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정권의 수립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마침내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의 거사일이 왔다. 축하연 시작 시간인 오후 7시가 가까워오자 초청받은 축하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김옥균은 이날 오후 4시에 우정국으로 가서 홍영식과 함께 연회준비를 점검하였다. 김옥균이 집에 돌아오니 국왕을 항상 가까이 모시고 있는 변수가 와서 국왕께서는 날이 밝은 뒤부터 공사를 재결하기 위해 계속 침실로 가지 않았고 승후관(承候官)은 2시에 입대(入對)했는데 일찍 물러가게 해서 공무를 끝내었다고 국왕의 동태를 보고하였다.
김옥균은 변수에게 계속 국왕과 궁궐의 정황을 관찰하다가 오늘 밤 김옥균 자신이 대궐로 들어가는 즉시 상세히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김옥균이 바로 이웃하고 있는 서재필의 집으로 가서 모여 대기하고 있는 개화당 장사들에게 행동지침을 거듭 결정하여 지시하고 나니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다. 김옥균이 급히 우정국으로 달려가니 조금 늦게 도착되어서 이미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옥균은 일본공사관 서기관 시마무라(島村久)의 옆 좌석에 앉아 이따금 이야기를 나누다가, 거사 직전임을 알리기 위해 암호로 ‘그대는 天을 아는가’ 하고 물으니, 시마무라는 일본말로 ‘요로시’ 하고 대답하였다.
이 때 김옥균에게 집에서 누가 찾아왔다고 알려왔다. 김옥균이 연회장 문밖으로 나가보니 개화당의 박제경이 급히 달려와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아무리 애를 써도 별궁 방화는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였다. 김옥균은 다른 곳이라도 연소되기 쉬운 초가를 골라 불을 질러서 신호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옥균이 연회장에 돌아와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신호 불빛은 없고 또 김옥균을 찾는다고 하여 나가 보니 이번에는 유혁로가 달려와서 별궁 방화의 실패로 순라꾼들이 사방에 퍼져 다른 곳 방화도 위험하므로 여러 장사들이 연회장을 습격하고자 한다고 보고하였다. 김옥균은 그 경우에 혼잡 속에서 외국공사를 다치게 할까 염려되니 순라꾼이 없는 곳을 아무데나 골라 불로 신호하라고 다시 지시하였다.
김옥균이 긴장하여 두 번이나 출입하는 것을 민영익 등은 자못 의심하는 빛이었고, 시마무라도 매우 불안한 기색이었다. 이 때 우정국 북쪽 창문 밖에서 ‘불이야,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리고 떠들썩하므로 창문을 열어보니 우정국 바로 옆 거리에 불빛이 하늘에 뻗쳤다. 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당황하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한규직이 먼저 “우리들은 장수의 소임으로 급히 달려가서 불을 끄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막 나가려는데, 민영익이 칼을 맞아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채 연회장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민영익은 김옥균이 자주 밖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 눈치 빠르게 의심을 품었다가 ‘불이야’ 소리에 재빠르게 먼저 대문을 빠져 나갔는데 대기하고 있던 개화당 장사들의 칼을 맞고 돌아온 것이었다. 개화당 장사들은 서툴러 민영익을 완전히 처치하지 못하고 중상을 입힌 데 그쳤다. 연회장은 완전히 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은 북쪽 창문으로 뛰어넘어 곧 암호로 ‘天’·‘天’을 부르며 달리는 도중에 이인종과 서재필을 만나게 되자, 그들로 하여금 개화당 장사들을 인솔하여 경우궁 문밖에 가서 기다리도록 지시하고, 먼저 곧바로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갔다. 별궁 방화가 실패한 것을 보고 일본 측이 변심하지 않았나 보기 위해서였다. 일본공사관에서는 시마무라가 먼저 돌아와 있다가 나오면서 “그대들은 왜 대궐로 가지 않고 이 곳으로 왔는가” 하고 물었다. 김옥균은 일본 측이 변심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대궐로 가는 도중 운니동 어귀에 김봉균·이석이 등 개화당 장사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또 신복모가 장사 40여 명을 여러 곳에 매복시켜 놓은 것을 보았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은 금호문으로 김봉균·이석이를 데리고 들어가 그들에게 인정전 아래 화약을 묻은 데로 보내서 30분 후에 폭발시키도록 하였다.
김옥균 등이 앞을 막는 무감을 호령하여 물리치고 편전 앞 합문 밖으로 나아가니 윤경완이 전영 병정 50명을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편전 안으로 들어가니 국왕은 이미 침실에 들었으므로 가로막는 환관 유재현을 시켜 국왕께서 급히 일어나시도록 청하게 되었다. 국왕이 침실로 김옥균·박영효·서광범을 부르면서 무슨 사변이 일어났는가를 물었다. 김옥균 등이 우정국의 사변을 아뢰고 잠시 다른 궁궐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민비가 김옥균에게 “사변이 청국측에서 나왔는가, 일본측에서 나왔는가”를 묻고, 김옥균이 미쳐 대답하기도 전에 홀연히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울리었다.
혼비백산한 국왕과 민비를 모시고 경우궁을 향해 달리는 도중에 김옥균 등은 국왕에게 “지금 이 때를 당하여 일본군사를 요청해서 폐하를 호위하도록 하면 만전을 기할 수 있겠습니다” 하고 진언하였다. 다급한 국왕은 그렇게 하라고 윤허하였다. 김옥균이 잇따라 친필칙서가 없으면 (일본군사가) 하명하신 대로 오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국왕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묻자, 김옥균은 연필을 올리고 박영효는 백지를 내놓았다. 국왕은 창황중에 요금문(曜金門) 안 노상에서 친필로 “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호위하라”고 써 주었다. 김옥균은 이 친필칙서를 박영효를 시켜 다케조에에게 전하게 하였다.
국왕과 왕비를 모시고 김옥균 일행이 경우궁 정전 뜰에 이르렀을 때 곧 박영효와 다케조에가 일본군을 인솔하여 왔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은 국왕과 왕비를 정전에 편히 좌정케 한 후에 좌우에 시위하고, 서재필의 지휘하에 사관생도 13명과 개화당 장사들로 내위를 시켰으며, 친군영 전영 소대장 윤경완에게 5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정전 뜰을 지키게 하고, 일본군 150명으로 하여금 대문 안팎을 경호하도록 했으며, 외위로 친군영 전영·후영 병사를 불러 경우궁을 지키도록 하였다. 국왕을 중심점으로 3중·4중의 철통같은 호위체제가 편성되었다. 정변은 일단 성공의 안정권에 들어선 것이었다.
김옥균은 이에 믿을 만한 무감 10여 명을 시켜서 경우궁 대문 밖에 나가서 재상과 대신들 중에 변을 듣고 오는 자가 있으면 곧 이름을 먼저 들여보내서 허가를 받은 다음 홍영식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이조연이 우정국 축하연에서 도피했다가 국왕이 경우궁에 옮기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으므로 들어오게 했더니, 이미 와 있는 한규직·윤태준 및 환관 유재현과 자주 쑥덕거렸다. 박영효가 이를 보고 3영의 영사들이 국왕 호위의 임무는 하지 않고 궁궐 안에서 왜 머뭇거리는가 하고 힐문하니, 먼저 윤태준이 나가겠다고 하였다.
윤태준이 손중문을 나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이규완·윤경순이 처단해 버렸다. 한규직과 이조연은 경우궁 후문을 나섰다가 기다리고 있던 황용택·윤경순·이규완·고영석에 의해 처단되었다. 이에 친군영의 전·후·좌의 3영사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우영사 민영익은 중상을 당하여 모두 처단된 것이었다. 민영목·조영하·민태호가 각각 차례로 경우궁 정전 밖에 찾아와 명찰을 들이므로 들어오게 하여 이규완·고영석 등이 처단하였다. 수구파 영수들도 역시 처단된 것이었다. 김옥균은 사람을 시켜 이재원(국왕의 4촌형)을 입시케 하여 정변과 대개혁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더니 기꺼이 따르겠다고 하였다. 김옥균은 변수를 각국 공사관에 보내어 정변을 알리고 우정국 축하연 참석자들을 위문케 하였다.
이에 미국공사는 해군사관 버너드와 윤치호를 경우궁으로 보냈으므로 정변의 대강을 설명해 보냈더니, 미국공사로부터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오직 내정을 잘 개혁하시오”라는 회보가 왔다. 김옥균 등이 우선 급히 시행해야 할 정령을 국왕께 품하려 하는데, 민비는 대궐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환관과 궁녀 수백명이 한 방에 뒤섞여서 정변에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떠들어대었다. 김옥균은 서재필을 시켜 장사들로 하여금 환관 유재현을 경우궁 정전 위에 묶어 오게 한 다음, 궁 안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유재현의 죄목(북청군대 환송 책동과 모함 등)을 낱낱이 드러내고 칼로 목을 베어 참살하였다. 이를 바로 눈에서 보게 된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은 아연실색하여 이때부터 개화당의 영을 한결같이 따랐다. 환관 유재현은 개화당에 속했었는데 후에 변절해서 개화당의 북청군대의 정변 투입을 방해하고, 수구파에 가담했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2) 신정부의 수립
신정부의 조직구성은 개화당과 국왕 종친(특히 대원군계열)의 연립내각이었다. 개화당의 직책 분담으로는 대표로서 좌의정 홍영식 이외에, 김옥균이 판서 없는 호조참판에 임명되어 재정을 장악하였다. 박영효는 무력의 핵심인 군사권과 경찰권을 맡았다. 서광범은 외교를 담당하고 군사권과 경찰권을 보조적으로 담당하게 하였다. 서재필에게는 군사권을 맡겨 박영효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박영교에게는 국왕의 도승지를 담당케 하여 국왕 시종의 책임을 맡겼다. 이 밖에 개화당에 동조할 수 있다고 본 당시의 온건개화파로는 김윤식·김홍집·신기선·이건창 등을 기용하였다.
개화당 요인들이 정치·재정·군사·외교·국왕 비서실의 실권을 장악하고, 신정부의 수반과 다른 부서에는 대원군계열 종친들을 임명했으며, 내무·학예 직책에는 온건개화파를 포용한 연합정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김옥균이었음은 물론이다. 김옥균이 권력을 탐하여 정변을 일으켰다는 모함을 차단하기 위해 이전에 김옥균이 맡았던 적이 있는 호조참판을 맡은 것이었다. 그러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모든 국가 재정을 호조로 통일한 그 호조의 ‘판서’는 임명하지 않고 공석으로 두어 사실상 ‘참판’이 판서의 일을 하도록 배치하였다.
한편 개화당의 정변에 당황한 원세개 지휘하의 청군측은 11월 18일 아침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한 경기관찰사 심상훈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어 민비의 밥사발 밑에 서찰을 감추어서 청군과 민비 사이의 연락에 성공하였다. 민비는 이에 신정부가 자기세력을 적으로 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경우궁은 좁은 관계로 청군이 공세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지형상 분리하므로 넓은 창덕궁으로의 국왕을 환궁하도록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민비는 청군을 돕기 위한 내심으로 경우궁은 너무 좁아 불편하다고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창덕궁은 너무 넓어서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서는 방어에 극히 불리한 곳이었다.
김옥균 등은 이에 11월 18일 오전 10시경에 경우궁 옆의 이재원이 살고 있는 계동궁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기었다. 이에 민비는 계동궁이 꽤 넓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좁다고 다시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요청했다. 국왕은 내용도 모른 채 민비를 지지하였다. 김옥균은 이를 거절하고, 다케조에에게도 창덕궁은 방어가 어려우니 국왕이나 왕비의 분부가 있더라도 계동궁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으며, 국왕과 왕비에게는 이틀만 더 기다리면 모든 일이 정리되어 환궁하게 될 것이라고 아뢰었다.
김옥균이 잠시 계책을 의논할 것이 있어서 홍영식 및 이재원과 함께 외청에 나간 사이에 국왕은 갑자기 다케조에를 불러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간절히 말하니, 다케조에는 준비하여 1시간 후에 환궁케 하겠다고 아뢰었다. 김옥균이 그 말을 듣고 달려와 다케조에를 꾸짖으니, 다케조에는 수비는 일본군이 한결같이 잘할 것이니 걱정말라고 큰 소리를 쳤다. 국왕도 다케조에의 허락을 얻었다고 매우 기뻐하며 김옥균을 나무라니 어찌할 수 없었다. 김옥균 등 개화당은 할 수 없이 국왕과 왕비 등을 모시고 11월 18일 오후 5시에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신정부를 수립한 개화당 (급진개화파) 은 신정부가 실시할 혁신정책의 기본강령으로서 ‘혁신정강’을 제정 공포하였다. 혁신정강은 국왕이 이재원의 집 (계동궁) 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10월 18일 (양력 12월 5일) 저녁에 승정원을 진선문 안방에 설치하고, 영의정 이재원, 좌의정 홍영식, 병조판서 이재완, 좌우영사 박영효, 호조참판 김옥균, 서리독판교섭통상사무 서광범, 도승지 박영교 등이 협의하여 결의하였다. 여기서 결의된 것을 우승지 신기선으로 하여금 정서케 한 후 홍영식이 이를 국왕께 상주하였다. 신기선의 공술에 의하면 혁신정강의 결의는 김옥균이 주도했다고 한다.
혁신정강은 10월 19일 오전 9시경에 국왕의 전교형식을 빌려 세상에 공포되고, 서울 시내의 중요한 몇 곳에 게시되었다. 혁신정강의 조목들은 처음에는 상당히 많아서, 당시 서울에 체류했던 일본인 중에는 80여 개 조목이 있었다고 기록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정확성을 알 수 없다. 현재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김옥균이 그의 〈갑신일록〉에 수록한 14개 조항뿐이다. 그러나 김옥균도 “생략하여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略錄如此) ”라고 하여 줄여서 기록함을 밝히고 있으므로, 실제의 혁신정강의 조항들이 이보다 많았음은 명백한 것이다.
김옥균이 기록해 둔 요약된 혁신정강 14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① 대원군을 며칠 안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의 행사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 ③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재정을 유족하게 할 것.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참으로 우수하고 재능있는 자는 등용할 것. ⑤ 그 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⑥ 각 도의 환자제도는 영구히 폐지할 것.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 순사제도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⑩ 그 동안 유배․금고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시급히 설치할 것(육군대장은 세자궁을 추대할 것). ⑫ 모든 국가재정을 호조로 하여금 관할케 하며, 그 밖의 모든 재무관청은 폐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새로 임명된 6인의 이름은 생략함)은 합문 안의 의정부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후에 왕에게 품한 다음 정령을 공포해서 정사를 집행할 것. ⑭ 정부는 6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케 할 것. |
(가) 완전 자주독립의 공포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1조는 당시 조선왕국이 임오군란을 전환점으로 청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배경에서 1882년 7월 이후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 적극 간섭정책을 거부함과 동시에, 1882년 이전의 조공허례의 의식도 폐지할 것을 혁신정강으로 공포하여, 조선왕국의 완전 자주독립국가로서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국가임을 선언한 것이다.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은 비단 임오군란 이후의 청국의 속방화정책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허구의 종주권 주장과 조공허례 의식까지도 전면 부정하고, 조선왕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만천하에 재확인 공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
(나) 양반신분제도, 문벌제도의 폐지와 인재등용의 공포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2조인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은, 양반신분제도의 폐지에 의한 국민평등권리의 제정, 문벌제도의 폐지, 인재의 등용을 정식으로 공포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왕조 사회와 정치의 형편은 양반문벌들이 형성되어 그들의 족친이 아니면 아무리 유능한 인재라도 잘 등용치 않고 있었으며 반면 번열의 일원이면 무능부패한 자들도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관직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발전이 막히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이전에도 고종에게 상소문을 통해 양반신분제도의 철폐를 주장한 적이 있는데, 특히 그는 양반신분제도가 산업발전과 자본축적에 가장 큰 문제이므로 이를 단칼에 없애야 한다는 주장으로 근대자본주의적 성격의 주장을 펼쳤다.
(다) 내각제도의 수립과 정부조직의 개편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13조 ‘대신과 참찬은 합문 안의 의정부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후 왕에게 품한 다음 정령을 공포해서 정사를 집행할 것’과, 제14조 ‘정부는 六曹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케 할 것’과, 제4조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서 재능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등의 조항은, 내각제도의 수립, 정부조직의 개편 등의 정책 대강을 공포한 것이었다.
이 중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전제군주제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고 각료들의 내각회의에서 정책을 의결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은 후에 정령을 공포하여 정사를 집행하는 내각제도를 수립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입법과 행정의 토의결정은 국왕에 의해서가 아니라 6조의 대신·참찬회의에서 이루어지고, 국왕의 권한은 극도로 제한되어 대신·참찬회의에서 결정하여 품계한 사항에 대해 가부의 재결만 하게 되도록 하였다. 이 경우 실제로 모든 정책의 토의와 결정이 대신·참찬회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왕은 대신·참찬회의의 결정사항에 동의하는 재결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중 위의 여러 조항들은 정부조직의 근대적 개편도 선언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개편의 방향은, 정부의 부서는 6부로 하고, 6부 이외의 모든 행정상 불필요한 부서들은 모두 폐지하며, 내시부와 같은 전근대적 부서와 환관제도는 폐지하고 그에 속한 자들 중에서 특히 우수한 자만 다른 부서에 임용하며 왕실사무와 국가행정사무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었다.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이 선언한 내각제도의 수립과 정부조직의 근대적 개편은 한국역사에서 처음으로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의 방향으로 개혁하여 내각제도의 수립을 결정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다) 재정의 통일과 경제개혁의 단행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12조 ‘모든 국가재정은 호조로 하여금 관할케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재무관청은 폐지할 것’과, 제3조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재정을 유족케 할 것’과, 제6조 ‘각 도의 환자제도는 영구히 폐지할 것’과, 제9조 ‘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등은, ① 재정의 호조로의 통일, ② 지세제도 개혁을 비롯한 조세제도의 개혁, ③ 환자(환곡)제도의 폐지, ④ 보부상 등 전근대적 특권상업제도의 폐지 등을 통하여 근대적 자유산업을 장려하고 재정제도와 경제제도를 근대적 방향으로 개혁하려 하였다.
당시 국가재정은 재무부처로 통일되어 체계적으로 관장되지 못하고 모든 정부부서들이 각각 조세징수권을 가져 직접 국민들로부터 조세를 징수해서 각각 자의로 지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통일된 국가재정의 예산·결산제도도 없었다. 이 때문에 각 관청에 의한 과도한 조세징수와 중간착복, 재정의 낭비와 문란이 극도에 달해 있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은 정변 개시 이전부터 이러한 국가재정의 문란실태를 통탄하고 호조에 의한 국가재정의 통일과 예산제도의 확립 실시를 이미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가 정변을 일으키자 바로 국가재정의 통일을 정강으로 공포한 것이었다.
갑신정변 당시의 개화당의 국가재정 개혁의 기본방향은, ① 모든 국가재정의 호조(재무부)로의 통일, ② 호조 이외의 모든 재무관청의 폐지, ③ 예산(및 결산)제도의 실시, ④ 세입과 세출의 단일화 및 균형체계 수립, ⑤ 조세제도의 개혁, ⑥ 내외 공채모집에 의한 재정자금 부족분의 긴급 조달 등이 그 핵심을 이루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재정의 호조로의 통일이 선행적으로 즉각 실시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강조하였다.
혁신정강 내용 중의 지세법의 개혁은 당시 三政(田政·軍政·還政)의 문란 중에서 전정(지세제도)과 군정(군포세제도)의 문란을 교정하고 근대적 조세제도를 수립하기 위한 개혁정책으로 선포된 것이었다. 개화당은 지세제도와 조세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여 세율을 내려서 법제화하고 탐관오리들의 중간착취와 부정을 철저히 제거함으로써, 한편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켜 백성을 고난에서 구함과 동시에 간사한 관리들의 중간수취를 근원부터 제거함으로써 겸하여 국가재정을 유족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마) 군사제도의 개혁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11조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시급히 설치할 것(육군대장에는 왕세자를 추대할 것)’은 군사제도의 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것이었다. 당시 군사제도는 친군영을 전·후·좌·우의 4영으로 나누어 민비 수구파의 거물들이 지휘하고 있었으며, 국방보다는 왕실 호위의 임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친군영 전영과 후영은 서양식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었고, 친군영 좌영과 우영은 원세개(袁世凱)가 설치하여 청국식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한 나라의 군대가 부대에 따라 훈련방법과 편제가 서로 달랐다. 또한 친군영 전영과 친군영 좌·우영은 사사건건 대립과 갈등을 일으켜 혼란과 근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개화당들은 이 때문에 갑신정변 이전부터 기회있을 때마다 4영의 1영으로의 통합과 하나의 통일된 방식에 의한 전체 부대들의 군사훈련 및 편제를 주장했었다. 당시 김옥균 등 개화당은 열강이 침략해 들어오는 추세 속에서 조선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방위하기 위한 자주적 근대군대의 양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에서 ① 4영의 1영으로의 통합, ② 국방을 담당하는 육군과 왕실 호위를 담당하는 근위대의 분리, ③ 근위대의 시급한 설치를 공포한 것은 군사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한 최초의 것을 정강화한 것이었고, 사실은 군사 전반의 근대적 대개혁을 추구한 것이었다.
(바) 규장각의 폐지와 근대문화 수립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7조 ‘규장각을 폐지할 것’은, ① 전근대적 양반귀족 문화의 제도인 규장각을 폐지하고, ② 일반 국민이 중심인 신교육제도를 기본으로 한 근대문화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단행하려 한 개화당의 정책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혁신정강의 규장각폐지의 조항은 피상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나, 이것은 규장각이 갖고 있던 민족문화 정수의 측면을 폐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규장각이 갖고 있던 다른 하나의 측면인 전근대적 양반귀족문화의 제도적 측면을 폐지하고 일반 국민·민중의 신교육에 의거한 근대문화 수립을 추구한 것이었다. 김옥균 등은 그 당시 양반귀족들의 낡은 구지식은 당시의 민족적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데는 무지·몰각과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나라를 구하려면 오직 청년들과 일반 민중들에게 신교육을 시행하는 길밖에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김옥균은 백성을 교육하되 신문명의 방도로써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널리 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정무에 관한 일을 언문(국문)으로 번역 간행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알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개화당이 혁신정강에서 양반귀족만의 지식기관인 규장각을 폐지하려 한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민중교육을 위한 학교를 널리 설립하여 신교육을 실시하고 근대문화를 수립하는 방향의 개혁정책을 실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 경찰제도와 형사정책의 근대적 개혁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8조 ‘순사제도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과 제10조 ‘그 동안 유배·금고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은 경찰제도와 형사정책을 긴급히 개혁하려 한 것이었다. 그 개혁의 방향은, ① 순사제도의 긴급 설치를 중심으로 한 경찰제도의 근대화, ② 가혹한 전근대적 행형제도의 의해 억울하게 유배되고 금고된 사람들의 재조사와 석방·사면, ③ 근대적 형무제도의 실시 등을 추구한 것이었다.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의 이 조항들은 시급히 순사제도를 설치하여 근대적 경찰제도를 수립해서 민생치안을 튼튼히 강화해 국민을 보호함과 동시에, 그동안 가혹한 전근대적 형사정책과 행형제도에 의해 억울하게 처벌된 사람들을 석방·사면하여 인심을 수렴하려 한 것이었다. 이것은 가혹한 전근대적 경찰제도와 형정을 새로운 근대적 경찰제도와 형정으로 개혁함과 동시에 신정권의 지지기반을 강화하려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 국가에 해독을 끼친 자에 대한 처벌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제5조 ‘그 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은, ① 종래 민비 수구파정권하에서 부정부패와 백성착취의 도가 지나친 탐관오리들은 숙청하여 처벌하되, ② 그 기준은 국가에 얼마나 해독을 끼쳤는가에 의거하겠다고 공포한 것이었다. 이 조항은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국가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민비 수구파와 관리들 중에서 부정부패의 정도가 심한 탐관오리들을 색출하여 처벌 숙청할 것을 선언한 것으로서, 신정권으로서는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갑신정변 신정부의 혁신정강은 이상과 같이 국가제도와 국정 전반을 전근대적 체제로부터 새로이 근대적 체제의 방향으로 개혁하여 근대국가체제를 건설하려 한 것이었다. 또한 이 혁신정강은 개화당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직후 집행할 정책들의 대정강으로 제정한 것이었으므로 사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당장 실행·실시될 정책의 골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은 개화사상이 아니라 개화정책이었으며 집행되기 시작한 개화정책의 골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4) 청국 및 일본의 개입과 정변의 실패
김옥균 등 개화당은 10월 9일 오전 9시 신정부의 혁신정강을 공포한 직후에 청군의 공격을 예견하여 신무기로 방어력을 긴급히 강화하려고 하였다. 수개월 전에 이전의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최신식 소총 3,000정을 구입해다가 사용하지 않고 각 영의 무기고에 보관해 둔 것이 있었다. 개화당은 이 최신식 소총을 꺼내어 무장을 강화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기고의 최신식 소총들을 꺼내어 보니 거의 모두 녹쓸어 있었다. 이를 모두 분해소제하고 수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는 일본군의 사정으로 보아 궁궐 안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므로 일본군을 철병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김옥균 등이 내심 깊은 분노를 느끼면서도 간곡히 만류하여 설득하자 다케조에도 이에 승복하였다.
개화당의 신정부는 이날부터 국정 전반에 대한 대개혁을 실행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이 날 오후 3시에 국왕은 ‘대정유신(大政維新)의 조서’를 내려 혁신정강을 기본으로 해서 신정부가 대개혁을 단행한다고 반포하였다. 그러나 청국군측은 같은 시각인 10월 19일(양력 12월 6일) 오후 3시경에 작전을 시작하여 약 1,500명의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궁궐을 침범해 들어왔다.
마침 이 때에 조선-일본 사이의 우편선 천세환이 입항하여 일본 외무대신의 일본공사에 대한 훈령이 전달되었다. 일본 외무대신의 훈령 내용은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의 일본군을 조선 개화당의 정변에 절대로 가담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그 사이 청·불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청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정책을 급히 바꾸어서 다시 조선 개화당에 대한 적대적 방향의 정책으로 되돌아갔던 것이었다.
청군 1,500명의 양면으로의 공격에 대항하여 외위를 담당한 조선군은 아직 응전태세가 완비되어 있지 않았다. 모두 최신식 소총의 분해소제와 수리를 하고 있던 도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군영 전영·후영의 조선군은 구식 무기로 응전하였다. 결국 조선군은 중과부적과 무기의 열세로 패퇴하여 흩어지게 되었다.
다음은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의 응전차례였으나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병을 시작하였다. 개화당 요인들이 불리한 조건 속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을 독려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왕비(민비)와 세자 및 세자빈은 창덕궁의 북산으로 향하였고, 왕대비·대왕대비도 뒤이어 궁문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김옥균 등이 이 보고를 받고 급히 후문으로 뒤따라가 보니 국왕도 무감과 4·5명의 병정들에게 호위되어 민비가 가 있는 북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김옥균·서광범 등은 국왕을 발견하자 큰 소리로 어가를 정지시키고 국왕의 북산행차를 만류하여 다시 궁궐 안으로 모셔왔다. 개화당 장사들로 구성된 내위로 하여금 국왕을 호위케 한 후, 개화당 요인들은 긴급대책을 숙의한 결과 국왕을 보호하여 처음에는 인천을 거쳐 강화도로 가서 신정부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이 말을 듣고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 죽더라도 대왕대비가 계신 곳으로 가서 자리를 같이하겠다”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청국군이 이때 국왕과 개화당 요인들이 있는 처소를 공격해 왔으므로 일행은 뒤쪽 언덕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여 안전한 곳을 찾다가 창덕궁 동북 궁문까지 가게 되었다.
김옥균 등 개화당 요인들이 국왕에게 인천으로 피신할 것을 주장했으나, 국왕은 단호히 이를 뿌리치고 그를 업은 무감의 등을 두드리며 북산에 있는 민비 쪽으로 갈 것을 명하였다. 박영효가 나서서 무감을 위협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김옥균은 국왕의 뜻이 확고한 것을 짐작하고 이를 만류하였다. 개화당은 할 수 없이 국왕과 함께 개화파 장사들과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북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궁궐 건물 멀리서 기다리던 청군들이 일본군 복색을 보고 함성을 지르며 무차별 난사를 가하였으므로 국왕 옆에 있던 무감한 사람이 손에 총을 맞았다. 김옥균은 이에 무감을 시켜 큰 소리로 “대군주께서 여기 계시는데 어찌 감히 총을 쏘느냐”고 크게 꾸짖게 하니 총성이 그치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이러한 상황을 관찰하더니, 일본군이 조선국왕을 호위하는 것이 더 위험하니 일본군을 철수시킨 후 선후책을 강구하겠다고 개화당에게 통고하였다. 김옥균 등이 크게 놀라서 다케조에의 신의 없음을 힐책하고 만류했으나 다케조에는 완강하게 일본군 철수를 고집하며 강행하려 하였다. 개화당 요인들은 청군의 포위 속에서 일본군이 철수하여 국왕을 보호하지 못하게 됨은 곧 정변의 붕괴를 의미함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개화당 요인들은 이에 대책을 숙의하고 정변의 실패를 자인하였다. 이에 개화당 요인 중에서 홍영식은 신정부의 개화당 대표(좌의정)일 뿐 아니라 정변 직후에도 병정을 보내어 민비 수구파의 거물 민영익을 보호해 주었었고 청군사령 원세개와도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화는 면할 수 있다고 보고 도승지 박영교와 함께 사관생도 일부를 데리고 국왕을 호종하기로 하였다. 그 밖에 개화당 요인인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다른 개화당 인사들 및 사관생도 일부를 데리고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에 망명키로 하였다. 이에 갑신정변에 의한 개화당의 신정부는 10월 19일 밤 붕괴되어 김옥균 등의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고 말았다.
홍영식·박영교·신복모와 사관생도 박응학·정행징·윤영관·하응선·이병호·이건영·백낙운 등 7명은 국왕을 모시고 북묘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청군 측이 국왕을 청군의 군영에 옮긴 후, 재판도 없이 홍영식·박영교·신복모 등과 7명의 사관생도들을 처참하게 살해하여 버렸다. 한편 국왕과 이별한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변수·유혁로·신응희·이규완·정난교 등 9명은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공사관에 10월 19일 9시경에 도착하였다. 일본 거류민들의 일부도 일본공사관 안으로 피난해 들어와서 일본공사관 안의 분위기는 소란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김옥균 일행이 머물러 있던 이튿날인 10월 20일에는 재집권한 수구파 정부의 신임 외무독판 김홍집이 일본군의 정변 가담에 항의하는 공문을 보내오고, 청군과 그 선동을 받은 수십 명의 군중들이 고함을 지르며 일본공사관을 습격하려고 일본군 보초병과 심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 김옥균 등 개화당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려고 인천으로 출발하는 다케조에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의 모든 직원과 일본군을 따라 나섰다. 우편선 천세환이 인천에 정박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공사관 직원들은 기밀문서를 태우다가 공사관 건물에 불이 번지는 것을 돌아볼 사이도 없이 청군과 일부 본국인들에게 추격당하면서 다케조에를 따라 인천으로 향했으며, 김옥균 일행도 그들과 함께 인천으로 떠났다. 조선 개화당이 청국의 속방화정책을 타도하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일으킨 갑신정변은 이렇게 하여 3일 만에 실패하였다.
(5)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으로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특히 다음의 요인들이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청군의 불법적 범궐과 군사적 공격이다. 청군은 국왕의 요청도 없고 조선정부의 반대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주둔시킨 1,500명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조선왕국의 궁궐을 침범해서 군사적 공격을 자행함으로써 개화당의 신정부를 무력으로 붕괴시켰다. 이것은 조선의 주권을 무시한 처사였으며, 불법적 궁궐침입이었다.
둘째는 개화당의 일본군 차용과 일본군의 철병이다. 개화당은 일본공사관의 호위병력 150명을 빌려다 개화당의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려 하여 “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호위하라”는 국왕의 친필 명령서까지 받아다가 합법적으로 일본군을 정변에 끌어들였다.
김옥균 등 개화당은 당시의 국제적 모순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차용해서 청군의 공격에 대해서는 일본군으로 이를 견제하여 막고, 국내 수구파는 국내 개화당이 맡는다는 전술을 택했으나 이것은 적중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일본군 무력은 결정적 순간에 개화당의 기대를 배신하여 국왕을 호위하지 않고 철병해 버림으로써 정변 전체를 와해시키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개화당이 정변을 자기 힘으로서만 하지 않고 침략의도를 가진 외국 특히 일본의 무력을 빌린 것은 개화당의 큰 실책이었다. 이것은 정변 그 자체를 실패케 한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되었고, 조선 백성들에게도 개화당은 친일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비난을 자초한 요인이 되었다.
셋째는 백성들로부터 지지의 결여이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왜 정변까지 일으켜 가면서 개화를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으므로 개화당의 정변에 냉담하였다. 당시 청군의 무장력은 근대적 소총 수준의 것이었으므로, 만일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만 있었다면 서울 시내의 청·장년들만 개화당을 지지하여 함께 봉기해도 청군의 군사개입은 저지될 수 있는 것이었으나, 백성들은 개화당의 정변에 시종일관 냉담하였다. 갑신정변같이 체제를 변혁하려는 급격한 운동은 그에 앞서 지지해 줄 민중을 계몽하는 운동을 선행시켜야 하는데, 계몽운동을 선행시키지 않은 정변이 민중의 지지를 얻어 성공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넷째는 시민층의 미성숙이다. 개화당 신정부의 혁신정강과 개화정책은 근대 시민적인 것이었으며, 시민계층의 이해관계에 가장 잘 합치하고, 시민계층에 우선적으로 지원적인 내용의 것이었다. 따라서 시민계층만 성장해 있었으면 정변은 확고한 지지층을 갖고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의 근대 시민층은 대두하기 시작하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 미성숙하여 개화당의 지지세력을 형성하기는 전혀 불가능하였다. 개화당의 신정부가 확고한 지지층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정변 실패의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다섯째, 개화당의 준비 부족과 정변 기술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정변은 군사무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개화당은 청군 1,500명을 압도할 수 있는 조선군 무력 준비가 부족하였다. 친군영 전·후·좌·우의 4영 중에서 전영만 확고하게 장악하였고, 후영은 북청병정 외에는 충분하게 장악하지 못하였다. 또한 개화당은 친군영 좌영과 우영은 전혀 장악하지 못한 결과, 정변 도중 대세가 청군에게 유리하게 기울자 좌영과 우영 조선군 병사들은 원세개의 지휘를 받는 형편이었다. 조선군을 비밀리에 사전 장악하는 준비가 크게 미흡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변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개화당은 민비의 동태를 잘 감시하지 못하였고, 경기관찰사 심상훈에게는 속아 넘어가서 그를 개화파 동정자로 오해하여 궁궐 무상출입을 허용하였다. 그 결과 심상훈은 청군측과 민비 사이에 연락을 담당해서 국왕의 처소를 방어가 쉬운 경우궁으로부터 방어가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기게 작용했으며, 개화당의 통신과 연락을 방해하는데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개화당의 정변 준비와 기술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되어 조선의 선진 개화독립당 청년들이 조선왕국에 대하여 청국이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속방화정책을 끊어버리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은 일단 집권에는 성공했으나 신정부를 수립한 지 3일 만에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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