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갑신정변의 영향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과 개화당의 몰락
갑신정변의 실패의 결과 친청 수구파가 재집권하게 되었다. 정부수반과 군사권 및 재정권은 처음부터 친청 수구파가 장악하고 수도와 그 방위 역시 친청 수구파가 장악하도록 하는 한편, 종친으로서 개화당이 포섭하려 했던 이재원(李載元)과 친청적 성향의 온건 개화파들을 그 밖의 직책에 임용하였다.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를 외무협판에 임명하여 중용하였다. 수구파 정부에 일시 임용되었던 온건 개화파들은 얼마 후에 대부분 해임되었을 뿐 아니라 개화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각종 구실이 붙여져서 유배당하였다. 청군 측의 강력한 영향하에 친청 수구파 정부가 수립되어 국정을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친청적 수구파 대신들이 임명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개화당 요인들에 대한 추적과 살해·숙청이 가혹하게 시작되었다.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인 개화당 요인 중에서 국왕을 청군진영에 모셔 보내는데 호종한 홍영식·박영교·신복모 등 개화당 요인과 사관생도 출신 개화당 장사 7명은 국왕 인계 직후 재판도 없이 청군에 의해 10월 28일(양력 12월 6일) 밤 참살당하였다.
또한 재집권한 친청 수구파정권은 10월 21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을 ‘4흉’으로 규정하고, 외무독판 조병호와 협판 묄렌도르프 및 인천감리 홍순학에게 명하여 일본 망명차 인천에 가 있는 4흉을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들은 1대의 기마병대를 인솔하고 신속하게 김옥균 등을 인천까지 추격했으나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변수·유혁로·이규완·정난교·신응희 등 9명은 이미 천세환에 승선한 이후였기에, 김옥균 등 개화당 요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에도 수구파 정부는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려 계속 추적해 개화당 가담자들은 국내에서 몰락하였다.
(2) 조선·일본의 교섭과 한성조약의 체결
갑신정변은 조선·일본·청국의 삼국관계에도, 따라서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갑신정변의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 조야에서는 일본인 38명이 살해된 사실을 들어 청국에 대한 성토 여론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청국을 성토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의 수구파정부에 군사적 위협을 가해서 조선 정부를 굴복시켜 침략을 강화하고 배상금까지 받아 내려 획책하였다.
그에 따라 일본정부는 외무대신 이노우에(井上馨)를 특파전권대사로 임명했으며, 이노우에는 군함 7척에 육군 2개 대대와 회담에 필요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1884년 11월 14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조선측에서는 김홍집을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조병호와 묄렌도르프가 보좌하여 대응케 하였다. 이노우에는 제1차 회담에서는 일본인 피해를 모두 조선 측에 전가시키는 일방적 주장을 하더니, 11월 23일의 제2차 회담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본 측이 작성해 온 무리한 요구의 조약 초안을 제출하였다.
① 조선정부가 정식으로 일본에 사과할 것. ② 정변 때 죽은 일본인에게 배상금을 지불할 것. ③ 이소바야시(磯林) 일본군 대위를 살해한 자를 색출하여 처형할 것. ④ 일본공사관을 건축해 줄 것. ⑤ 일본공사관에 호위병을 배치할 것. |
이노우에는 조선정부가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힘으로 처리하겠다고 노골적으로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군함 7척과 2개 대대 일본군의 무력 위협에 눌려 1884년 11월 24일(양력 이듬해 1월 9일) 초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성조약이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에 체결되었다.
제1조 조선국은 국서(國書)를 보내어 일본에 사의를 표명할 것. 제2조 이번 일본국 피해인민의 유족과 부상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또 상인의 재물이 훼손 약탈된 것을 변상하기 위해 조선국은 11만원을 지불할 것. 제3조 이소바야시 대위를 살해한 흉도를 조사 체포하여 중형에 처할 것. 제4조 일본공사관은 신기지(新基地)로 옮겨 지을 것을 요하는 바, 마땅히 조선국이 그 기지를 제공하여 공사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함에 족하도록 할 것이요, 그 건축에는 조선국이 다시 2만원을 지불하여 공사비에 충당하도록 할 것. 제5조 일본호위병의 영사는 공사관의 부근 토지에서 택정하되 제물포조약 제5조에 비추어 시행할 것. |
(3) 청국·일본의 교섭과 천진조약의 체결
청국정부는 갑신정변의 보고를 받자, 안남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사건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하고,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사건처리의 책임을 맡기었다. 일본 정부 또한 청국세력을 한반도에서 내보내기 위해 청국과 전쟁을 하는 것을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한성조약으로 조서에서 기대 이상의 이익을 얻어냈으므로 당분간 청국과 타협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이에 일본 측은 청국주재 영국전권공사 파아크스(Harry S. Parks, 巴夏禮)를 중재로 청국에게 청·일 양국군의 한반도로부터의 철수를 제의하니, 청국 측도 동의하였다. 이에 청국 측 수석전권대신 이홍장과 일본 측의 특파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1885년 3월 4일(양력 4월 18일) 중국 천진에서 이른바 천진조약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체결되었다.
① 청국은 조선에 주둔시키고 있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은 공사관 호위를 위하여 조선에 주둔시킨 군대를 철수키로 한다. 조약에 서명 날인한 날로부터 4개월 이내에 양국은 군대를 완전히 철수하여 서로의 염려를 없애도록 한다. 중국군은 마산포로부터 철수하고 일본군은 인천항으로부터 철수한다. ② 양국은 함께 조선국왕에게 권하여 병사를 교련해서 치안을 스스로 하도록 하고, 조선국왕이 다른 외국 무관 1인이나 수인을 초빙하여 교련의 일을 위임토록 하되, 청국·일본 양국은 자국인을 파견하여 조선에 주재해서 교련하는 일이 없도록 하다. ③ 장래 조선에 만약 변란이나 중대한 사건이 있어 청국·일본의 두 나라 또는 한 나라가 파병을 요할 때에는 응당 그에 앞서 상호문서를 보내어 알게 할 것이요,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병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
이 조약의 내용은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있을 때 주인인 조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청국과 일본이 ‘균등하게 간섭과 파병의 권리’를 갖는다는 침략적 국제조약이었다. 이것은 조선에 대한 침략에 이어서 청국과 일본이 야합하여 침략자로서의 대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을 규정한 침략적 조약이었다.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갑신정변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일단 정권을 장악하여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고 혁신정강을 선포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신정권을 3일밖에 유지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운동이었다.
첫째, 갑신정변은 세계사적으로 한국민족이 대개혁을 단행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정권을 장악해서 ‘위로부터의 자주근대화의 대개혁’을 단행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전근대적 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고 한 과감한 자주근대화운동이었다. 개화당의 영민한 청년들이 청국의 시대착오적인 속방화 간섭정책과 근대화 저지정책을 일거에 타도하고 자기 조국의 자주독립과 자주근대화를 위해 10년의 급속한 근대국가 건설기간을 가지려고 시도한 것은 역사적으로 당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개화당은 당시 외세의 침략 압력의 급박성과 개항 직후 한국정치사회의 상대적 낙후성의 큰 격차 때문에, 국민대중의 성숙을 기다려 ‘아래로부터의 자주근대화’를 수행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고, 먼저 정변의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독립과 근대화를 저지하고 있는 청국세력을 몰아내고 국민을 교육하면서 ‘위로부터의 자주근대화’를 단기간에 수행하려고 한 것이었다.
둘째, 갑신정변은 한국근대사상 개화운동에 일정 방향을 정립해 주었다.
갑신정변은 정치적으로는 청국의 종주권 주장과 내정간섭을 단호히 철폐하여 완전 자주독립을 실현하고 전근대적 전제군주제도를 입헌군주제의 방향으로 개혁하여 근대국가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개혁을 통해 종합적으로 낙후한 전근대적 국가와 사회체제를 선진적인 근대적 국가와 사회로 개혁하려 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향의 국가개혁은 그 이후의 모든 개화운동이 계승하여 추구한 것이었으며, 10년 후의 갑오개혁은 갑신정변의 개혁안을 다른 상황에서 계승하여 실행한 측면이 많은 것이었다.
셋째, 갑신정변은 한국의 반침략 독립운동에도 하나의 근대적 기원을 정립한 것이었다. 갑신정변은 당시 청국의 시대착오적인 대조선 속방화 정책과 적극 간섭정책을 타도하고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과감한 운동이었지만, 이 운동의 내부 성격은 비단 청국의 침략만이 아니라 모든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과 독립의 추구가 본질을 이루고 있었다.
넷째, 갑신정변은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사상과 운동의 형성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운동이었다. 한국근대사에서 모든 근대민족주의 운동은 갑신정변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그것을 반성하고 발전시킨 것이 매우 많았다. 그 후의 갑오개혁의 자주적 부문,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 애국계몽운동은 직접적으로 갑신정변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국사편찬위원회(2002), 『신편 한국사 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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