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의 출현과 기독교
기독교가 출현하고 첫 6세기 동안에 중동에서 기독교 우위의 시대가 계속되었을 때에 페르시아에서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였다. 첫 번째는 파르티아였고, 두 번째는 사산 왕조였다. 이 두 페르시아 왕조는 중동 지역의 영토를 가지고 로마와 다투었다. 이슬람을 세상에 선포하였던 무함마드가 태어났던 6세기에 페르시아 사산왕조와 로마제국의 후계국가인 비잔틴 제국은 끊임없는 전쟁 상태에 돌입하였다. 이와 같이 두 강대국 간의 전쟁은 아라비아 반도를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게 만들었다. 아라비아 반도 주민들은 양 강대국가의 관심과 원조를 받게 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는 무역로로 흐르는 물품으로 인하여 부유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아라비아 반도의 정치, 경체, 종교의 중심지가 된 메카는 국제 무역으로 인한 많은 부를 누리게 되었다. 이 교역의 직접적인 혜택은 상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들이 메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 당시 아라비아 반도 지역민들의 종교 성향은 다신교도 외에도 유일신교인 유대교와 기독교가 자리 잡아 가는 상황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유일 신앙은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고, 이들은 아브라함이라는 같은 신앙의 뿌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를 석권한 후에 3개 대륙으로 뻗어 나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동 지역의 기독교는 사라지거나 미약하여지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그 엄격한 유일신 사상, 개인의 도덕과 동정심에 대한 강조, 계시에 의해 기록된 성서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기독교나 유대교와 비슷하다. 무함마드는 쿠란을 종교적 권위의 궁극적 원천으로 선언했지만, 신구약 성서 역시 신성한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이라고 인정했다.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로 받아들이고 존경스러운 대상으로 간주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기독교가 발생한 지역을 이슬람화 시키면서 성장한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믿음의 뿌리를 공유한다. 그러면서도 두 종교는 예수에 대하여 근본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런 역사적, 종교적 배경은 십자군 전쟁의 발생과 진행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두 종교의 추종자가 십자군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에도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 전쟁의 배경
이후 많은 시간이 흘러, 유럽은 강대국이 존재하지 않고 크고 작은 나라들이 공존하면서 잦은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많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럽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들은 대체로 비옥하지 못하였고 극심히 피폐해져 저주받은 땅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영주들은 새로운 땅 찾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라마다 사정은 달랐으나 11세기 중엽이 지나면서야 서유럽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제한적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다. 점차 확산되어 간 봉건제도는 왕권을 약화시킨 반면 봉건귀족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을 과도하게 신장시켜 지방분권적 현상을 심화시켰지만, 적어도 군주체제는 유지시켜 줌으로써 유럽이 혼란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1071년 비잔틴 제국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소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한 셀주크 투르크족에 의해 크게 패해 황제 로마누스 디오케네스가 포로가 되는 등 치욕을 당하고 투르크가 소시아에 정착하여 새 주인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지난 4세기 동안 동편으로부터 이슬람세력의 공격을 잘 막아 왔지만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알렉시우스 콤메우스(1081-1118)황제는 마침내 로마 교황 우르반 2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 십자군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서유럽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교황은 분리되어 있던 동서교회의 실질적인 수장이 되는 교황권의 강화와 더불어 세속적으로는 기사단의 인수를 통해 서유럽 황제의 권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서유럽과 팔레스타인 두 세계를 자신의 정치적 비전속에서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면서 십자군을 활용하고자 했다. 성지회복과 예루살렘 해방을 명분으로 내건 십자군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평화와 통합이었지만, 교황의 내심은 분열된 교회를 재통합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대한 완전한 수위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반면 과거부터 꾸준히 부를 축적해오던 메카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는 11세기 초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앞선 문명의 중심지였다. 특히 바그다드는 대규모 무료 병원과 정기적인 우편제도, 중국에까지 점을 두었던 은행들, 훌륭한 관개시설, 하수도 등이 있는 문명도시였다. 그러나 강성했던 압바스 제국이 정치적으로 급속히 쇠퇴해지자 이슬람세계는 분열되었고, 지역에 따라 군소 제왕들이 난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슬람세계의 무슬림들 간의 반목으로 인해 외부세계의 위협을 감지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유럽세력의 대규모 침입인 1차 십자군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전개 과정
1. 제 1차 십자군 전쟁
교황 우르바노 2세(재위 1088~1099)의 선동(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으로 유럽의 유력한 제후들이 십자군에 대거 참가했다. 전쟁 기간은 1096년부터 1099년까지 약 3년 간. 비잔티움 제국 영토를 지나 아나톨리아를 가로지르며 투르크족 분파들을 격파하고 시리아로 진군하여, 당시 시골 마을 하나까지 왕국을 자처할 정도로 분열돼 있던 시리아를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후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등의 그리스도교 십자군 국가를 세웠다. 이 때의 이슬람권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909~1171)가 내부로부터 무너져가고 있었고, 페르시아에서 시리아, 아나톨리아까지 차지했던 셀주크 제국(1037~1219)은 부족이나 도시 단위로 갈갈이 찢겨져 나간 시점이라 예상도 못한 십자군의 대규모 침공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2. 제 2차 십자군 전쟁
제2차 십자군 원정(1145-1149)은 대귀족 수준을 넘어 유럽의 왕들이 참가하기 시작한 첫 번째 십자군으로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중동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왕들의 고집 때문에 거의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병력과 물자만 낭비한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공격이 좌절되자 유럽 십자군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고 2차 십자군은 파국을 맞았다. 다마스쿠스는 전투 직후 시점에는 어느 쪽에도 점령되지 않은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나, 2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이미 반(反) 십자군 정서가 팽배하게 되어 영주인 무인 앗 딘 우누르가 죽은 뒤 별다른 저항 없이 잔기 왕조에 포섭되었다. 이로써 잔기 왕조가 시리아-자지라 전체의 패권을 쥐게 되었으며, 이는 장차 아이유브 왕조의 성립으로 십자군 세력이 파멸하는 단초가 된다.
3. 제 3차 십자군 전쟁
히틴의 뿔 전투(1187)로 예루살렘 왕국이 사실상 멸망하고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 군주 살라딘(1138~1193)에게 점령당하자, 그에 따라 성지를 탈환하고자 해서 결성된 십자군이다. 1189년부터 1192년까지 약 3년 동안 계속되었다. 사상 최고 수준의 전력을 가진 십자군으로 당시 참가했던 왕의 능력, 군대의 질, 수, 참가국의 권위로 따질 때 모든 십자군 원정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제1차 십자군 시기에는 이슬람권이 사분오열되어 십자군이 상대적으로 쉽게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제3차 십자군 시기에는 살라딘의 주도 아래 이집트에서 시리아와 예멘, 자지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가 단일 제국으로 뭉쳐져 있었다. 더군다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왕 리처드 1세의 갈등과 대립,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어이없는 사고사로 인하여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이 3차 십자군 전쟁 직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4. 제 4차 십자군 전쟁
원래 목적이었던 성지 탈환이 아닌,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전쟁. 전쟁 기간은 1202년부터 1204년까지이다.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로 향한 탓에 1187년 이래 계속 몰락하고 있던 십자군 국가들은 제4차 십자군으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약체화 된 이들 세력은 이미 무슬림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중개무역지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멸망시키지 않는 것이 더 득이었다. 따라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은 우트르메르(중동 십자군 국가)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5. 제 5차 십자군 전쟁
4차 십자군에 실망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전의 일을 교훈삼아 제후들이 아닌 자신이 직접주도하여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조직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그가 죽고 새로운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본격적으로 원정을 상세히 전개하기로 해 각국의 지원을 받아 1217년 원정군을 출발시켰다. 교황은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을 사령관으로 삼아 시리아를 공격하게 했으나 원정은 지지부진하여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1218년 이에 실망한 제후와 왕들이 하나둘씩 귀환해버렸고 이에 제노바 함대의 제안으로 아이유브 왕조가 다스리는 이집트 다미에타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술탄 알 카밀의 반격을 격퇴하고 2년간의 장기간의 포위공격에 다미에타를 함락시키는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전력소모가 심해 더 이상 공세로 전환하기는 어려웠다. 1221년까지 다미에타에서 웅거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그는 직접 오지 않고 대신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의 지원군만이 왔다. 이후 공세로 전환하여 카이로로 진격하였으나 나일강이 범람하는 우기에 공격을 고집한 교황 사절인 페라기우스의 실책으로 대패하여 원정군은 괴멸했다. 이후 포로들은 다미에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고 5차 십자군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6. 제 6차 십자군 전쟁
원정 기간은 1227년부터 1229년까지 약 2년 동안. '원정'이라고는 하지만 역대 십자군 중 가장 평화로운 원정군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1241)가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1215~1250)에게 원정을 재촉했으나 황제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따르려고 하지 않자 분노한 교황이 황제를 파문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두 번이나 파문되고 나서야 겨우 십자군을 일으켰으며, 미리 건조했던 함선들을 이끌고 이슬람 지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당시 아이유브 왕조의 알 카밀 무함마드 빈 알 아딘과 여러 번 교섭하고, 마침내는 예루살렘 일부의 통치권을 양도받는 성과를 이룬다. 이슬람 세력에서야 당연히 이를 '굴욕'으로 간주해 아이유브 왕조와 큰 마찰이 일었으며, 그레고리오 9세를 비롯한 교황 측에서도 프리드리히에게 크게 분노했다. 프리드리히는 이내 교황 측에게 공격을 받으나 돌아와서 이를 간단히 격퇴한다. 결국 그레고리우스 9세가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취소하였으며, 조약이 만료된 1239년까지 이후에도 5년간(즉, 1244년까지) 예루살렘은 기독교 세력의 영향권에 드는 등 이 6차는 십자군 중 두 번 째이자 마지막으로 성공한 사례가 되었다.
7. 제 7차 십자군 전쟁
1244년, 예루살렘은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호라즘 군대에 점령당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당시 아이유브 왕조는 시리아와 이집트로 분열되어 있었다.)와 동맹을 맺은 십자군은 라 포르비에(La Forbie) 전투에서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호라즘군에게 포위섬멸 당한다. 라 포르비에 전투는 하틴의 뿔 전투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즉 유럽에서의 원정군이 아닌) 십자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유일한 사례였으며 최후의 사례이기도 하다.
8. 제 8차 십자군 전쟁
1268년, 바이바르스가 이끈 이슬람 군대가 안티오크 공국을 공격해 멸망시키자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다시 십자군을 결성하여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공격한다. 이에 동생인 시칠리아 왕 샤를(카를로 1세), 사위인 나바라왕 테오발트 2세 등이 원군으로 출병하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식수부족과 진중에 전염병이 돌아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병사한다. 또 나바라왕 테오발트 2세도 귀국한 후 이내 병으로 사망했고 남겨진 샤를은 튀니지와 기독교인의 보호와 무역재개, 배상금 지불등의 조건으로 화목하고 뒤늦게 지원군으로 온 에드워드 1세와 아크레로 향했다.
9. 제 9차 십자군 전쟁
루이 9세가 튀니스 공격에 실패하고 병사하자 지원군으로 왔지만 시기를 놓쳐 제대로 싸우진 못했던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왕자(후에 에드워드 1세, 재위 1272~1307)와 남겨진 시칠리아 왕 샤를이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로 진군하였고 키프로스왕 위그 3세가 해군을 지원을 해주었다. 또 일 한국(1258~1353)에 원군을 요청하여 기병대를 지원받는다.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바이바르스가 키프로스 본토를 기습하여 키프로스 해군이 철수하게 되고 에드워드의 군대는 아크레에 고립되고 만다. 또 술탄 바이바르스가 암살자를 보내 에드워드를 습격하기도 했는데 암살자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에드워드도 작은 부상을 당하게 된다.
갖가지 악전고투속에 결국 에드워드와 샤를은 바이바르스와 10년간의 휴전 협상을 맺고 1272년 철수하고 만다. 이 후 십자군은 맘루크 왕조의 거듭된 공격으로 토르토사, 트리폴리 등을 잃었으며(1289) 십자군을 지원하는 몽골군은 아파미아, 알레포 등을 공격하며 서남쪽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많은 무슬림들을 학살하나 이집트 술탄 칼라운이 반격을 개시하여 몽골군을 몰살시킨다. 그 때 십자군은 쿠칸에서 패배하였으며 최후의 거점인 아크레가 함락(1291)당하여 중동에서 십자군의 거점이 될 만한 곳은 모조리 파괴되어 200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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