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세계사이야기 | 메디치가문이 르네상스에 미친 영향 2부

곰고로곰 2024.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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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과 르네상스 2부

역사를 거슬러 가장 성공적인 예술 후원의 사례 중 하나는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의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인 피렌체 공화국의 유력 가문이며, 당시에 손꼽히는 부자였다. 코지모 데 메디치(1389~1464)가 당주였을 당시에는 프랑스와 같은 대국들도 메디치가의 은행에 돈을 빌리러 올 정도였다고 한다. 

 

코지모 데 메디치는 실질적으로 메디치 가를 유럽의 최고 유력 가문으로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며, 가장 성공적인 예술 후원을 실행했던 위인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 정치와 거리를 두려 노력하고 실제로 사업상이나 시민으로써 임무에 따른 최소한의 정치만 했을 뿐, 대부분 경제활동 (당시에는 경제활동과 정치활동의 구분이 매우 모호한 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과 가문의 부흥에 노력을 기울였다.

 

벌거벗은 세계사  E070

 

코지모 데 메디치는 예술과 학문을 장려하고 거액을 후원하였다. 비잔틴제국이 점차 몰락하며 그리스 지역 일대가 끊임없이 터키에게 약탈당하는 상황에서 코지모는 그리스의 고서와 서적, 예술품들을 모조리 사들였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장서로 도서관을 만들었으며 예술품들은 자신의 집과 후원(後園)을 장식하였다고 한다. 그의 후원(後園)에서는 어떤 예술가라도 실력만 있다면 누구든 들어와서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도 그의 후원(後園)에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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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모는 자신의 후원(後園)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을 보러 왔는데 '좋군.'이라는 말 이외에는 별다른 말이나 간섭을 하지 않았고, 다만 재주가 좋은 자들에게는 특별히 작품 제작을 의뢰하였다고 한다. 그가 가장 사랑한 예술가는 도나텔로였는데, 그가 죽을 당시에 도나텔로가 돈이 궁하여 작품활동이 어려울까봐 매년 엄청난 수입이 들어오는 포도밭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나텔로는 코지모의 아들인 피에로에게 포도밭을 돌려주면서, '포도밭이 신경쓰여 도무지 작품활동을 할 수 없다.'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전성기는 코지모 데 메디치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 대이다. 로렌초는 할아버지가 쌓아놓은 부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이탈리아 반도에 평화를 가져왔고,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대국들의 분쟁을 중재하는 정치적 거물이 되었다. 그는 못생긴 외모와 달리 매우 유쾌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그와 함께하면 웃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며, 서유럽과 적대적인 관계인 터키의 술탄조차 그에게만은 존경과 흠모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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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끈 로렌초였지만,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은 선대의 코지모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로렌초는 직접 예술가를 후원하는 대신에 다른 나라의 유력 귀족과 왕족에게 추천서를 써서 궁정 화가로 채용이나 작품 의뢰를 부탁하곤 했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게 계속해서 추천을 해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유능한 화가와 조각가들을 프랑스나 신성로마제국과 같은 대국의 왕가나 귀족에게 궁정화가로 추천을 해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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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의 방식이 바뀐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여겨지는데, 로렌초의 정치활동 때문에 거금을 사용해야만 했던 점, 메디치가 은행 사업의 경영이 크게 악화되었던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렌초 본인이 매우 뛰어난 예술가였던 점이다. 마지막 이유는 조금 흥미로운데 사업가 코지모에게 예술작품은 각자 가치가 존재하였으나, 예술가 로렌초에게 어느 수준 이하의 예술작품은 무의미하게 여겼으리라는 해석과 뛰어난 예술가의 재능은 후원자보다 창조자로써 더 적합했으리라는 해석이 있다.

 

예술 사조를 보자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시기이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코지모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고, 로렌초 이후의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은 점차 알프스 이북으로 넘어가게 된다. 예술 활동을 하기 좋은 환경이 바뀐 것이다. 최근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의 목표는 어떤 것인지 가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단순히 시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해서 하는 것일까? 아니면 진심으로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일까? 

 

서울시에서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외에도 젊은 디자이너와 예술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취지는 매우 좋으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독거 노인을 지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꽤나 씁쓸하다. 만약, 이 거대한 도시 프로젝트가 전시 행정으로 끝나고, 당장 실패로 여겨진다면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은 본인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시국의 변화로 어려움에 당면할 것이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방대한 규모로 인하여 유산을 남길 수 밖에 없고, 이것을 좋으나 싫으나 가져가야 하는 이는 예술가와 디자이너이다. 만약 이들조차 이 유산을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면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는 완벽하게 실패한 도전이 될 것이며, 예술에 돈을 쏟아붓는 일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지 대한민국에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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