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및 역사이야기

한국사이야기 | 갑신정변 - 배경

곰고로곰 2023.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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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열강과의 외교

당시 개화지식인들은 임오군란 뒤 조선의 정치에 대한 청국의 간섭이 노골화되면서 조선의 독립에 위협을 가해오자 외국 특히 구미세력을 끌어들여야 된다고 믿고 있었다. 개화당 요인들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과의 국교수교를 갈망하고 있었다. 조선책략朝鮮策略이 들어온 이후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서 미국은 영토에 야심이 없는 공평무사한 나라이므로 맘놓고 신뢰할 수 있는 나라라는 대단히 호의적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런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인 1882(고종 19) 522일 이홍장의 주선으로 체결되었다.

 

벌거벗은 한국사 E41

 

이홍장은 자신의 주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성립된 지 2주 뒤인 188266일 역시 이이제이 정책의 하나로 조영조독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이 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관세율이 너무 높다는 아시아주재 영국 상인들의 불평으로 영국 정부는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정부에도 종용하여 비준을 거부케 하면서 조약을 개정할 기회만 노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파견된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 일행은 18831013일 동경에 도착한 이후 일본 외무성의 주선으로 주일영국공사 파아크스(Harry S. Parkes)와 가진 면담에서 영국이 조약수정의 제의를 조선정부에 직접 해온다면 영국측이 요구하는 조건을 수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즉 당시 개화파들은 조약의 내용이 한국에 유리한지 어떤지를 따지기에 앞서 구미제국과의 조약체결이라는 그 자체에 더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종래의 관세율에서 거의 절반으로 인하된 내용으로 1126일 조영조독수호통상조약을 다시 조인할 수 있게 되었다.

개화당 인사들은 미국영국독일뿐만 아니라 조선과 수교를 원하는 모든 나라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종 또한 이러한 개화당의 생각에 공감하여 18831016일에 고종은 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를 통해 영국과 러시아에게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188477일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었다.

 

프랑스는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잠입한 이래 1866년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천주교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에서는 증오의 대상으로 되어 있던 나라였다. 따라서 쉽게 수교를 이룰 수 없었으나 임오군란 뒤 개화당 요인들을 중심으로 프랑스와도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안남문제로 인한 청불간의 험악한 관계, 천주교 포교문제 등으로 프랑스와의 조약은 1886년에 가서야 조인되었다.

 

차관교섭

임오군란 직후 조선의 재정은 만성적인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국가의 재정지출은 날로 늘어났으나 수입을 증대시킬 만한 재원이 별로 없어 정부에서는 그 미봉책으로 화폐를 찍어 내고 있었다. 개화당 요인들은 이러한 국가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외국에서 차관을 얻어 보려고 하였다.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에서 쉽게 차관을 얻어 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임오군란 뒤 188210월 박영효를 정사로 하는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김옥균도 수행하여 이 때 일본정부의 주선으로 일본의 국책외환은행인 요코하마은행으로부터 17만 원의 차관을 들여올 수 있었다. 문제는 차관의 조건이었다. 원금과 이자의 상환이 약정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지연되는 경우에는 부산해관의 수입금과 함경도 단천금광에서 공동으로 채굴하여 거두어들인 금으로 상환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해관의 자주권과 금광채굴권을 침탈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놓은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수신사 박영효 등은 3개월간 동경에 체류한 뒤 귀국하였다. 그러나 김옥균과 서광범은 계속 남아 일본 정부 요인들과 접촉하면서 또 다른 차관의 도입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 정부의 국채위임장만 있으면 차관을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믿고 다음 해 3월에 일단 귀국하였다.

 

당시의 국내재정은 여전히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므로 집권층인 민씨측에서는 묄렌도르프의 조언에 따라 당오전 발행을 서두르고 있었다. 김옥균은 당오전과 같은 악화(惡貨)의 주조는 물가고로 국민 생활에 큰 해독을 주게 된다고 반대하면서 차관도입이 유리하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양측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여 316일 당오전의 주조령을 내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옥균에게 300만 원 국채모집의 위임장을 부여하여 일본에 다시 파견하였다.

 

그러나 김옥균은 곧 일본에서 30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한다는 것이 용이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김옥균의 정치적 역량을 의심하고 조선정계에서 개화당의 지위가 무력하다고 보아 이들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고 개화파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에게 보고함으로써 결국 차관도입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원인으로서는 당시의 일본정부나 민간재계에서 300만 원이란 거액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김옥균은 일본으로부터의 300만원의 차관도입을 기대할 수 없겠다고 판단되자 모오스(James R. Morse)를 통해 미국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을 모색하였으나 이것도 불가능하였다. 김옥균이 세 번째 도일하여 10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차관을 얻어 보려던 노력은 전부 수포로 돌아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집권파와의 대립 속에서 개화파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위기의식은 커져만 갔다.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의 세력침투가 켜져 독점적 지위가 구축되어 가는 반면 청국은 전통적인 종주국으로서의 권위가 실추되어 갔다. 임오군란은 청국으로서는 실추된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군란이 일어나자 청국은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세력을 침투시켰다. 청국의 계획된 무력개입정책과 그들이 대원군을 유인하여 강제납치한 사건으로 임오군란이 일단 수습되었다. 이에 따라 고종은 그해 9월 조영하·김홍집·어윤중 등 진주사(陳奏使) 일행을 청국에, 제물포조약에 따라 다음 달에 박영효·김옥균·서광범·민영익 등 개화당으로 구성된 수신사(修信使) 일행을 일본에 각각 파견하였다. 이들 양파는 혼미한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이를 수습하려는 태도와 방법만은 처음부터 달랐기 때문에 양파간의 대립과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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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하 등 진주사 일행은 오히려 양국간의 기존 관계를 바탕으로 더욱 친청책을 강화하는 정책적 배려를 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청국의 대조선간섭정책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자초한데 반하여, 박영효·김옥균·서광범 등 개화파는 도일할 때 처음으로 국기를 사용하여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과시하고 청군의 조선 주둔이 국체와 독립 국가의 면모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증가된 청의 세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일본의 헙력이나 구미세력을 이용하여 자주권을 회복하여 중단된 개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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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파와 개화파간의 불신과 대립은 특히 민영익이 보빙사의 정사로 미국과 유럽을 유력(遊歷)하고 귀국한 뒤로 더욱 격화되었다. 민영익은 민비의 조카로 1877년 과거에 급제한 뒤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왕과 왕비가 그의 말이라면 듣지 않음이 없었다. 이러한 당대의 세도가였던 그를 김옥균 등은 개화당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민영익은 미국을 다녀온 뒤 집권파에 가담하여 개화당과 상반되는 정치적 견해를 갖고 대립하게 되었다. 민영익은 개화당에 있을 때와는 달리 조선의 독립과 개화에 대해 회의를 품고 개화당에 대해 적대되는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민영익에 이어서 또 188410월에는 윤치호가 우리 개화당 간사중위(幹事重位)의 한 사람이다라고 할 정도로 개화당의 주요인사였던 내시 유재현이 개화당에서 이탈하여 집권파에 가담하였다. 그는 내시였기 때문에 국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개화당에 유리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또 국왕을 둘러싸고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어 개화당을 위하여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이처럼 국왕의 측근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던 인물이 반대파에 가담하였다는 것은 개화당으로서는 크나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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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국내의 정치상황은 갈수록 개화당에게 불리해져 갔다. 이에 개화당은 비상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고종 주위의 집권파를 제거하지 않는 한 이 위기를 돌파해 나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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