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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이야기 | 패션의 역사를 바꾼 '가브리엘 샤넬(Chanel)'

곰고로곰 2023.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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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E110

 

 

위대한 디자이너 샤넬

'샤넬의 의상을 하나라도 갖고 있지 않은 여성은 절망스럽게도 패션의 승리자가 될 가망이 없다이 말은 1915년 미국의 대중잡지 <하퍼스 바자>에 실린 것이다. 그 후 근 한 세기가 흘렀고 이 말은 이제 진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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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샤넬이라는 의상은 하나의 브랜드를 넘어 패션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다. 샤넬의 창시자, 가브리엘 샤넬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유산인 샤넬 스타일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여성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패션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남는다고 한 그녀의 유명한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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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의 가장 유명한 디자인은 투피스, 혹은 스리피스로 구성되는 수트이다. 1차 세계대전 중에 만들어져 1939년까지 유행했던 이 수트는 1950년대 샤넬의 재등장과 함께 다시 나타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년 디자인이 조금씩 바뀌면서 수백 가지로 변형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샤넬의 수트에는 샤넬의 기본 정신이 그대로 살아 있다.

 

‘20세기의 정신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샤넬 의상의 기본 철학은 단순성과 실용성이다. 샤넬의 트레이드마크는 놀랍도록 단순한 검은 드레스이다. 같은 직물로 만든 카디건을 걸쳐 입도록 된 이 검은 드레스는 그 외의 다른 것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만큼 단순하면서 동시에 완벽하다. 전쟁의 혼란으로 단순성이 그 시대의 유행이 될 만큼 각광받았다지만, 모든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오늘날에도 샤넬의 스타일이 여전히 사랑 받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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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은 여성의 우아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실용성을 지향한다. 샤넬의상의 모든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자유를 위해 존재하고 탄생한다. 저지나 벨벳, 실크 혹은 트위드로 만들어진 샤넬의 수트는 일단 부드러워서 움직이기에 편리하며, 주름을 넣어서 걸을 때도 전혀 불편함이 없다. 그리고 샤넬의 옷에는 포켓이 있으면 좋겠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곳에 포켓이 달려 있다. 오늘날 샤넬의 수트를 입는 여성들은 이러한 실용성과 편리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거기 숨어 있는 샤넬의 정신은 미처 느끼지 못하기 쉽다. 그러나 샤넬의 시대에는 스커트의 길이가 짧아진 것만으로도 혁명이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옷자락이 땅에 끌려 먼지를 쓸고 다니는 트레인이나 무릎 부분의 통이 좁은 ‘호블 스커트가 유행이었다. 호블 스커트를 입으려면 보폭을 좁게 고정시키기 위해 두 다리를 연결하는 특별한 대님을 착용해야 했다그러한 시대에 샤넬은 치마의 길이를 줄여 여성들의 결음에 자유를 주었으며, 스커트에 주름을 잡아서 여성들도 다리를 꼬고 앉을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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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오늘날까지 샤넬의상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은 무엇보다 편안함이다. 샤넬의상은 착용했을 때 어떤 부분도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다. 샤넬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촉감이 좋지 않은 천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의 천을 선택하면 동작에 따라 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게 될 때까지 모델들에게 천을 씌워놓고 팔 다리를 한없이 흔들라고 했다고 한다. 샤넬은 그 어떤 아름다움도 자유보다 우선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흔히 실용성은 우아함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거나 혹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샤넬의 의상은 실용적이면서 동시에 우아하다. 샤넬은 20세기의 새로운 여성상을 위해, 그리고 그에 걸 맞는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남성복의 디테일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여성적인 의상을 만들어낸 것은 그녀가 인류에게 선물한 기적처럼 느껴진다.

 

샤넬 스스로도 자신을 일컽어 ‘20세기에 가장 합당한 삶을 살았던 최초의 인물이라고 평했지만 샤넬이라는 한 여자의 삶도, 그녀의 의상도 여성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한 20세기라는 시대를 떠나서는 결코 그 의미를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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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샤넬의 인생

버나드 쇼가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여성 중의 하나로 꼽은 가브리엘 샤넬은 1883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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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 떠돌며 포도주를 팔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사랑했던 불쌍한 어머니는 샤넬이 12살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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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벽이 심한 아버지인 알베르는 자식들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희생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아들들은 농가에 입양시켰고 딸 셋을 수녀원에 보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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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에서는 원생들의 장래를 위해 부엌일과 바느질을 가르쳤다. 이때 샤넬의 언니와 동생은 바느질을 제법 잘하였지만 샤넬은 바느질이 서툴러서 바느질하는 시간보다 바늘을 찾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하니 매우 아이러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그녀가 20세기의 패션을 이끌어 가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하였겠는가.

 

그러나 수녀원의 생활은 그녀의 미적 감각과 성격에까지 스며들어 훗날 샤넬룩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수녀원의 성당에 앉아 공상에 잠겨 바라보았던 스테인글라스의 한 문양은 C자 두 개가 겹쳐진 유명한 샤넬의 로고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샤넬의 스타일이라고 말 할 수 있는 흑백의 조화 역시 그 시절의 영향이라고 한다. 수녀의 회랑 모자이크는 물론 수녀복, 심지어는 고아원 원생들의 유니폼 또한 대조적인 흑백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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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을 나온 수 노래를 좋아하던 샤넬은 물랭이라는 작은 도시의 한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비쩍 마른 샤넬은 미인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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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누가 코코(그녀의 별명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를 보았나요"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우아한 기병대 장교이던 에티엔 발상을 만나게 된다. 그는 샤넬을 상류계급의 생활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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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가 원했다면 평생 발상의 보호아래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발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번화가 캉봉거리에 모자가게 ‘메종 샤넬’을 열었다. 그녀가 가진 희망이라곤 발상의 친구들의 샤넬의 모자를 좋아한다는 것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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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돈 많은 여러 연인들을 만난 샤넬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제1차 세계 대전 전에 파리의 캉봉 거리와 도빌에다 부티크를 개설했다. 샤넬은 자신의 성공이 일부 전쟁의 덕을 보았음을 인정한 최초의 사업가이다. 사실 도빌은 그 당시에 멋쟁이 고객들의 피난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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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티크의 성공에 힘입은 코코 샤넬은 양성적이고 단순화된 독특한 스타일을 세련되게 가다듬었다. 그녀는 자신의 갈색 머리를 자르고, 단순하고 입기 쉬운 드레스, 소매 없는 파티 드레스, 그리고 저 유명한 앙증맞은 검정 드레스와 2색의 구두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녀가 만든 '샤넬 NO. 5'1921년에 출시된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향수가 되었으며 마릴린 몬로는 훗날 이 향수가 자신이 침대에서 입는 꼭 한 가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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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에게 제2차 세계 대전은 1차 대전만큼 그렇게 득이 되지는 못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그녀는 파리에 남아 있었고, 점령자 독일인들과의 관계는 해방 후 그녀에게 몇 가지 문제를 안겨주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녀는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가기로 결심하여, 회사는 1954년까지 문을 닫게 된다.

 

이로써 샤넬의 경력에 조종이 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코코 샤넬은 71세의 나이로 은둔해 있던 곳을 떠나와 다시금 파리에다 부티크를 열었다. 그때 그곳에서 그 유명한 장식끈을 단 트위드 투피스가 만들어졌고, 이 투피스의 성공으로 회사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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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은 그때부터 약간 엄숙한 복장을 진주 목걸이와 팔찌로 장식하였으며, 서슴지 않고 보석에다 환상을 가미시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스코트인 동백꽃이 그녀가 만드는 모든 상의 안쪽에 브로치로 부착되었다. 또 다른 마스코트로는 누비 식으로 속을 넣은 핸드백이 있으며, 1955년에는 C자가 서로 교차한 모양의 핸드백 잠금쇠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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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샤넬은 1971110일 리츠에서 혼자 숨을 거두었다. 디오르회사 뉴욕 지점의 디자이너 가스통 베르틀로가 4시즌 동안 샤넬 회사의 콜렉션을 주도했다. 그 후에는 발렌시아가 회사에서 베르틀로의 동료였던 라몬 에스파르자가, 그 다음에는 샤넬과 매우 밀접하게 일했던 아틀리에의 두 재봉 담당자가 애스파르자의 뒤를 이었는데, 이들은 샤넬의 스타일을 매우 충실하게 이어나갔다.

 

그리고 1983년에 칼 라거펠트는 샤넬 룩에 경의를 표하는 콜렉션들을 디자인함으로써 회사를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1991년 봄, 그는 형광색에다 번쩍이는 금속 조각으로 수를 놓은 투피스를 패션쇼에서 선보였다. 하지만 그가 1992-93년 가을에 생애 최고의 성공을 거둔 것은 검정 가죽으로 만든 오토바이 주자 스타일이었다. 박식하고 상식이 풍부한 그는 시대와 조화를 잘 이루면서도 코코의 불경한 정신을 잘 표현했다

 

 

여성 해방운동의 지지자, 샤넬

노르망디 연안의 유명한 휴양도시 도빌의 공토비롱 거리에 샤넬의 이름이 걸린 것은 1913년이었다. 흑백 줄무늬 블라인드에 가브리엘 샤넬이란 이름이 대문자로 새겨진 도빌의 상점에는 모자뿐만 아니라 옷이 진열되기 시작했다.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목덜미 부분에 커다란 모자를 단 세일러복, 기수들이 입는 조끼. 얇은 재킷, 마직물 스커트와 편물 스웨터 등, 숙녀의 정장으로 보기 어려운 파격적인 옷들이었다. 당시 편물은 서민들의 작업용 조끼나 목도리를 만드는데 쓰이는 소재였던 것이다.

 

샤넬을 어떤 디자이너도 만들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의 옷을 만들었고 그 옷을 직접 입었다. 옷을 만들면 자기가 먼저 입어보는 게 샤넬의 방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불편한 옷, 어울리지 않는 옷은 다른 여성들에게도 그러리라고 여겨 만들지 않았다. 곧이어 샤넬 상접은 도빌에서 최고의 판매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편물 옷도 물론 인기만점이었다. 휴양지에서라면 부유층 여성들도 편하고 가벼운 편물 옷을 좋아할 거라는 샤넬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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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남성들의 속옷감으로나 쓰이는 저지로 여성복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저지를 파는 사업가조차 그녀를 비웃을 정도였다. 주름이 생기고 구김이 많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저지의 특성을 이용하여 허리를 조이지 않는 반코트와 수도복처럼 단순한 스타일의 옷을 만들어냈다. 샤넬의 성공으로 저지는 옷감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으며 그 후 모든 사람들이 저지를 이용한 것은 물론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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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의 모든 패션은 그녀의 출신이나 과거. 그녀 자신의 체형에서 착상을 얻은 것들이었다. 수녀원의 무료 기숙생이었던 샤넬은 값이 저렴한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단순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하였다. 샤넬의 옷을 대부호에게는 볼품 없는 옷이라고 비난했던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푸아레의 말이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나 다만 그는 시대가 샤넬이 만들어내는 패션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샤넬의 옷을 한층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과 함께 거리에는 남자들이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메꾼 것은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일하는 여성들에게 샤넬의 옷은 적격이었다. 허리를 꽉 조이지 않는 옷, 상체와 신체의 곡선을 강조하지 않는 옷, 코르셋을 착용할 필요가 없는 옷. 길이가 짧아진 스커트, 이 모든 샤넬 의상의 특징은 여성들에게는 자유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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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과 모피로 장식하고 긴치마를 끌면서 경마장 관람석에 모습을 드러냈던 여성들은 이제 샤넬의 옷을 입고 전철과 버스를 타거나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남편 대신 회사를 경영했다. 전쟁은 여성의 삶을 급격히 변화시켰고, 샤넬의 의상은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역사의 시작, 그리고 연속...

20대 중반 이후 부유하고 매력적인 상류층 남성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숱한 염문을 뿌리던 샤넬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독일군 장교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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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 색출의 화살을 피해 ‘메종 샤넬’의 문을 닫았던 샤넬은 1954년 일흔한 살의 나이로 복귀하기까지 일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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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파리의 패션계는 크리스찬 디올이 이끄는 ‘뉴 룩’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다시 여성의 허리를 조이고, 코르셋을 채우는 세련되고 인공적인 뉴 룩 스타일을 샤넬은 물론 좋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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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잊혀진 샤넬이 재등장했을 때 패션잡지들은 샤넬이 옛날과 똑같은 단순한 드레스를 선보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샤넬의 옷을 요구하는 엄청난 수의 여성들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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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을 1917년 아흔 살이 가까워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옷을 만들었으며(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돌연 패션계를 떠났다가 나타난 그녀는 이러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쉬는 게 지겹다는 것을 깨닫는 데 15년이 걸렸어요. 이제는 허무에 빠져 있기보다는 차라리 실패하는 편이 더 나아요.”) 20세기의 여성들은 여전히 그런 샤넬의 옷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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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을 사치가 아닌 실용으로 생각했던 샤넬은 다른 디자이너들과 달리 복재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국 기성복업자들에게 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가격과 질이 제각각인 다양한 옷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샤넬의 의상이 그저 한 벌의 옷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상의 혁명이며, 하나의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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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샤넬의 사망 후에도 샤넬 기업은 샤넬의 독특한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특히 1980년대 들어 디자이너 칼 라커펠트가 샤넬에 입사하면서 샤넬은 가브리엘 샤넬이 했음직한 그러한 방식으로 활력을 되찾고 있다.

 

천재소년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라거펠트는 샤넬이 추구해온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미묘한 변화를 가미시켜 다소 평범해 보이기도 했던 샤넬의 드레스들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라거펠트를 통해 샤넬의 신화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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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샤넬 스타일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의상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드레스가 샤넬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으며, 샤넬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재해석되고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패션은 한마디로 말한다.

나는 여성의 몸에 자유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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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룩의 인식

샤넬은 장신구를 자신이 입는 의상과 여성에 대한 개념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녀는 인조 보석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비용을 적게 들이고도 옷의 분위기를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순하지만 세련된 드레스에 비싸지는 않지만 화려한 장신구를 더해 밋밋함을 없애고 더욱 실용적이고 화려한 드레스로 재 탄생시킨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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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부터 그녀가 마네킹들을 치장하기 위해 보석 디자이너 그리푸아와 로베르구셍에게 의뢰한 장신구들, 즉 십자형 메달이며 브로치며 보석 단추며 팔찌며 귀걸이며 펜던트며 목걸이 등은 창의력으로 보나 미적 감각으로 보나 하나같이 걸작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가브리엘이 자주 걸고 다니는 여섯 줄 짜리 진주목걸이와 수트로 구성되는 투피스는 샤넬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며 가장 중요한 일부이다.

 

가브리엘 샤넬  / 샤넬룩의 핸드백과 구두

 

누빔 소재로 된 천을 사용하고 금속성 체인으로 손잡이를 만들었으며 잠김형으로 핸드백을 열고 닫게 만든 것은 샤넬이 최초이다. 지금은 이러한 스타일의 핸드백이 많이 나와있지만 모두 샤넬 스타일의 핸드백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금속으로 된 손잡이는 끊어질 염려가 없으며 잠김형고리는 핸드백을 쉽게 열고 닫을 수 있으나 또한 쉽게 열리지 않고 튼튼해서 매우 혁신적이고 편리한 아이템이었다.

 

또한 그녀는 신축성 있는 끈을 달아 발꿈치를 드러내는 샌들(보기 흉한 금속 버클이 필요 없게 되었다.)을 창안하였는데, 스스로 앞부분에 검정색 가죽을 댄 베이지 샌들은 낮에 신었고 앞부분에 금색을 댄 베이지 샌들은 저녁에 신었다고 한다. 샤넬이 창조해낸 이 샌들은 1958년부터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 이 샌들은 발을 작아 보이게 하고(두 가지 색의 조화 덕분에), 다리는 길어 보이게 하는 데다 각선미를 돋보이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키가 작은 가브리엘 스스로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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