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한국사이야기 | 삼국시대의 한강

곰고로곰 2024.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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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역사적 배경

인류의 문명이 최초로 탄생한 곳은 강가였다. 강은 최초의 인류가 의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옛날 선사시대에서부터 보여지는 특징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 곳을 정하는 요건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물에서 가까워야 했다. 물을 운반하고 저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식수 사용이 편리한 강가를 우선적으로 주거지로 선택했다. 또 생산활동에 편리한 곳이어야 했는데, 강가는 어로활동이 쉽다는 점에서 주거지로 적합했으며, 농경이 발달한 다음에는 하천유역의 경지를 농경지로 이용할 수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 이밖에 교역과 교통요건도 주거지 발달에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을 골고루 갖춘 곳이 하천 유역이었기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하천 유역를 중심으로 주거지가 발달하였다.

 

 

한강은 우리 나라 중부의 태백 산맥에서 발원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기도를 동서로 가로질러 서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강원도 대덕산에서 시작하는 남한강은 남양주군에서 북한강, 개풍군에서 임진강과 만나고, 강원도 금강산에서 시작하는 북한강은 춘천에서 소양강, 남양주군에서 남한강과 만난다. 한강은 상류에서 춘천, 영월, 여주 등의 분지를 끌어안고 있으며, 하류에서는 드넓고 기름진 김포 평야를 끼고 있어, 한반도 중심의 젖줄이 되는 셈이다. 한강은 오랜 세월 국토의 대동맥과 같은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는 물론 풍부한 관광자원까지 가지고 있다.

 

이 강은 삼국시대 초 ‘대수’라고 불렸고, 광개토 대왕비에는 ‘아리수’, ≪삼국사기≫에는 ‘욱리하’라 씌어 있다. 그러다 백제가 동진과 교류하며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뒤로 ‘한수’ 혹은 ‘한강’으로 굳어진다. 이때 '아리',  '알'은 고대에 크거나 신성한 의미로 쓰였으며, '한'도 이와 비슷한 의미이다.

 

한국사에 있어 한강은 그냥 단순한 강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 잡은 한강은 육로 교통이 수월하지 못한 옛날, 내륙의 강원도·충청도·경기도를 이어 주는 뱃길로서 구실을 톡톡히 했다. 또한 강 유역의 기름지고 드넓은 평야는 나라의 힘을 키우는 경제적 원천으로 우리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그래서 한강을 장악한 세력은 한반도의 패자가 될 수 있는 발판을 얻었으며, 이를 거점으로 남북으로 쉽게 진출 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특히 삼국 시대에 한강 유역을 놓고 고구려·백제·신라가 벌인 치열한 싸움이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삼국의 역사는 한강을 점령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실제로 삼국 가운데 한강을 많이 차지하는 나라가 그 시대의 강대국 이었다. 하나의 강이 국가의 흥망성쇠에 큰 영향을 끼칠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에 있었을까. 따라서 지금부터 삼국시대를 중심으로 한강을 둘러싼 그 역사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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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전 한강의 역사

한강은 한반도 중심부를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큰 강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지류가 잘 발달되어 한강 유역과 하구는 선사시대부터 주거지가 발달하였다. 한강 유역에는 주거지, 토기, 묘지 등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많이 발견되어, 이 곳이 구석기시대 이래의 주요 생활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한강 유역은 사람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이었다. 수량이 풍부하고 지류가 많으며 곳곳에 유로변경에 의한 호(湖)와 소(沼)가 생겨, 물고기와 작은 동물, 철새들을 쉽게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신석기시대인들이 남겨놓은 유물, 유적들은 남한강과 북한강 상류에서부터 한강중류를 거쳐 하구인 서해 앞바다의 가까운 섬에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구릉이나 산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주변의 하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천은 생활용수 및 당시 본격화된 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격화된 농업으로 잉여생산물이 나올 만큼 식량이 풍부해지자 자연스럽게 인구도 늘어나게 되었고 사회집단의 규모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게 되어 고대국가가 형성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백제의 한강 선점

B.C 3세기말에서 B.C 2세기초에는 한반도에 철기 문화가 전래되어 각 지역에서 국가가 성립되고 그 중 일부는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더 많은 인구와 더 넓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한 정복전쟁은 고대국가의 특징이었다. 고대국가들은 제각각 정복과 팽창을 시도했기 때문에 이들 간의 정복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고대국가들 사이의 치열한 정복전쟁 와중에서, 한강은 국가의 흥망을 판가름하는 세력다툼의 요충지였다. 한강을 얻어야만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 가장 강력한 국가만이 한강을 지배할 수 있었다. 백제, 고구려, 신라의 삼국은 각각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경쟁 국가들을 정치 군사적으로 제압하고자 했다.

 

한강은 군사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내륙지방의 주요한 교통로이면서 중국과 연결되는 수로이기도 했다. 한강을 통해 내륙지방의 생산물을 운송해 올 수 있었으며, 또 서쪽으로는 중국과 직접 연결되는 해로를 얻을 수 있었다. 삼국은 이 길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화와 접촉하였으며 중국과의 외교도 수행할 수 있었다.

 

삼국이 고대국가로 정립되면서, 제일 먼저 한강 유역을 장악한 것은 백제였다. 백제는 이 곳에 터를 잡고 성을 쌓았다. 고구려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홀(인천지방)에 자리를 잡았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서울부근)에 정착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불편함을 느끼다가, 위례성에 가서 도읍과 백성이 안정된 것을 보고 후회하고 부끄러워하여 자살을 했다. 이에 미추홀의 백성이 모두 위례에 귀속되었으며, 이 때부터 국호를 백제라 정했다.

 

백제의 건국설화에 대한 해석문제나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몇 가지 이견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추출되는 결론은 선진 문화를 가진 부여계 고구려의 유이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 유역의 토착사회를 정복, 동화시키면서 고대국가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이들 유이민 집단은 인근의 정치 세력과 항쟁하면서 연맹체를 형성하고 발전하여 나갔는데, 농경에 적합한 한강의 자연 환경을 활용하여 생산 면에서의 풍족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주위 세력을 압도하였다. 한강 유역에서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던 여러 이주민 집단들이 온조 집단을 중심으로 해서 통일된 국가체로 발전해 나갔으며, 대외적으로 주변 정치세력과 각축을 벌이며 성장을 꾀하였다.

 

백제의 성장과정은 한강 유역의 경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철을 얻었으며, 이곳을 근거로 삼고 영토 확장을 꾀하면서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해갔다. 또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고대국가를 건설해 나갈 당시에 백제는 대내외적으로 비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후 백제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가 한반도 북부지역에 설치한 낙랑군과 대방군이 존속하는 동안 고구려와 백제의 직접 충돌은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를 몰아낸 뒤, 양국은 직접적인 대립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3세기 후반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한강변에 아차산성을 쌓았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한강이 주로 수송로로 이용되었으나 삼국시대에는 군사적 방어거점으로서의 중요성도 매우 컸다. 한강 상류지역에는 많은 산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대체로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다. 이들 산성의 기능은 한강 수로의 보호 못지 않게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가 중시되었다.

 

4세기 후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근초고왕(13대왕) 시대에 백제는 남으로 마한을 병합하고, 북으로는 곡산까지 점령하며 한반도의 중부․서해안 지대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371년에 백제는 침입하는 고구려군을 예성강 위쪽에서 격퇴시키고 이어 평양성을 급습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16대왕)이 전사하였다. 또한 백제는 성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서도 문화국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중국 동진에 조공하며 선진문물을 습득하였고, 일본에 학문과 각종 문화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강성해진 고구려가 남쪽으로 다시 압박을 강화하면서 양국은 정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양국의 충돌 현장은 다름 아닌 한강 유역이었다.

 

 

고구려의 남하와 한강 장악

북쪽으로는 전연의 침략에 시달리고 남쪽으로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쇠락을 거듭하던 고구려는 4세기 중반 소수림왕(17대 왕)이 국가 체제를 정비하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광개토왕(19대 왕)이 즉위하면서 강대국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광개토왕은 21년의 재위기간 동안, 대외 정벌에 탁월한 성과를 올렸다. 당시 고구려는 남으로도 압박을 가하였는데, 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는 여러 차례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광개토왕은 대규모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의 한강 하류를 공격한 다음 백제의 수도 한성까지 육박해 갔다. 그런데 이 때 광개토왕의 백제공격은 앞서 일어난 고국원왕의 전사에 대한 복수라는 의미가 더 컸기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의 항복을 받은 다음 인질을 데리고 물러갔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20대 왕)이 즉위한 뒤,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서 백제와 신라를 밀어내고 한반도 중부지방 이남까지 최대한 영토를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다음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군대는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개로왕(21대 왕)이 사망하였고, 끝내 500여년의 중심지였던 한강 유역을 잃게 되었다. 이후 금강유역의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렇게 해서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손에 넣게 됨으로써, 만주전역과 한강 유역은 물론 아산만과 조령, 죽령 이북지역을 차지하는 일대 제국을 형성하였다.

 

현재 충청북도 중원군에 남아있는 중원고구려비는 이 시기 고구려의 남하와 한강 유역 장악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비는 남한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서, 한강과 관련한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증명하는 존재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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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동맹과 신라의 한강 장악

한강 유역을 손에 넣은 이래 고구려는 약 70여년 동안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는데.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 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위협이 되었으므로 백제와 신라 양국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고구려가 내우외환으로 흔들리는 틈을 타서 마침내 551년 양국은 고구려를 공격, 신라는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를 취하고, 백제는 한강 하류 쪽 남한산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강을 탈환한 지 2년만에 신라와 백제의 동맹은 깨어졌다. 신라 진흥왕(24대 왕)의 기습공격으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백제의 성왕(26대 왕)은 한강을 되찾기 위해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그 자신이 전사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고국원왕, 백제의 개로왕에 이어 성왕은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간의 패권쟁탈 과정에서 사망한 세 번째 임금이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잃어버렸으며 다시는 되찾을 수 없었다. 또한 더 이상 전성기를 누리지 못하였다.

 

반면 신라에게 한강은 한반도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진기지가 되어 주었다.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직후, 피정복민에게 자국의 위엄을 확인시키고 영토를 확정하기 위해서 새로 넓힌 국토를 둘러보았다. 그 과정에서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는 뻗어나가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신라는 서쪽으로 직접 중국과 통하는 해로를 얻게 되었고, 또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고구려·백제 양국을 억누르면서 삼국 통일의 기반을 확립 할 수 있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백제와의 동맹이 깨어진 뒤에 삼국은 더욱 심각한 상호 항쟁기에 접어들었다. 물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를 가로지르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는 국경을 접하게 않아 양국의 직접 충돌은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고, 신라는 이를 방어하느라 상당히 곤란을 겪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한편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기도하고 있었고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를 고립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신라를 압박하였다. 특히 642년 백제가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인 대야성(경남 합천)을 정복한후 신라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는 신라와 당나라가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특히 한강유역의 당항성이 서해를 통해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취할수 있었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신라 선덕여왕(27대 왕)때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당항성을 공격하여 신라가 당나라로 통하는 길을 끓고자 하였다. 당항성은 중국으로 통하는 관문이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신라는 당과 손을 잡고 고구려, 백제 양국을 치는데 합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당 연합군은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런데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당나라는 한반도 전역에 대해 지배권을 갖고자 기도했다. 이에 신라는 대당전쟁을 시작하였다. 676년까지, 7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마침내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평양 이남의 한반도를 지배하는 유일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신라의 이와 같은 삼국통일의 일차적 기초는 역시 한강 유역이라는 중요 지대를 확고부동하게 점유, 활용 한데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젖줄 한강

한강은 한반도의 중앙부를 횡으로 흐르는 514km의 큰 강이다.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것은 군사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반도에서의 패권유지를 위한 핵심요건이었다. 따라서 정복전쟁의 시기였던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이 군사적 다툼의 중심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삼국의 역사에서 한강 유역의 득실은 각국의 흥망성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삼국의 국력과 위세는 한강 유역의 장악 여부로 귀결되었고,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강을 수중에 넣어야만 했던 것이다.

 

한강 하류에서 일어난 백제는 이 곳을 발판으로 마한을 굴복시키고 고구려를 압박하며, 중국·일본과의 해상무역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한강을 잃자 백제의 국운이 급격히 쇠퇴한 것을 보아도, 새삼 이 강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고구려는 한강을 장악함으로써 명실 상부한 동방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으며, 뒤에 백제·신라의 협공으로 한강을 잃자 그 세력이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장악은, 중국과의 해상 교통로를 확보함으로써 고구려 땅을 거치지 않고 당과 직접 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요컨대, 삼국 시대 한강 유역은 그 득실이 곧 각국의 흥망성쇠와 큰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백제의 초기 수도라는 사실 이외에, 삼국간의 군사적 쟁패지 또는 삼국 통일의 달성을 위한 당군 축출의 최후 거점이었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의미가 있으며,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도 긴 역사 속에서 교역의 현장이었던 강을 따라 독특한 문화권이 형성되었으며, 남과 북, 동과 서의 이질적인 문화와 물자들이 이 강을 매개로 소통되었다. 그리고 중국 문화와의 접촉지로서 새로운 문화 개발의 전초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 강을 차지한 나라는 번영의 길을 치달릴 수 있었으며, 이 강을 잃은 나라는 역사의 수레 바퀴에 밀려 사라졌다. 한강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사는 한, 그 유역 일대에 풍성한 경제적 원천을 제공하며 모든 이들에게 혜택을 고루 미치는 한반도의 젖줄로서 소임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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