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세계사이야기 | 스페인 내전

곰고로곰 2023. 2. 8.

 

 

 

벌거벗은 세계사 E85

 

 

프란시스코 프랑코

1892124일 갈리시아 지방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남. 1907년 톨레도보병사관학교에 입학해 3년간의 사관학교 생활을 마친후 1910년 보병소위가 되었다. 1915년 스페인 육군에서 최연소 대위에 오르고 1923년 스페인 외인부대 총사령관직을 맡아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리프족이 벌인 독립 운동을 진압하는데 전공을 세웠다. 19252월 대령으로 진급한 프랑코는 9월 프랑스군과 합동해 모로코와 벌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화려한 전공을 인정받아 34세에 여단장으로 승진하여 사라고사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교장까지 맡는다.

 

벌거벗은 세계사 E85

 

1931414일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들이 승리하여 제2공화정이 수립되자, 국왕인 알폰소 13세는 퇴위를 주장하는 여론에 굴복해 망명길에 오른다.193311월 총선에서 다시 우파가 승리하자 프랑코는 사단장으로 진급한다. 193410월 발생한 아스투리아스 노동자 총파업을 무자비하게 진압해 이공을 인정받아 모로코 주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35년 육군 참모부장에 올랐다.

 

19367월 반파시즘 공화주의군사동맹에서 모로코에 집결한 쿠데다 지도자들을 살해하려고 계획한 것이 누설되어 팔랑헤당에서 먼저 반파시즘 공화주의군사동맹 회원 호세 카스티요 세리아 중위를 암살한다. 그러자 반파시즘 공화주의군사동맹은 우익 지도자 칼보 소텔로를 암살하는 복수극을 벌였는데, 결국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프랑코와 일부 장군들은 공화 정부에 대항한 군사 반란을 일으킨다.

 

1936101일 부르고스에서 육··공군 총사령관 겸 국가 원수에 올라 권력을 장악. 1939413년여에 걸친 내전이 프랑코 측의 승리로 끝난 후 스페인은 37년 동안 절대 권력을 지닌 프랑코 지배하에 놓인다. 프랑코는 1947년에 국민투표를 실시해 스페인 통치 체제를 군주제로 규정.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종신 섭정을 확정한다.

 

 

스페인 내전의 정당과 정치 단체들

1. 국민 진영

1) 왕당파(알폰소 국왕 지지파) / 에스파냐행동, 에스파냐혁신

국왕 알폰소 13세와 그의 아들이지 바르셀로나 백작이기도 하고 지금의 국왕 후안 카를로스의 아버지이기도 한 돈 후안을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왕당파는 보수적인 군 장교들이 다수를 이루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옛 스페인을 이끄는 본래의 지도부라고 생각했다. 일반 민중의 지지는 미미했다.

 

2) 카를로스파/ 전통적 교우회

레케테 : 카를로스파 의용군, 펠라요 : 카를로스파 청년 운동 조직, 마르가리타 : 카를로스파 여성 봉사 단체

왕으로 즉위한 부르봉 왕가가 19세기 자유주의에 오염되었다고 생각. 알폰소 가문의 라이벌 돈 카를로스의 부르봉 가문을 지지했고, 전통주의적 강경 가톨릭 왕정의 이념을 선호했다.

 

3) 팔랑헤당

화살들 : 팔랑헤당 청년 운동 조직, 사회구호 : 팔랑헤당 여성 봉사 단체

팔랑헤당은 1933년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설립한 파시즘 성향의 소규모 정당이었다. 1934년에 좀 더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띤 혼스와 합쳐졌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를 따르면서 무엇보다도 옛 스페인의 민족주의적 이상을 신봉하는 근대적 반동 분자들, 자신들의 반자본주의적 이념이 상류층 도련님들에 의해 유린되는 것에 분노를 느끼는 사회주의 계열 간의 대립이 존재했다. 그 중 좌파적분파는 1936년과 1937년에 다수의 기회주의자들이 유입됨에 따라 입지가 더 좁아졌고, 그들의 영향력은 프랑코가 팔랑헤당을 카를로스파와 병합하는 방식으로 국민 운도을 제도화하면서 거의 분쇄되었다.

 

4) 통합팔랑헤당 : 팔랑헤당과 카를로스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국민 진영 정치 운동의 융합체. 19374월 프랑코의 명령으로 만들어졌으며 프랑코는 이 당의 수장이 되었다.

 

2. 공화진영

1) 공화연합 : 마르티네스 바리오가 이끈 공화연합은 레룩스의 급진공화당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 만든 중도 우파 정당이었다. 그래서 이 당은 19362월 선거를 위해 모인 인민전선연합에서 우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 당의 주요 지지자들은 자유주의 성향의 전문가와 사업가들이었다.

 

2) 공화좌파 : 아사냐가 이끈 공화좌파는 19344월 아사냐의 '공화행동', 카사레스 키로가의 '갈리시아 자치당', 그리고 급진 사회주의 자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3) 카탈루나 공화좌파 : 유이스 콤파니스가 이끈 '카탈루냐 공화좌파'는 아사냐가 주도한 공화좌파의 카탈루냐 판이라고 할 수 있다.

 

4) 에스파냐 사회주의노동자당 : 에스파냐에서 지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떠오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가 이끄는 사회주의자들이 1879년에 세운 정당.

 

5) 노동자 총동맹, 사회주의청년단, 에스파냐 공산당, 통합사회주의청년단, 카탈루냐 통합사회당

 

6) 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 : 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은 안드레스 닌과 호아킨 마우린이 이끌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당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당'이라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며, 그보다는 소련의 좌익 반대파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흔히 포움이라 불렸으며, 이 책에서는 주로 '통합노동자당'으로 표기했다.

 

3. 인민전선의 동맹 세력

1) 절대자유주의 운동 : 아나르코 생디칼리슴 계열과 아니키즘 계열.

전국노동연합, 이베리아 아나키스트연합, 이베리아 절대자유주의청년연합, 자유여성

 

2) 바스크 지역

바스크 민족주의당 : 보수적 기독민주주의자들의 당

바스크 민족주의행동 : 바스크 민족주의당에서 떨어져 나온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소규모 단체.

바스크 노동자연대 : 바스크의 민족주의적 가톨릭 노동조합.

 

 

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란 또는 에스파냐 내란이라고도 한다.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반란군 사이에 있었던 내전이다. 

 

벌거벗은 세계사 E85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레콘키스타와 로마 가톨릭 교회 외의 종교들을 탄압한 스페인 종교재판으로 대표되는 스페인의 중세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왕정과 특권화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탄생시켰다. 스페인의 전신(前身)인 카스티야 왕국와 아라곤 왕국은 무어인을 상대로 7백년간 전쟁을 벌였다. 레콘키스타가 완료된 후 스페인 왕국은 스스로를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라 자처하였으며, 교황에게 요청하여 국왕이 종교재판을 관할하는 특혜를 얻었다.

 

벌거벗은 세계사 E85

 

1834년 이사벨 2세가 중지할 때까지 스페인 종교 재판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였다.스페인 제국은 오랜 전쟁과 종교 재판의 지속으로 봉건 군국주의적인 성격의 띄었다. 중세 후기 1,400만명이었던 스페인의 인구는 18세기 후반 700만명으로 감소하였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도 스페인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토지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경제구조가 원인인 빈부의 격차가 극에 달했다. 이에 더해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에 반발하는 지역주의 운동이 16세기 이래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왕정 종식의 요구로 이어졌고 1873년 스페인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스페인 제1공화국은 분리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제를 표방하였으나,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스페인 내 각지역의 분리 독립 운동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187412, 마드리드의 군사 총독 파비아 장군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로서 스페인 제1공화국은 군부 독재로 변질되었다.

 

스페인 제1공화국의 군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18741219일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이 이사벨 2세를 지지하던 각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알포소 13세를 국왕으로 추대하여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알폰소 13세는 1876년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를 표방하였다. 왕정복고 이후에도 스페인의 내정은 계급간의 극심한 갈등과 상호 보복이 계속되었다. 극좌파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의 주요 기득권층 가운데 하나였던 로마 가톨릭을 타도 대상인 지배계급으로 보아 교회를 파괴하였다.

 

벌거벗은 세계사 E85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극심한 사회 혼란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의 쿠데타는 지주, 교회, 부르조아와 같은 기득권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리베라는 스스로 총리가 되어 군부 독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리베라는 사임하였다.

 

1930년 프리모 데 리베라가 사임하자 스페인의 정국은 혼란에 빠진다. 그동안 함께 권력을 누렸던 왕당파와 군부는 반목하고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에서는 군부의 쿠데타가 감지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의 총파업이 예고되었다. 1931년 알폰소 13세는 총선을 약속한다. 412일 이루어진 총선의 결과 공화파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자 414일 알폰소 13세는 망명한다.

 

벌거벗은 세계사 E85

 

공화국 정부의 가장 큰 현안은 토지개혁이었으나, 스페인의 소수 지배계급이었던 지주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저항으로 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대공황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어 계급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무정부주의와 파시즘 등의 극단주의가 대두되어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하였다.

 

19362월 총선 결과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473석 중 289석을 확보하였다. 의회를 장악한 인민 전선은 토지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이에 대해 스페인의 지주·자본가·로마 가톨릭 교회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마침내 19367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프랑코와 스페인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벌거벗은 세계사 E85

 

반란군의 형식상 지휘자는 왕당파 장군인 호세 산후르호였으며 에밀리오 몰라는 부사령관의 자리에 있었다. 몰라는 봄부터 반란의 중대한 계획들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7월이 될 때까지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핵심은 사관학교의 총장이자 1934년 사회주의자 진압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프랑코에게 있었다.

 

1936717일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마누엘 고데스 요피스는 스페인 변방의 섬에 제2공화국의 총리 카사레스 키로가가 군부의 군사행동을 우려하여 내린 조치로 인해 머물러 있었다. 요피스는 발레아레스 제도에 프랑코는 카나리아 제도에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처지가 된 반란의 공모자들은 두 장군에게 반란의 시작을 알리는 암호를 타전하였다. 1936717일 모로코에서 프랑코 장군이 스페인 제2공화국의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과 파시스트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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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파 정부는 쿠데타의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으나 이를 사전에 차단하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초동 진압에 실패함으로써 반란군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내전 초 공화파는 발렌시아와 스페인 동부 대부분을 지켜내고 있었다.

 

벌거벗은 세계사 E85

 

스페인 동부 중에서 프랑코파의 수중으로 넘어간 곳은 아스투리아스 지방, 칸타브리아 지방과 바스크 지방의 일부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코파의 점령지역은 확대되어 갔으며 결국 안달루시아 지방과 수도 세비야까지 함락되었다.

 

벌거벗은 세계사 E85

 

193941일에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프랑코측의 승리로 내전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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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정권

프랑코 정권은 내전 기간동안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지원받았고 스페인의 파시즘 정당인 팔랑헤와 동맹하였다.

 

벌거벗은 세계사 E85

 

프랑코는 애초에 반공주의이외의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지는 않았으나 내전을 거치면서 파시즘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였다. 정부의 조직은 스페인 의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나 정당 활동의 자유가 없었고 프랑코 스스로 종신 총리에 취임하여 권위주의적인 지배를 하였다.

 

벌거벗은 세계사 E85

 

1939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6월 프랑스가 붕괴하자 스페인은 추축국 편에 서 독일에 해군력을 지원하였고 나치에 저항 군인과 탈출하던 군인들을 돌려보냈다. 이 대가로 나치는 상응할 만한 군력을 제공하여 내전 동안 폭탄을 지원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401023일 엔다예에서 만나 추축국에 스페인이 가담할 것인가에 대한 여부를 논의했고 프랑코 측은 식량과 군사 지원, 지브롤터,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등등의 광대한 요구 조건을 달아 어떤 합의도 이뤄지지 못했다. 프랑코는 1943년 독일의 우세가 꺾여 불리해지자 완전 중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2차대전에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않은 쿠바 출신의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스페인 프랑코 정권 붕괴를 위해 라틴아메리카-미국 연합을 제안했다.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 측은 스페인이 추축국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국제 연합에 가입하려는 의사를 거부하였다. 프랑코 정부는 서방 국가들 뿐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의 입장에서도 유럽의 파시즘 일로에 서있는 잔류 세력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코 정부 비난 의결문이 통과되었고 결의안은 스페인 대사를 추방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각국 정부가 묵묵부답일 경우 불이익을 줄 방안도 강구했다. 2차 대전이후 고립되었다.

벌거벗은 세계사(만평, 풍자화) E85

 

 

참고 문헌

스페인내전, 엔터니비버, 교양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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