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한국사이야기 | 갑신정변 - 전개 1부

곰고로곰 2023. 2. 4.
728x90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초기 개화파 중에서 1884(고종 21)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파 개화당의 목표는 당시 세계 대세에 뒤떨어져서 열강의 위협을 받는 조선왕국을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조국인 조선왕국을 힘 있는 현대적 국가로 쇄신하여 외국의 침략을 막아내려는 김옥균 등 개화당의 목표는 임오군란 후 청국의 조선속방화정책을 정변의 방법으로 집권하여 물리치고, 위로부터의 급속한 자주 근대화정책을 실시해서 조선을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로 건설하여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완전 자주독립국가로 발전시킬 것을 목표로 정변을 추진하였다.

 

벌거벗은 한국사 E41

 

 

갑신정변의 준비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개화당들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정변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봄부터였다. 김옥균은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하나는 평화행사(平和行事)’의 방법이었다. 이것은 국왕의 칙령을 빌려서 평화적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개혁사업에 종사하는 방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무력행사(武力行事)’의 방법이었다. 이것은 국왕의 밀의에 의탁하면서 무력으로 정변이나 혁명을 일으켜 먼저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급진적으로 개혁사업을 신속히 단행하는 방법이었다. 개화당은 김옥균이 말한 두 번째의 방법을 택하여 정변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개화당이 구상한 정변은 군사무력을 수단으로 택한 것이었으므로, 개화당은 4개의 흐름으로 정변 무력을 준비하였다.

 

첫째, 개화당 요인 박영효가 한성판윤으로부터 18833월 경기도 광주유수로 좌천되어 가자, 경기도 광주가 수도방위를 위한 4도의 하나로서 광주유수가 군대양성의 권한을 가진 직책임을 활용하여 바로 500명의 장정을 모집해서 서양식 군대를 의미하는 신식 군대양성을 시작하였다. 이 광주군대의 훈련대장에는 개화당 군인장교 신복모를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수개월간의 강훈련 결과 박영효의 휘하에 500명의 강력한 신식 군대가 새로이 양성되었는데, 이것은 개화당의 군대였으며, 겸하여 유사시에는 정변의 무력으로 준비된 것이었다.

 

벌거벗은 한국사 E41

 

둘째, 개화당은 윤웅렬을 18834월에 함경남병사로 임명케 해서 함경남병영이 있는 북청에서 개화당의 무관인 윤웅렬의 주관 아래 약 500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다.

 

벌거벗은 한국사 E41

 

셋째, 김옥균 등이 일본의 육군호산학교에 유학시킨 사관생도들이었다. 일본에서는 아직 대학급 사관학교는 설립하지 못하고 육군호산학교를 설립하여 서양교관들도 초빙해서 일본 신식 육군의 장교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이에 김옥균은 서재필 등 14명을 선발하여 1883년 이른 봄에 일본 육군호산학교에 유학시켰다. 김옥균은 일본에 건너갔을 때마다 이 사관생도들을 매주 1회 불러서 자기의 정치적 포부를 설명하고 결속을 다졌다. 이렇게 김옥균 등 개화당이 유학시킨 사관생도 14명은 약 16개월의 신식 사관교육을 받았을 때, 정변 단행이 결의된 후인 18846월에 모두 귀국하여 갑신정변의 중요한 무력이 되었다.

 

넷째, 개화당이 조직한 비밀결사 충의계의 장사와 군인 장교들이다. 김옥균은 정변을 준비하기 위한 비밀무력조직으로 충의계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서 신복모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충의계의 결사대원은 장사 30명과 친군영 전영군인 13명 등 43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충의계의 장사와 군인들은 정변의 중요한 무력이 되었다. 김옥균을 지도자로 한 개화당은 1883년 봄부터 정변의 무력 준비로서 광주군대 500(친군영 전영군대), 북청군대 500, 사관생도 14, 충의계 43명 등 약 1,050명의 개화당의 무력을 양성해 둔 것이었다.

 

(2) 정변 단행의 결정

김옥균 등 개화당은 1883년 말까지는 정변 단행을 확정하지는 않고 평화적 방법에 의한 개혁을 집요하게 추진했었다. 김옥균 등 개화당이 정변을 단행하기로 확실하게 결정을 내린 것은 1884년 음력 78(양력 89)이었다. 국제정세가 정변 단행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불전쟁의 조짐이 보이자, 청국은 이에 대한 대비로 서울에 주둔시킨 3,000명의 청군병력 중에서 1884523일 절반인 1,500명을 빼내어 안남전선에 이동시키고, 서울에는 이제 청군이 1,500명만 남게 되었다. 이어서 18848월에 마침내 청·불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함대가 청국의 북건함대를 격파하였다. 김옥균 등 개화당은 이때가 정변을 일으킬 시기의 도래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청국이 안남전선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하면서 또 조선에서 대규모 군사행동을 하여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만들 여력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벌거벗은 한국사 E41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개화당은 정변 단행의 결정을 내린 전후에 준비한 정변 무력을 서울에 집중시키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화당은 188468(양력 729)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 등 14명의 사관생도들을 귀국시켰다. 개화당은 이와 동시에 윤웅렬이 함경남병영에서 양성한 북청군대를 서울로 불러올려 정변 무력으로 사용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옥균이 1884619(양력 89) 윤치호를 불러 모종의 밀의를 한 후, 윤치호는 바로 궁궐로 들어가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과 귀국한 사관생도를 수용하는 일을 건의하는 동시에 북청군대의 선발과 상경을 윤허받았다. 윤웅렬은 마침내 470명의 북청군대를 인솔하고 188495(양력 1023) 서울에 도착하여 우선 친군영 전영에 주둔시켰다. 국왕은 910일에는 북청군대의 군사훈련을 친히 관람하고 그 씩씩함에 칭찬과 경탄을 마지않았고 윤웅렬의 노고를 치하하였다그러나 위기감을 느낀 수구파들은 북청군대를 모두 돌려보내고 빼앗기 위한 반격활동을 비밀리에 맹렬히 전개하였다. 실제로 수구파들은 민비를 배경으로 하여 이 무렵 공식적으로는 이미 중앙의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벌거벗은 한국사 E41

반응형

이러한 수구파의 반격과 설득을 들은 국왕은 915일 명령하기를 상경한 470명의 북청군대 중에서 일부만 서울에 남게 하고 일부는 북청으로 돌려보내 교대로 상번케 하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개화당 정변의 무력 준비에 결정적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개화당 중에서도 윤웅렬은 매우 당황하였다. 국왕의 교대 상번명령이 내려진 이튿날인 916일 윤웅렬은 아들 윤치호를 불러 밀의한 결과, 국왕의 정변 지지가 확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옥균 개화당의 급진정변은 시기상조이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데 합의하였다. 이에 윤웅렬은 917일 서울에 데려온 470명의 북청군대 중에서 70명만 서울에 남겨 놓고 400명을 북청으로 돌려보냈다.

 

벌거벗은 한국사 E41

 

개화당이 500명의 북청군대를 양성하여 그 중 470명을 서울까지 데려오는데 성공해 놓고서도, 마지막 순간에 400명을 돌려보내고 70명의 북청군대만을 정변에 활용하게 된 사실은 국왕을 둘러싼 신임 경쟁에서 수구파가 승리하고 개화당이 패배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개화당은 70명의 북청군대 최정예 군인을 정변에 투입했으므로 북청군대 양성이 완전히 무위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개화당이 정변 단행을 결정하여 정변 준비에 박차를 가한 약 1개월여 후인 1884912일 그 동안 일본에 장기휴가를 갔던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가 서울에 귀임하였다. 다케조에는 이전에는 김옥균 등 개화당에 매우 적대적이었으나 종래의 태도를 정반대로 바꾸어 친청사대 수구파와 청국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김옥균 등 개화당에게 호의를 보였다.

 

일본공사의 이러한 태도 변화의 배경에는 일본정부의 정책변화가 있었다. 일본에서 이전에 정한론자였던 고토(後藤象次郎) 등의 자유당은 청국과 프랑스가 갈등하는 시기에 일본은 조선에서 개화당을 지원하여 청국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자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18848월에 안남문제로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가 이 정책을 채택하여 정책전환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노우에는 다케조에의 서울 귀임을 독촉하면서, 이번에는 서울에서 청국에 대항하는 개화당을 지원하라고 지시하였다.

 

개화당은 917일 밤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이 모여서 일본 측의 정책·태도 변화를 면밀히 검토해 보고, 일본의 개화당 지원으로의 정책전환이 사실이면 이를 수용하여 활용하기로 합의해서, 조선 개화당이 거사를 하는 경우에 일본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하였다.

 

김옥균 등 개화당이 일본측으로부터 지원받으려 한 것은 주한일본공사관 호위병으로 와 있는 일본군 150명과 약간의 자금이었다. 개화당의 전략전술로서는 정변에 일본군을 끌어들여 국왕 호위의 임무를 주면, 남방에서 청·불전쟁을 하고있는 청국으로서는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1,500명의 청군으로 조선 국왕 호위 중의 일본군을 공격해서 청·일전쟁이나 청·일충돌을 일으킬 수 없게 되어, 이이제이로서 외세 청군은 외세 일본군으로 방어하고 국내 수구파는 국내 개화당이 맡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김옥균은 일본군의 역할은 청군에 대항하여 국왕을 호위하는 일뿐이요, 개화당이 조선 내정이나 수구파 처리문제를 담당한다고 하여 일본공사의 합의를 얻었다. 정변 후의 일본 측의 만일의 간섭에 대한 예비를 위한 것이었다.

 

(5) 국왕의 밀칙 획득

김옥균 등 개화당으로서는 정변을 일으킴에 당하여 국왕의 승인과 가능하면 밀칙, 밀서를 받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군주제하에서 그래야만 정변의 정당성이 확고히 백성들에게 설명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김옥균은 18841012일 국왕과 독대한 기회를 포착하여 국제정세의 급박성에 대해 청·불전쟁 발발, 러시아의 극동침략, ·일전쟁 발발, 조선의 급박한 위기 등을 긴박하게 설명하고,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 청의 간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과 과감한 개혁단행의 불가피성을 설득력 있게 주상한 후에 마침내 국왕의 밀칙을 문서로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6) 행동계획의 최종정리

김옥균 등 개화당은 18841011일에서 1014일에 걸쳐 정변의 거사에 대한 행동계획을 최종적으로 수립하여 점검했는데, 이를갑신일록에서 추려 처리하면 다음과 같다.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건물 낙성식 날을 거사일로 한다. 홍영식은 수구파 4영사(한규직·윤태준·이조연·민영익)의 유고 유무를 탐지하여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회 일자를 정하되 3일 이내로 한다.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 도중 별궁에 불을 질러서 거사의 신호로 한다. 별궁에 불이 나면 4영사는 직책상 불을 끄러 화재현장으로 가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때 4영사 등 수구파 요인을 처단한다. 수구파 1인에게 하수인 2인씩을 배정하되, 하수인은 각각 단검 1자루와 단총 1자루씩을 휴대한다.
별궁에 불지르는 일은 이인종이 총책임을 맡고, 이규완·하응선·윤경순·이규정 등이 함께 석유를 뿌려 수행한다.
수구파 4영사의 처단에 대해서는 민영익을 윤경순·이은종이, 윤태준을 박삼룡·황용택이, 이조연을 이규정·신중모가 담당한다. 만일 이들이 실수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별도로 일본인 3명에게 조선옷을 입혀 예비로서 수구파 1명에게 1명씩 배정한다.
별궁 발화 후 수구파의 도래를 기다려 개화파 장사들을 지휘 호령하는 임무는 연장자인 이인종과 이희정이 맡는다. 이들의 통신연락과 왕래정찰은 유혁로와 고영석이 담당한다.
대신들과 별입시가 출입하는 금호문 밖에는 신복모가 지휘하는 개화당동지 장사(충의당) 43명을 매복시켰다가 민태호·민영복·조영하 등이 화재에 대한 문안차 입궐하면 즉시 처치한다.
대궐 안의 내응으로는 친군영 전영소대장 윤경완이 칭병하여 당번을 천연시키다가 거사 당일 밤에 숙직을 자청한 후, 대궐 밖의 거사에 호응하여 친군영 전영 병사 50명을 거느리고 있다가 비상선을 넘어 대궐 안으로 들어오는 자가 있으면 처치한다.
고대수(42세의 중년부인으로 신체의 건대함이 남자 이상이요, 완력이 남자 5·6명을 당할 수 있는 궁녀로서 10년 전부터 개화당에 궁궐 내 정보를 알려주던 궁녀)라는 별명을 가진 궁녀로 하여금 준비해 준 폭발약을 대궐 밖의 화광을 신호로 하여 통명전에서 폭발시켜 폭음과 섬광을 내게 한다.
김봉균과 이석이로 하여금 준비해 준 화약을 갖고 인정전 행랑에서 숨어 대기하고 있다가 개화당 요인들이 입궐할 때 폭발시켜 폭음으로 성세를 돕게 한다.
별궁에 불이 난 뒤 일본공사관으로부터 일본군 30명을 빌려 경우궁과 금호문 사이를 왕래하며 의외의 사고를 방지케 한다.
일이 일어나서 혼잡하게 되면 자기편끼리 또는 일본인과 서로 충돌할 염려가 있으므로, 암호로 자와 일본어 요로시를 모든 장사들에게 알린다.
정변 성공 즉시 국왕은 경우궁으로 옮겨 모시고 삼중으로 호위하되, 내위는 개화당 장사(충의계)와 사관생도가, 중위는 일본군이, 외위는 조선군(친군영 전영과 후영군인)이 담당한다.

 

김옥균 등은 이상과 같은 순서로 정변을 실행에 옮기는 최종 점검을 한 후 일찍이 거사일을 1017(양력 124)로 정하고서도 다케조에와 일본 측에게는 이를 알려주지 않고 있다가 우편선 천세환이 인천을 출항한 뒤인 16일에야 일본 측에 알려주었다. 김옥균은 다케조에가 경솔하며 변덕스러운 성품을 가졌고, 일본 정부의 정책은 수시 변하므로, 일본 측이 갑자기 정책을 바꾸어 정변을 누설 실패케 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김옥균은 유대치를 방문하여 거사를 독촉받았을 때에도 일본은 확실히 신뢰할 수는 없다고 응답했었다. 김옥균은 천세환이 일본에 갔다가 다케조에의 보고에 대한 일본 정부의 훈령도 싣고 인천항에 입항할 예정일이 1020일이므로, 그 이전인 17일에 정변을 일으켜서 20일에는 이미 정변을 완결지으려고 하였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