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사회의 동요
귀족사회의 모순으로 나타난 지배세력의 내부분열은 전통적인 문벌귀족과 지방출신의 신진관료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그 구체적인 사건이 인종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었다. 양란은 일단 수습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귀족사회의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리하여 고려귀족사회는 그 근저로부터 동요하고 점차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1170년 고려 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해서 붕괴된다.
무신란 발생의 요인
1.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
2. 귀족정권의 대무신정책의 모순(崇文 賤武(숭문 천무)
3. 문신귀족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불만
무신란의 발생과 무신정권의 출현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고 문신귀족정치의 누적된 모순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으며, 무신정권이 성립되어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으니, 무신란은 고려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성립
1. 무신정권의 형성기
정중부가 무신란을 일으켰을 때부터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할 때까지를 말함. 무인집정의 지위가 불안정하였고, 무신정치는 무신세력의 집합제인 重房(중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짐. 종래의 문신세력의 반항이 일어났고,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교종계통 승려들의 반란이 발생하였으며, 무신 상호 간에도 치열한 정권다툼이 전개됨.
1173년(명종 4)에는 동북면방마사 金甫當(금보당)이 의종 복위를 꾀하여 거병하였다가 실패. 이듬해에도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북면지방민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중부정권의 타도를 부르짖고 서경에서 난을 일으킴. 歸法寺(귀법사) 등의 승도 2,000여명이 반란을 일으킴.
또한 이 때에는 무신정권의 대표자인 무인집정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쉴새 없이 정권이 교체됨. 처음 무신란을 일으켜 함께 정권을 잡았던 정중부 ․ 이의방 ․ 이고 사이에 분열이 생겨 1171년(명종 1)에 이의방이 이고를 주살하더니, 1174년(4년)에는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하고 단독으로 정권을 차지. 그러나 정중부도 1179년(명종 9)에 장군 경대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1183년(13년) 경대승이 병사하자 이번에는 이의민이 집권하였지만 그도 1196년(명종 26)에 최충헌에게 숙청.
2. 무신정권의 확립기
최충헌은 과단성있는 전제정치로 무신정권의 안정을 다짐으로써 崔瑀(최우)(怡)․沆(항)․竩(의)에 이르는 4대 62년 간 최씨정권이 계속됨. 이 때에는 敎定都監(교정도감)이라는 독자적인 정치기구를 만들고 막대한 사병을 조직하여 자신의 무력기반으로 삼는 등 자체적인 권력기반을 확립하여 전형적인 무신정권의 형태를 갖춤.
이에 따라 최씨정권기에는 전과 달리 일반무신들의 옹호가 필요 없게 되어 오히려 무신과 중방을 억압하고 문신을 보호하는 역현상이 일어나게 됨. 최충헌은 그의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무신은 가차 없이 제거하였고, 중방무신들의 권위를 무시하였다. 반면 최충헌은 무신정권에 위험이 없는 무력한 문인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행정적인 능력을 이용.
최충헌은 또한 무단정치로 당시 빈발하였던 민란을 진압하는 동시에 사원세력의 반항을 억압. 교종을 대신하여 선종사원과의 연결을 도모.
3. 무신정권은 붕괴기
1258년(고종 45) 최의가 김준 ․ 임연 등에 의하여 제거됨으로써 4대에 걸친 최씨정권도 무너짐. 처음 김준이 무인집정이 되어 정권을 잡았으나 1268년(원종 9) 임연에게 빼앗기고, 이것이 다시 그의 아들 임유무에게 전하였는데, 이러는 사이에 무신정권도 점차 약화의 길을 걸었던 것. 김준과 임연 ․ 임유무 부자도 무인집정의 지위를 표시하는 敎定別監(교정별감)이 되어 무인정치를 계속하였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독자적인 집정기구와 무력장치로서의 사병집단,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기반이 약화되어 무인집정의 지위도 불안정.
이와 같이 김준 ․ 임연정권은 자체 기반이 약화되어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 이를 붕괴시킨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밖으로부터의 압력. 당시 몽고의 간섭이 무신정권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하였던 것. 몽고는 항몽의 주동자인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였고, 고려국왕도 무인정치로 약화된 왕권의 회복을 꾀하며 몽고와 결합. 1270년(원종 11) 몽고세력의 옹호를 받은 국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하였으나 임유무가 이를 듣지 않자 전문규 ․ 송송례 등이 임유무일당을 주륙하였으니, 이에 왕정이 복구되고 100년 간 계속된 무신정권은 종언을 고하게 됨.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무신란 이후에도 3성 ․ 6부의 공식적인 정부기구는 그대로 존속하였고, 많은 문신들이 이들 관부의 관직에 임명되고 있었으나 형식적인 존재였다. 처음 무신들이 정권을 행사한 곳은 重房이었는데 무인정치의 초기에는 아직도 독자적인 지배기구를 형성하지 못하고 종래 최고회의기관인 중방을 통해서 정치를 실행하였고, 중방은 모든 무신들의 연합정권기구와 같은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충헌이 집권하여 무신정권의 확립기에 접어들면서 독재정치를 실행할 수 있는 독립된 지배기구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최씨정권의 최고 집정부의 기능을 한 것은 교정도감이었다. 교정도감은 내외의 중요 국사를 관장하고 조세를 징수하며 관리를 감찰하는 등 무신정권의 중추적인 정청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이 교정도감의 장관인 교정별감은 무인정치기구의 최고직으로서 무인집정의 표시가 되었다.
최씨정권기에는 교정도감 외에 독자적인 인사행정기구인 政房은 최우가 관리의 인사를 처리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 설치한 것으로 이것은 문무관의 인사를 관장하는 이부 ․ 병부 등의 공적기관을 초월하여 독자적인 인사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최우는 문인들의 숙위기관인 書房을 두어 문사의 전문적 지식으로 고문역할을 담당케 하였다.
한편 최씨정권은 그의 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무력장치로서 사병을 조직하였는데 처음 정중부 등은 무신란을 일으킬 때 국가의 공병인 부병을 이용하였으나, 무신정권을 수립한 후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 집에 무장한 문객과 가동을 양성하였다. 뒤에 경대승은 100명의 결사대(사병집단을 조직화)를 사제에 유숙케 하고 이를 都房이라 불렀는데, 이 도방은 최씨정권에 그대로 계승되어 최충헌은 이를 6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숙위케 하였고, 최항 때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36번으로 확장되었다.
도방과 함께 최씨정권의 무력기반이 된 것은 三別抄였다. 삼별초란 처음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아 이를 막기 위하여 夜別抄(야별초)를 둔 데서 비롯하여 그 수가 많아지자 이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는데, 그 후 몽고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해 온 자들로 神義軍(신의군)을 편성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국고에서 지출되는 녹봉을 받으면서 군대와 경찰 등의 공적인 임무를 띄었으므로 순수한 사병집단인 도방과는 달리 공병의 성격을 가졌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도방과 함께 무신정권의 특수혜택을 누리면서 사병 노릇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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