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본에서 지낸 소년기
1770년 12월 17일 독일의 본에서 요한 판 베토벤과 마리아 마크달레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세례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 날은 12월 15일이나 16일로 추정된다. 그러나 1810년까지도 베토벤은 자신이 1772년에 태어났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그를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만들기 위해 베토벤 본인에게도 나이를 속였기 때문이다.
폴랑드르 출신인 베토벤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 처음 본 정착했다. 할아버지는 퀼른 대주교 선제후의 궁정합창단에서 음악감독 자리까지 올랐고, 아버지 역시 선제후 궁정합창단의 테너 가수였다. 1773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알코올의존 증세를 보이면서 집안이 점점 가난해져, 베토벤은 열한 살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1778년 3월 26일 루트비히는 처음 공개 연주회에서 연주한다. 1782년에는 궁정 오르간주자 네페의 보조 연주자(무급)가 되었고 1783년 네페의 도움을 받아 현존하는 첫 작품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만하임에서 출판했다. 그 다음해에는 궁정악단의 정식 차석 연주자(유급)가 되어 광폭하고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1787년에는 대주고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후원을 받아 빈으로 갔다, 이때 모차르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빈 여행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두 달 만에 끝난다.
베토반은 그 후 계속 본 궁정악단에 있으면서 본 극장의 관현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기도 했다. ‘제2의 어머니’ 같았던 총리 요제프 폰 브로닝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브로이닝 집안의 네 자녀는 베토벤에게 평생의 벗으로 남았다.
1790년 런던 여행길에 본에 들른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악보를 보고 베토벤을 제자로 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하이든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1792년 본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해 12월에 사망한다.
본에서 작곡을 시작했으나 빈에서 완성,개작한 것을 제외하고 본 시절에 작곡된 그의 작품들은 다른 시기의 작품에 견주어 볼 때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토벤 전문 연주자들은 매우 흥미로워한다. 이들 작품에는 베토벤의 예술세계에 근간이 된 여러 다른 작곡가들의 영향, 그의 음악적 약점들, 시행착오 등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빈에 정착한 청년기
베토벤은 본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서북부 독일에서 즉흥연주에 능한 피아노의 장인으로 상당한 명성을 날렸다. 감수성을 강조하던 시대사조에 힘입어 그는 과거의 어떤 연주자보다도 청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었으며, 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빈의 귀족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브로이닝가에서 베토벤을 보고 그가 빈으로 진출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준 발트슈타인 남작은, 베토벤이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위대한 음악가라고 칭찬했으며, 빈 초기 시절의 후원자였던 카를 리히노프스키 공은 모차르트가 죽을 때까지 그를 후원했던 유일한 귀족이었다. 리히노프스키 공은 1800년부터 베토벤이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건없이 종신연급 600플로린을 주기로 한다. 이는 1806년 말 두 사람 사이에 격렬한 불화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된다.
베토벤은 작곡가로서 아직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그는 하이든의 도움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서 하이든 몰래 다른 선생들에게 배우곤 했다. 그 중 장크트슈테판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베르거는 옛 대위법 양식에 능통한 사람으로 베토벤에게 필요한 여러 기법을 가르쳐주었다. 베토벤은 황제 직속 음악감독이던 아노니오 살리에리에게는 성악 작곡법을 배웠다.
두 동생 카스파르 안톤 카를과 니콜라우스 요한이 빈으로 온다(1794~5년), 1795년에 베토벤은 빈에서 처음으로 공개 연주회에 등장했고, 그 후 3년간 베를린,프라하 등지를 순회공연하며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1800년부터는 대규모 공개 연주회를 시작해 외국에 널리 명성을 날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서서히 자신의 영역과 기법을 확장해갔으나 아직까지는 주로 피아노음악 작곡가로서 알려졌다.
작곡가로서 그의 재능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귀에 이상이 생긴다. 그 첫 번째 징후는 1800년 이전에 나타났지만, 몇 년 간은 별 변화가 없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02년경에 이르자 그는 자신의 병이 낫지 않을 뿐 아니라 점점 심각해진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하게 되었다.
난청의 장애를 극복한 시기
베토벤은 해마다 5~10월이면 빈 교외의 작은 마을을 옮겨다니면서 살았다. 그곳에서 긴 시간 산책하면서 악상을 떠올렸으며 스케치북에 이것들을 적어두곤 했다. 이들 스케치북은 베토벤의 작곡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는 즉흥연주에 능했지만 어떤 한 곡의 모양새를 가다듬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의 유명한 선율들도 처음 스케치 악보에는 별 특징이 없는 평범한 형태로 나타난다.
베토벤은 한 곡을 완성한 뒤에 다른 곡을 시작하지 않고 여러 곡을 동시에 작곡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한 곡을 서둘러 끝내는 법이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1804년에 스케치 악보를 쓴 교향곡 5번은 18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대체로 베토벤의 곡은 작곡 초기에 기록한 스케치 악보와 메모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베토벤이 나중에 다른 곡을 작곡할 때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초기 스케치 악보를 따로 보관해두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몇 년 동안 베토벤은 연극과 연관해서 작곡을 했는데 그의 전체 작곡기간에 비하면 이것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1801년에 그는 발레곡<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했고 1803년에는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그리스도>를 완성했다. 1804년에는 3번 교향곡이 완성되었는데, 이곡은 베토벤 음악의 분수령으로 간주된다. 이 시기에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피델리오(첫 제목은 레오노레)>가 발표된다. 베토벤은 극의 내용과 음악을 결합하는 데에 페르디난도 파에르와 루이지 케루비니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베토벤이 매우 숭배했던 케루비니는 <피델리오>와 비슷한 ‘구원’을 주제로 하는 오페라의 작곡가다. <피델리오>는 10여 년 사이에 세 번이나 손을 본 끝에 독일 극음악의 고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베토벤은 그 밖에 다른 오페라를 구성한 듯하지만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전보다 더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했다. 베토벤은 피아노 제자인 요제피네와 그녀의 사촌인 줄리에타 귀치아르디, 그리고 주치의의 딸인 테레제 말파티에게도 청혼한듯하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만다. 베토벤이 결혼할 수 없었던 이유로는, 첫째 그가 이상적인 결혼상대가 못 되었으므로 상대 여자들에게 계속 거절을 당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 증명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매독에 걸렸으리라는 설이 있으며, 귓병도 그 때문이라는 보고가 있다.
베토벤의 비생산기
저작권 개념이 체 형성되지 않았던 시대이지만 베토벤은 당시 다른 저명한 작곡가들에 비해 출판업자와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귓병이 더욱 심해져 심리적으로 몹시 예민해진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잘 내게 되어 빈의 음악가들과 관계가 나빠졌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횟수도 줄었다.
1809년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막냇동생 제롬이 왕으로 있는 베스트팔리아의 궁정악장이 되어달라는 제의를 받고 빈을 떠날 결심을 했다. 이에 루돌프 대공, 로프코비츠 공, 킨스키 공은 베토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빈에 계속 남아 활동하면 세 사람이 합심해 매년 4000플로린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계약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1811년 화폐가치가 절하되는 등 몇 가지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 루돌프 대공은 후원금을 높여주었고 이어서 다른 귀족들도 이를 따랐다. 그럼에도 정리정돈을 잘 하지 못하는 그의 생활습관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베토벤이 무척 가난하게 생활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1810년 베토벤은 작가 베티나 브렌타노를 알게 된다. 베티나는 1812년 테플리체에서 베토벤과 괴테를 만나게 해주었다. 베토벤은 괴테를 존경했지만 괴테는 베토벤을 그저 유명한 작곡가로 생각했을 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베토벤은 “괴테는 시인답지 않게 궁정의 분위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했고, 괴테는 베토벤에 대해 “길들여지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이며 세상을 혐오하는 것 자체는 나쁠 것 없으나 그래도 그러한 태도는 그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그다지 유쾌하진 않다”고 했다.
1819년경부터는 완전히 귀가 먹어 의사소통을 위해 공책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이 공책이 회화수첩이다. 여기에 친구들이 질문을 적으면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곤 했다. 이 시기는 그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지만 <웰링턴의 승리>같은 유명한(?) 졸작을 만들어낸 시기이기도 하다. 승리의 확신이 너무 일렀던 것이다. 이때 여러 가지 소송에 휘말리기도 한다. 특히 1815년부터 조카 카를(죽은 동생 카스파르 안톤 카를의 아들)의 양육권을 놓고 제수 요한나와 법정투쟁을 벌인 4년여 동안은 거의 작품을 쓰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동생은 형 루트비히와 자기 아내가 아들을 공동으로 양육하도록 유언을 남겼지만 베토벤은 제수 요한나가 부도덕하다면서 양윤권 독점을 위한 소송을 벌인 끝에 승소했다. 덕분에 베토벤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엘리시움을 완성한 만년
침체를 딛고 9번 교향곡, 현악 4중주 등을 통해 베토벤 음악의 이상향 엘리시움을 완성한 시기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은 1792년 이후 작곡된 전체 작품의 양에 비해 아주 적다. 그러나 수는 적어도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이전에 그가 작곡한 어떤 작품보다 음악적으로 깊이가 있고 작곡가의 성숙한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점점 더 사람을 피하게 된 그는 자기 자신과 경제적인 문제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늘 좋은 결과를 보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장엄 미사>는 베토벤이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높이 평가하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대체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그랜드 오라토리오’다. 원래 <장엄 미사>는 1819년 루돌프 대공이 올뮈츠의 대주교로 임명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서품식을 위해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서품식이 있은 지 3년 뒤에야 완성되었다.
9번 교향곡 <합창>도 1842년 완성되었다. 그는 초연에서 직접 지휘하지는 못하고 지휘자 옆에서 악보를 넘기며 박자를 맞추었는데, 귀가 멀었기 때문에 연주가 끝난 뒤 쏟아져나온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도 듣지 못하다가, 독창 가수들이 그를 청중 쪽으로 돌려세워주어 비로소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9번 교향곡은 대규모 작품으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조카 카를에 대한 베토벤의 사랑은 지대한 것이었지만, 베토벤은 그렇게 좋은 후경인은 되지 못했다. 삼촌인 베토벤과 어린 카를 사이에 심한 말다툼이 자주 벌어졌고, 급기야 1826년 카를이 대학입학시험 준비 도중 자살을 기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카를은 다행히 병원에서 몸을 회복했고, 베토벤은 자소 못마땅했지만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카를을 군대에 들어가게 했다. 그러나 그는 군대에서도 그렇게 잘 지내지는 못했다. 베토벤에게도 이 사건은 깊은 상처가 되었다.
병상의 베토벤
1826년 동생 요한의 집에서 지내다가 빈으로 돌아오던 길에 병을 얻은 것이 베토벤에게는 결정적인 타격이 된다. 그는 빈에 돌아와 병상에 누웠고, 유언장을 작성한다.
그는 1827년 3월 26일 저녁 5시 경부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는 가운데 5시 45분경 간경변증으로 사망했다. 임종을 지킨 사람은 어느 여성과 슈베르트의 친구이자 작곡가인 휘텐브렌너 두 사람뿐이었다. 휘텐브렌너에 따르면 죽기 직전 베토벤은 갑자기 눈을 뜨고 허공을 향해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었다고 한다.
낡은 캐비닛의 비밀서랍에서는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쓴 유서, ‘불멸의 연인’에게 보낸 편지 세 통, 줄리에타 귀치아르디의 초상화, 그리고 후대에 베토벤 연구가 메이너드 솔로몬이 안토니아 브렌타노로 밝혀낸 여성의 초상화가 나왔다.
사흘 뒤 3월 29일에 치러진 장례식에는 조문객이 2만여 명이나 참석했다. 운구한 이들 중에는 유명한 작곡가 후멜이 있었고, 슈베르트 횃불을 들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극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추도사를 썼고, 배우 안쉬츠가 낭독했다.
“베토벤은 사랑이 넘치는 자신의 본성으로 세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고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혼자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제2의 ‘자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나 생애의 끝까지 그의 가슴은 만인을 향해 뜨겁게 고동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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