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문화이야기

주거문화이야기 | 생활주거 문화의 변천사

곰고로곰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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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주거의 사전적인 의미의 주거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가장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공간이며 주거는 인간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다.

 

주택 주거

 

주택과 집은 같은 의미이지만 주택과 주거는 같은 의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거의 기본은 사람과 행위 , 장소 이 세 가지이다. 우리는 물리적인 공간이며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있는 공간을 우리는 주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주거의 기본인 사람이 없다면 그 곳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없다는 것인데 , 이건은 장소가 제공 될 지라도 이미 주거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죽어있는 공간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주거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사회 환경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주거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행위들이나 그에 따라 생겨나는 기능들이 그 나라의 문화적 특징을 나타내고 구별 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주거의 형태 또한 그 시대의 상황이 반영이 된 것으로 한 나라의 건축물을 통해서 시대적 상황과 발전정도, 문화적 상황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한옥에서 본다면 따뜻한 겨울을 보내기 위한 온돌과 시원한 여름을 보내기 위한 마루는 우리의 고유한 주거형식으로 주거의 문화적 특색일 수 있다. 이렇듯 주거는 한 나라의 문화적 특색과 특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거의 변천과정

1. 구석기시대의 집

이 시기의 주거형식은 동굴이 주로 사용되었던 것을 추정하고 있으나 중기구석기 시대부터 간단한 주거형태가 발견되고 후기구석기시대로 들어오면서 중앙에 화로가 있는 주거지 형식이 발견되고 있다. 이 당시의 주거는 대부분 먹이를 쫓아 이동하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정착한 주거가 아니다. 임시 거처로서 반정주적 주거형태를 보인다. 또한 도구가 발달하지 못하여 재료를 다듬어 집을 지을 수준이 되지 못하였다.

2. 신석기시대의 집

신석기시대의 주거는 주로 강가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생활이 주로 어로에 의한 채집경제였던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거는 동굴과 바위그늘 등을 사용하였으나 대표적인 형태는 움집이다. 움집은 땅을 일정한 깊이로 파고 그 위에 간단한 구조방식으로 지붕을 덮은 건축형태로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 원시적인 형태나마 건축의 개념이 도입된 주거를 축조한 것이다.

 

3. 청동기시대의 집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00년부터 철기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300년까지의 기간이다. 건축구조발달의 관점에서 보면 기둥을 세우는 방식도 구멍을 뚫어 새우는 방법, 바닥에 직접세우는 방법, 초석을 이용하는 방법 등 다양하게 보이지만 이전시대에 비하여 초석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지붕이 무거워지면서 하중에 의한 기둥의 침하방지를 고려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이 시대의 주거는 다양한 구조양식을 보인다. 지붕의 형식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모임지붕 등이 보이고 동자주의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동자주는 보다 발전된 형식의 구조로서 신석기 시대의 구조방식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이렇게 구조가 다양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도구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청동기는 석기보다 정밀한 도구제작이 가능하다. 이러한 정밀한 도구로 목재를 보다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게 되었다.

 

4. 초기철기시대의 집

이 시대에는 고대국가로 이행하는 단계이다. 따라서 계급의 분화에 따른 새로운 건물과 방어시설이 보다 강화되었다. 지배계급의 건물인 궁궐 등과 대옥(大屋)은 지상건물로서 간단한 형태의 공포 등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물의 형태는 고구려 벽화에 나온 정도의 집과 문양기와등을 사용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일반인의 주거는 선사시대 이래로 사용되어 왔던 수혈주거가 그대로 이용되었으며 청동기시대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거의 평면은 장방형이고 3-6평내외이고 수혈의 깊이는 20-30cm정도로 많이 낮아졌다. 점점 지상화로 진행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5.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집

삼국시대는 이미 왕권이 확립된 시기이다. 따라서 초기철기시대보다는 규모가 큰 건축의 수요가 높았다. 따라서 건축기술의 수준도 급속도로 발달하여 삼국시대 후기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울 만큼 높은 건축수준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거건축도 매우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와 후기와는 그리고 귀족과 평민의 주거에는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귀족의 주거로 보이는 집안의 동대자 유구는 완벽한 지상주거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유구를 보면 아직 수혈주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후대로 내려가는 사비시대(538-660)의 경우에도 움집으로서 바닥을 파내려 간 수혈식 주거였다. 즉 삼국시대 후기까지도 일반인의 주거는 수혈식 주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옥사조에는 신분계급에 따라 집의 규모를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은 매우 높은 수준으로 지금과 거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건축 수준은 철감선사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겹처마, 배흘림, 기와 설치 방법, 부연과 서까래의 가공 방법이 등이 지금의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미 건축 구조의 완성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단 구들의 사용이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하여는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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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려시대의 집

고려시대의 집에서 중요한 것은 온돌의 발달에 관련된 부분이다. 삼국시대까지 쪽구들형식으로 사용되어왔던 것이 고려시대에 들어 방 전체에 구들을 들이는 형식으로 변화된다. 1123년에 작성된 서긍의 <고려도경> 28 와탑(臥榻)편을 보면 와탑은 국왕, 귀인, 대신과 중국사신들에게만 사용되고 일반서민은 '땅에 굴을 파고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는다. 대체로 고려는 겨울철에 아주 춥다. 또 솜과 솜옷이 적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추운 기후 때문에 온돌이 겨울을 나기 힘든 서민의 난방시설이었음 보여준다. 신의주 상당리나 평북 동창군 학성리 집터에서는 11세기로 추정되는 전면 온돌의 유구가 발견되어 서민주거에서는 북쪽으로부터 온돌이 전면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본다.

 

7. 조선시대의 집

조선시대의 집은 크게는 조선 초기와 후기로 나누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초기의 집은 거의 남아 있는 유구가 없다. 아산의 맹씨행단의 경우 고려시대 최영이 1330(충숙왕 17)에 지어 자신의 사위인 맹사성에게 물려준 집이나 1482년 완전 해체하여 좌향(위치)을 바꾼 중수(重修)가 있었고 그 후에도 1754년과 1759년에 수리가 있었다.(맹씨행단 건축유적지 발굴조사 보고서/84) 한차례 이건된 것이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당시의 원형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정연상은 맹씨행단에 대한 논문에서 '인방 부분의 변화가 바닥구조의 변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移建을 하면서 온돌을 들였고 이전에는 방전을 깔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맹씨행단 건축유적지 발굴조사보고서(1998)에 의하면 초기의 모습은 현재와 같은 ㅐ자 형이 아니고 ㅡ자 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며 목구조는 고식(古式)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전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맹씨행단의 구조가 당시의 대표적인 구조라고 할 수는 없다.

 

8. 근세에서 현재까지의 집

1876(고종 13)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에 의해 강제로 개항한 이후 우리나라에는 서구문화의 유입이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서구문화는 기독교를 앞세워 우리의 정신적인 부분도 변화시켜버렸다. 또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건축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첫 번째 변화는 새로운 종류의 건물의 건립이다. 교회, 은행, 기차역사 등 새로운 문화가 도입됨에 따라 그에 따른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또한 우리 전통건축에서도 새로운 공법과 재료의 도입이 이루어졌다. 유리가 도입됨으로서 과거 창호지 문에서 유리문으로 대치가 되었고 마루도 과거의 우물마루에서 쪽마루로 변화되고 벽돌의 사용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집이 파괴되고 또한 새마을 운동이라는 정권에 의한 현대화 운동이 전개되면서 전통의 건축은 거의 사라졌고 서울은 산업화 때문에 급속한 인구유입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주거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주거수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동주거의 개념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아파트의 변화를 통해 우리의 주거개념의 변화를 읽어볼 수 있다. 초기의 아파트는 라디에터 난방에 일부가 온돌(연탄보일러)있었다. 초기에는 구들까지 설치된 형식의 아파트도 있었다. 이러한 난방방식이 약 20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현재와 같이 전체가 바닥난방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30평 대 아파트에 있었던 가정부방이 사라지고 식당의 개념이 발전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소득이 늘어나면서 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주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초고층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철골조의 아파트가 다시 등장하였다. 또한 도심내의 주거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상업지역에 지어진 주상복합아파트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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