹게 시작되었다. 

 

그는 갓난아기 일 때 폐렴을 앓아 죽음의 고비를 넘 나들었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허약한 육체로 평생 많은 고생을 했다. 20세기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찾아온 골수염은 오른쪽 다리가 굽는 장애를 남기고 말았다. 이후 그의 부모의 노력과 재수술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굽은 다리를 안고 살아야 했다. 그로인해 그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모욕적이고 동정어린 시선과 또래 친구들로부터의 놀림을 받았다. 괴벨스는 자신의 신체적 장애가 모든 면에 그늘을 드리운다고 생각했고 자신을 열등하다 여기며 집밖으로 나가기를 꺼려했다. 그는 고독에 못 이겨 타인을 증오하고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사랑하는 어머니를 비웃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이야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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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놀지 못했던 괴벨스는 책과 인쇄물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지식 분야에서 만회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타인은 지적인 분야에서도 자신을 따돌릴 정도로 악독하다고 여긴 그는 부지런히 공부 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한 괴벨스는 학우들이 신체적 장애로 자신을 업신여긴다면, 그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후 본대학을 필두로 프라이부르크, 뷔르츠부르크, 퀼른, 프랑크푸르트, 뮌헨,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대학 등을 두루 거치며 철학과 역사, 문학, 미술 등을 폭넓게 공부한다. 그리고 마침내 23세의 나이에 하이델베르크 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괴벨스는 사회주의체제의 이상적인 면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이후 작가와 기자 지망생으로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는 생계를 위해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체복무로 군 생활을 했다. 자신의 기대와 바람과는 달리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전쟁에 자신의 신앙을 내려놓기도 한다. 이후 그는 정치. 특히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에 관심을 보여 마침내 1925년, 나치스당에 입당한다. 이때 만나게 된 히틀러에게 매료되어 그를 ‘신의 선택을 받은 자’로 여기며 신봉하는 인생을 꾸려나간다. 

 

입당 3년 뒤 국회의원이 되고 1929년부터는 당의 선전 장관으로 활동한다. 그는 라디오를 보급해 선전수단을 구사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나치스 정책을 대중화하여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는다. 1930년대 이후 확장된 당의 세력을 이용해 문화면을 완전히 통제한다. 또한 라디오 보도를 통해 국민들의 분노를 이끌어내 전쟁에 동원하는 등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데 기여 한다. 그는 히틀러의 자살이후 나치의 총리자리에 올랐으나, 1945년 5월 1일 관저의 대피호에서 부인과 함께 자살하고 자신의 아이들과 애견까지 모조리 독살해 함께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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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가 이용한 선동 매체의 그의 능력

괴벨스는 누구보다도 빨리 정치에 있어서 대중매체의 절대적 효과를 깨달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치목적에 무섭도록 탁월하게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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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E32

1. 라디오, 음악방송

“19세기에 신문이 있었다면 20세기에는 라디오가 있다”며 라디오의 중요성을 강조한 괴벨스는 1933년, 나치제국의 집권 초기부터 라디오 방송 체제를 개편하고, 수신기 보급 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것으로 대중선동의 기반을 마련한다. 생산자들을 설득해 저렴한 가격에 팔려진‘민족의 수신기’라는 이름의 라디오는 한해 동안 150만대가 보급되었다. 나치 집권 삼년여 만에 전 독일가정의 1/2에 해당하는 숫자가 라디오를 소유할 정도로 수신기 보급정책은 효과적이었다. 이후 노동자와 서민계층을 위해 더욱 가격을 낮추기도 하며 당시 최고속도의 보급률을 기록한다.

이 라디오를 통해 괴벨스는 당시 총통이 된 히틀러의 나치스당를 지지하지 않는 국민의 48%의 마음을 바꾸려 한다. 그는 “라디오로 여론을 만들어”줄 것을 방송국 책임자들에게 주문한다.

 

이로부터 완성된 ‘민족의 시간’이라는 청취형태는 전독일의 시민들이 같은 방송을 들음으로써 똑같은 사건을 알게 되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는 독일민족 공동체를 과시하기 위해 국가적 행사와 추모행사를 예술적으로 치장해 개인이 전체의 부분이라는 체험을 할 수 있게 했다. 동시에 바그너, 후고 볼프 등을 비롯해 직접적으로 정치적 의도를 내보이지 않는 음악프로그램을 다수 방송했다. 그들은 독일의 전통적인 민속음악도 방송하며 독일문화와 전통을 강조해 우월한 독일 민족 공동체의 이미지를 과시했다.

 

비록 낮아져 가는 관심에 따라 1935년 말에는 방송이 중단되지만,‘민족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나치스당은 동일여론을 형성하고 방송내용을 수용하는 태도를 통해 국민들 주체적으로 서로를 통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괴벨스의 입’라디오를 통해 독일인의 공동체적 삶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독일의 전통을 강조해 인종주의적 세계관을 효율적으로 전파시킨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2. 다큐멘터리, 영화

1940년부터 괴벨스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반유대주의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바로 <로췰트 집안>, <유대인 쥐스> 그리고 <떠돌이 유대인>와 같은 영화들인데, 이 속에서 유대인들은 원래부터 비열하고 미개하며 위험한 인종으로 묘사되어 이후의 조직적인 말살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맘때 나치정권은 폴란드 침공 이후 전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강력한 여론의 선동이 필요했고, 그 수단으로써 영화가 이용되었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된 <떠돌이 유대인>은 가장 적나라한 증오심을 드러냈지만 이를 비롯한 <로췰트 집안>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기대치 이하였다.

 

이보다는 오락성이 강한 <유대인 쥐스>는 나치정권의 말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2천만 명이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실존 인물이었던 주인공은 상인으로 일찍부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정치적인 힘을 얻고 막강한 부와 권력을 소유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았던 강간과 같은 여러 죄명으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러한 영화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는데, 바로 관객으로부터 권력을 소유한 궁정 유대인에 대한 거부감과 증오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소한 감정과 같은 기반을 통해 장차 독일에서는 유대인 차별에 이어 600만명의 유대인학살이 자행된다.

 

3. 그의 화술

괴벨스는 단 몇 마디의 말과 글로도 사람들을 분노, 열광하게 하는 타고난 천재적 연설가이자 선전가였다. 그 배경에는 그의 숨겨진 능력이 있었다. 그는 천재이기도 했지만 대단한 노력가 이자 엄청난 독서가였다. (평생 자신의 일상에 일어난 일들을 꼼꼼히 기록했는데 그가 남긴 일기는 7만 5천여 편에 달했다. 그는 사적인 감정은 물론, 나치스 수뇌부 회의와 같은 정치적 비망록도 일기장에 정리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쓰고 기록하는데 능했던 괴벨스는 청년시절 자신의 장기를 살려 작가나 기자가 되길 소망했다. 괴벨스는 자전적 소설 <미하엘>을 완성하지만 출판사들이 출간을 외면해버렸다. 2년 뒤에는 2개의 연극대본을 썼으나 연출가들로부터 답이 오질 않았다. 이에 그는 신문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베를린의 신문사에 지원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이렇게 기자, 작가가 되기 위해 남몰래 단련했던 시간은 아무도 당해낼 자가 없는 독설적인 필력과 논리를 갖춰 멋진 화술로 많은 사람들을 선동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피에 굶주리고 복수에 목마른 적에 맞서려면 무엇보다도 한없는 증오를 활용해야 한다.”/“우리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아니면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와 같이 수십년이 지난 현재에도 회자되는 그의 말을 통해 그의 화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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